17화. 본경기가 시작되다 (1)
화염 정령 소환 스크롤은 재고로 남는다. 튜토리얼에서 유저들이 사지 않아, 나중에 중반 즈음에 등장한다.
그랬던 사실이 바뀌었다.
“이, 이런 젠장!”
기억을 되짚던 장현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1회차와 다른 것은 바로 그 자신.
자신이 움직이면서 이번에는 1회차와 달리 많은 사람이 통과했다.
죽었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게 되면서, 사라져버린 많은 선택지가 생겨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어……. 화염 정령이 좋기는 한데, 왜 그렇게 좌절해? 여기 이놈들을 보라고.”
지로발이 실프와 노움을 들어 보인다.
“화염 외에는 필요 없어.”
장현은 역정을 냈다.
물론 실프나 노움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녀석들을 소환수로 길들이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계 속성은 두 가지를 중복으로 가질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괜히 장현이 1회차에 화염계 능력을 결국 얻지 못했겠나. 그때는 묠니르로 인해 전력계 능력을 얻었기에 화염계 능력을 가질 수 없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군.’
장현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비록 힘든 길을 가게 됐지만, 화염계 능력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애초에 아르헨과 합의한 대로 용암 지대에서 적절한 방법을 찾으면 된다.
다만 1회차처럼 어마 무시한 고생을 할 것이 뼈아플 뿐.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니, 유감이군.”
지로발의 위로에 장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고마워. 이제 상점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출구는 저쪽이다.”
지로발이 가리키는 곳에 흰색 빛이 일렁이는 출입구가 있었다.
저곳을 나서면 곧장 본경기로 넘어가게 된다.
장현은 막 넘어가기 전 발을 돌렸다.
“지로발.”
“응? 뭐 남은 게 있나?”
“아까 말했던 부탁. 그걸 지금 정했다.”
“뭔데.”
지로발의 얼굴이 약간 구겨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부탁. 그걸로 뭘 뜯어낼지 감도 안 온 것이다.
강력한 무기. 파괴적인 스크롤. 고가의 아이템을 요구한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거절할 생각이었다.
“작업실의 출입 권한. 리저드 종족이 운용하는 작업실이 이것밖에 없는 건 아니겠지?”
“엥?”
하지만 장현의 요구는 뜻밖에도 대단히 조촐한 것이었다. 지로발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작업실?”
“그래. 네 작업실은……. 정말 잘 짜여 있다. 고작 튜토리얼에서 이 정도라면, 앞으로 나올 상급 상점에서는 이보다 훨씬 대단한 걸 볼 것 같은데.”
“흐흐.”
지로발의 입가가 찌익 올라갔다. 작업실이 잘 만들어져있다는 칭찬에 기쁘지 않은 상인은 없는 것이다.
“음…….”
잠시 주판알을 튕겨본 그는 곧 끄덕였다. 큰돈이 들어가지 않고, 꺼림칙한 부탁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상점 이용은 내 마음대로 해 줄 수 없어. 알고 있지?”
“알아.”
“상점에 들렀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거라면 수긍하지.”
“좋아. 그 정도로도.”
“그래. 계약 성립이다. 약속의 증서에 걸고 말한다. 나 리저드 지로발은 지구인 장현에게, 리저드맨들의 상점 작업실 출입 권한을 부여한다.”
슈우우욱.
지로발의 손등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약속의 증서. 그 맹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스르륵.
“음.”
장현의 손에서도 불티가 일었다. 그는 기껏 얻은 대박 카드를 이런 곳에서 쓰는 것에 한숨을 쉬었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지.’
유니크 스크롤의 확보에 실패한 이상, 고출력의 화로는 좀 미뤄지게 생겼다. 지금으로서는 상점의 작업실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상점 NPC를 상대로 부탁 한번. 아껴 뒀다면 나중에 큰 득을 볼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를 찾기 어렵다.
후르르륵.
“흠.”
화염이 장현의 손등에 표시를 남겼다. 뭔지 모를 문양이 하나 새겨지고, 장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음?”
그런데 갑자기 지로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장현을 보며, 살짝. 거의 소곤거리는 소리에 가깝게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인데. 앞으로 ‘에레뜨’라는 말을 듣게 되면 나를 찾아와라.”
“에레뜨?”
“그래. 그리고.”
휙.
지로발은 고개를 돌리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일족의 작업실을 알아보는군! 그 정도라면 소개해 줄 만하지!”
“……?!”
장현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지로발이 조금 전에 말하며 보인 표정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모습. 결코, 다른 곳에서 말을 꺼내지 말라는 듯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에레뜨. 에레뜨라…….’
처음 듣는 말이다. 1회차에서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름. 하지만 그 기억을 되짚을 시간은 없었다.
“거래는 끝났다. 인간! 돌아가라!”
쉬이익!
지로발의 선포와 함께 빛이 그를 휘감았다.
[튜토리얼을 종료하고 마계로 이동합니다.]
[220명의 지구인이 마계로 진입했습니다.]
[지금부터 본경기 ‘살고 싶어? 그럼 노력해야지!’가 시작됩니다.]
[첫 번째 퀘스트입니다. 좀비와 스켈레톤을 피해 기차역으로 가세요.]
“여긴 어디지?”
“너무 어두운데.”
“내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 혹시 나한테만 뜬 건 아니지?”
상점을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찌릿!
뒤이어 이질적인 지식이 밑도 끝도 없이 머릿속에 주입된다.
장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톡톡. 관자놀이를 두들겼다.
“그러고 보니 퀘스트라는 것이 떴어.”
좀비를 피해 기차역으로 가라는 퀘스트가.
“기차역이라니……. 그럼, 여기 지구란 말이야?”
“몰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좀비와 스켈레톤을 상대해야 해.”
“스켈레톤이라니 판타지에 나오는 해골? 이게 말이 돼?”
“안될 건 또 뭐야. 오크가 나온 판국인데.”
“하. 언데드라니…….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시체라니.”
몬스터지만 생물을 상대하는 것과 아예 생명이 없어 끝없이 되살아나는 것은 다르다.
오크에 이어 언데드를 상대하라는 퀘스트에 사람들이 주눅 들었다.
“다들 무서워하지 마세요! 우린 오크를 상대로도 이겼습니다! 좀비나 스켈레톤이라 해도 다르지 않아요! 무엇보다 보상도 얻었으니까!”
이나연만 바빴다. 그녀는 겁먹은 군중들 사이를 파고 들어가, 사람들의 손을 잡고, 못 보던 것을 휘둘러 보였다.
찰칵! 찰칵!
금속제 삼단봉.
현대 지구의 경찰들이 쓰는 주 무기다. 검이나 창이 더 성능이 좋을 테지만, 아무래도 손에 맞는 무기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현아!”
“……덕배.”
“그거 뭐냐? 망치야? 여. 뭔가 있어 보이는데? 나도 장비 맞췄다. 이거 봐봐.”
탁탁.
덕배가 허리춤의 장검을 두들겼다.
못 보던 장검이다. 아마도 보상으로 얻은 듯했다.
“본경기라고 크게 달라질 것 없어요! 우린 강해졌습니다! 다들 힘내세요!”
이나연이 바쁘게 사람들을 격려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 말대로 본 경기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조금 난이도가 오를 뿐이다.
무엇보다 플레이어들도 튜토리얼 때보다 강해졌다. 스탯이 생기고 장비 또한 갖춰졌다.
투지만 잃지 않으면, 인간은 의외로 상당한 전력이 된다.
“검방으로 가기로 했어. 아무래도 방어 쪽을 보강하려고.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런데 너무 수비적이지 않아?”
검방. 검과 방패를 든 전사는 가장 흔하며 생존하기 좋은 포지션이다. 다만 탱커를 목표하는 게 아니라면, 오래가기 힘들다. 화력이 딸리니까.
“어. 그래서 여차하면 쓸려고 이거 샀어. 유니크 스크롤.”
“유니크…….”
뒤이어 덕배가 꺼내든 스크롤. ‘샐러맨더 소환’이라는 글자에 장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녀석이었군.’
“어. 현아?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장현은 조용히. 어금니를 꽉! 물었다.
죽 쒀서 개 줘도 정도가 있지. 다른 놈도 아닌 덕배가 저 스크롤을 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1회차에서 오매불망 안타까워했던 유니크 스크롤. 그걸 엉뚱한 놈이 가졌다. 이로 인해 그간 세웠던 장기적 계획이 어마어마하게 꼬여버렸다.
‘죽일까? 죽여서 뺏어?’
“후우…….”
화가 날 정도로 안타까웠지만, 장현으로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인간적으로 그럴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튜토리얼 상점에서 구매한 스크롤은 개인 귀속이다.
죽인다고 해서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덕배를 살려야 될 이유가 또 생겼다.
장현 본인이 화염계 능력을 얻지 못할 경우, 덕배는 그걸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한 인원이다.
“계약 스크롤을 실행해봐.”
다만 짜증은 짜증인지라, 말이 좀 무뚝뚝하게 나갔다.
“어……. 시도해봤는데 레벨이 부족하대. 레벨을 높이거나 강한 화기를 주입해야 한대.”
“그랬지.”
유니크 스크롤이니만큼, 발동하는데 기본 요구 사항이 있는 건 당연하다.
적절하게 예상되는 장소라면 역시 용암지대.
장현은 다시 한번 한숨만 푸욱 쉬었다.
푸스슥! 푸스슥!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새카만 흙바닥에서, 시허연 무언가가 꿈틀대며 솟아난 것이다.
달그락. 달그락.
처음에는 손이. 다음으론 머리가. 그 뒤를 이어 온몸이 드러났다.
걸어 다니는 해골. 그 수가 하나둘, 셋.
처음에는 눈을 비비던 사람들이 늘어나는 숫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스. 스켈레톤이다!”
“마, 말도 안 돼! 해, 해골이 일어나고 있어.”
따각따각. 달그락 달각.
다가오는 해골들의 숫자는 벌써 십여 개. 많이 위협적이지는 않다.
따각따각. 달그락 달각.
따각따각. 달그락 달각.
문제는, 이놈들이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 십여 마리였던 스켈레톤은, 잠깐 사이에 수십 마리가 되었다.
따각따각. 달그락 달각.
따각따각. 달그락 달각.
그리고 장현 일행을 감쌀 정도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고, 하얀 죽음들은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크기기기기--!
‘쉽지 않겠는데.’
장현은 인상을 썼다.
그의 무기는 망치다. 마침 언데드에게 효과적인 둔기다. 문제는 사람 대부분이 창을 장비하고 있다는 것.
“이. 이거 뭐야! 통과해!”
부웅! 딸칵!
직전에 오크들과 격돌한 처지다 보니, 스켈레톤을 상대하기에 가장 안 좋은 병기라는 것이다.
빠그다닥! 꽈악!
“으아악! 창을 뺏겼어!”
“뒤로 물러나요! 어서!”
이나연이 당황한 사람을 밀치고 삼단봉을 휘둘렀다.
빠각!
생명이 있는 오크를 상대로는 창이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몸이 뼈밖에 없는 스켈레톤은, 뼈와 뼈 사이에 빈 곳이 많다.
몸통을 노려 찔렀다간, 저렇게 그나마 가진 창마저 빼앗기고 만다.
“화살표가 떴어요! 이쪽이에요!”
띳. 띳. 띳.
흙바닥에 파란 화살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척 봐도 이쪽이오. 라는 듯한 모양에 사람들이 자연스레 몰리기 시작했다.
“가요! 이쪽으로……!”
“그쪽이 아냐! 여기서 길이 난 곳은 함정이다!”
사람들을 인도하던 이나연이 멈칫했다. 당황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장현을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는 수가 있어! 이쪽으로! 따라와!”
부웅! 붕!
장현이 망치를 휘두르며 아래쪽으로 향했다.
까드득!
이가 갈렸다. 1회차 때도 무작정 저 화살표를 따라갔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었다.
저게 향하는 길은 수많은 나무가 빼곡히 서 있는 숲.
그리고 그 숲의 나무들은 식인 식물들이다. 언데드의 공포에 질린 인간들이, 나무에 기대는 순간 앗 하고 잡아먹히고 만다.
“다들 조심해! 당장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야! 길옆으로 빠져서 돌파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나연이 항의하는 건 무시했다. 장현은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 높이고는 방향을 틀어 길에서 이탈해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따각따각. 달그락 달각.
따각따각. 달그락 달각.
스켈레톤들이 계속해서 솟아나고 있었다. 이제 그 수는 무려 수백.
놈들은 언데드. 이미 죽은 자들이기에 완전히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박살을 내서 소멸시키더라도 도로 붙는다. 시간만 늦출 수 있을 뿐 또 부활한다.
즉, 벗어날 방법은 이 구역에서 도망치는 것뿐이다.
“어, 어디로 가는 거야? 길은 이쪽이야!”
누군가 고함질렀지만, 장현은 무시했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다. 사실 설명할 방법도 없다.
따각따각. 달그락 달각.
따각따각. 달그락 달각.
장현이 이끄는 방향에서도 스켈레톤은 솟아났다. 허옇게 돋아나는 죽음에, 장현은 망치를 쥐고 씨익 웃었다.
“새로 얻은 망치를 시험해 볼 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