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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끝나지 않는 전쟁 (5)
죽어 자빠진 병사가 비척대며 일어나 새까만 장막 너머로 향했다. 장막이 요동을 치며 앞에 다가선 병사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살점이 다 녹아내리고 뼈만 남은 해골 병사가 장막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그런 광경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체가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사단이 준비를 끝마치고 사격 허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가는 무슨 허가! 마법사들은 눈이 없는가! 당장 마법을 쓰지 않으면 방어선이 뚫릴 판이다! 무조건 큰 걸로 쏘라고 해!]
[하지만 그랬다간 아군 병사들이!]
[이 새끼야! 지금 저 새끼들 살리려다가 다 죽게 생겼다고!]
중년 지휘관이 참담한 얼굴로 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화려한 마법이 펼쳐졌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날 용서하지 마라! 날 저주해라! 나도 네놈들처럼 처참하게 죽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니, 부디 위안 삼거라!]
폭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중년 지휘관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법이 잦아들고, 장막 너머에서 기어 나오는 마물들과 사자들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기사단이 왔습니다!]
[빨리도 오는구나….]
뒤늦게 들이닥친 기사단이 찬란한 검광을 흩뿌리며 마물들을 난도질하는 모습을 끝으로 영상이 사라졌다.
“현재의 영상 기록구로는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마법사가 나서서 영상이 끝이 났음을 알려주고, 곁에 있던 기사가 나서서 전선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방금 보신 영상은 이베리아의 지원을 위해 중부에 파견나간 제국의 67철갑보병연대가 아스토리아 남부에서 펼친 전투 기록입니다. 이날 전투에서 67철갑보병연대 총원 1,942명 중 624명이 전사했습니다. 부상자는 전원 사망하였기에 소수의 경상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영상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건 제국의 59철갑보병연대와 테네시아 왕국의 왕실보병연대의 합동전투에 관한 영상입니다.”
마법사가 또 다른 영상을 시현해보였다. 방금 보았던 영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광경이 또다시 눈앞에서 펼쳐졌다.
“테네시아 왕실보병연대 1,612명 중 1,300명이 전사했고, 제국 59철갑보병연대 총원 1,933명 중 482명이 전사했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많은 사상자 수, 하지만 더욱 끔찍한 건 따로 있었다.
“이 모든 전투는 단 두 시간 동안 벌어진 일입니다.”
각국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정규보병들이 불과 두 시간 만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아스토리아 교국을 둘러싼 저 장막은 평소에는 딱딱하게 굳어 아무런 해도 없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접촉을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장막이 때때로 흐물흐물하게 변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흐물흐물하게 변한 장막은 두 시간 동안은 유지됩니다. 어떨 때는 하루에 세 번씩 변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며칠이 지나도록 잠잠할 때도 있지요. 그때만큼은 장막이 위험하게 변하지요. 흐물흐물하게 변해버린 장막 속에서 마물들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전선에서는 그 현상을 각기 넘버를 붙여 웨이브(Wave)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사가 잠시 텀을 두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금 전에 보셨던 영상들은 모두 첫 번째 웨이브 영상입니다. 두 번째 웨이브부터는 영상에서 보셨던 것보다 훨씬 더 포악한 마물들이 튀어나옵니다. 세 번째 웨이브에서는 상급 마수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왜 두 번째 웨이브와 세 번째 웨이브의 영상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그 편이 전선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더 좋지 않겠는가.”
회의실에 있던 노귀족 하나가 묻자 설명을 하던 기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두 번째 웨이브 이상을 막아낸 부대들은 전부 전멸했습니다. 극소수의 생존자가 있지만, 영상 기록구는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가뜩이나 무겁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더욱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현재까지 이베리아에 지원을 나간 아군 병력 이만사천 명 중 사천팔백 명이 전사했습니다. 단 이 주일 동안 전체 파견병력의 이 할이 전사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는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습니다.”
“허어! 아군의 정병이 애먼 곳에 가서 피를 보고 있구나!”
“당장 병력을 물려야 하지 않겠는가.”
귀족들이 아우성을 치자 기사가 조금은 굳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용사 박준민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된 중부 왕국 연맹은 오히려 더욱 대대적인 지원을 요청한 바가 있습니다.”
용사 박준민을 언급하자 귀족들의 시선이 일시에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더 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김선혁이 있었다.
“일단 회의는 종료하고, 마법사는 남도록.”
오필리아가 몸이 성치 않은 관계로 회의를 주관하고 있던 그가 해산을 명령하자 귀족들이 머뭇대다가 자리를 떴다.
“그 기록 영상구 꼭 마법사가 있어야 하나.”
“그건 아닙니다. 이쪽에 있는 마력석이라는 걸 이용하면 몇 번 정도는 마법사 없이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럼 그 영상구들과 마력석을 두고 돌아가 보게.”
마법사마저 떠나가고 회의실에는 그 혼자 남겨졌다.
홀로 남은 그는 밤이 다 가도록 몇 번이고 기록구의 영상을 돌려보았다.
요동치는 검은 장막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고, 영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서부의 보랏빛 하늘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사악함이 느껴졌다.
[형님. 대적자라는 놈이 번번이 이러는 것도 너무 쪽팔리고, 형님한테 죄송한데. 이번에는 정말 저 혼자 힘들 것 같아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영상 기록구가 도착하기 전 용사 박준민이 직통으로 통신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용사는 교국에 일어난 재앙을 혼자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토로했고,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안하다. 준민아. 지금은 나도 쉬고 싶다.”
그는 용사의 청을 거절했다. 용사는 몹시 실망했지만, 억지로 그를 설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긴 그간 형님이 해온 일들이 그렇게 많은데. 매번 그렇게 형님한테만 모든 것을 맡겨두는 것도 좀 그렇기 하네요. 알겠어요. 형님. 이쪽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조카가 태어났는데 상황이 이래서 가보지도 못하고. 영 아쉽네요.]
“이해해줘서 고맙고, 미안하다.”
[별말씀을요. 형님이 없더라도 실패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전력을 쥐어짜봐야 겠어요. 그럼 형님, 며칠 내로 또 연락드릴게요.]
하지만 연락을 준다던 박준민은 더 이상 연락이 없었고, 교국을 둘러싼 방어선의 피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만 전해져 왔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 김선혁은 전선의 전투를 상세하게 볼 수 있었다.
“후.”
마침내 마력석의 수명이 다하고, 영상이 뚝 하고 끝이 났다.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김선혁이 회의실을 나섰다.
전투의 기록을 보다 보니 시간을 잊었다. 그래서 침실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그는 가만히 몸 돌리고 잠이 든 오필리아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그 곁에 몸을 눕혔다.
심란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지만, 한참이나 뒤척인 끝에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필리아가 눈을 떴다.
방금 일어난 사람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또렷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물끄러미 김선혁을 바라보았다. 잔뜩 그늘이 진 얼굴로 그녀는 잠든 제 남편과 아이를 눈에 담았다.
“다녀올게요. 빅터, 너도 잘 놀고 있어. 엄마 말 잘 듣고.”
아직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아이가 엄마 말을 잘 들을 게 또 무에 있다고 뻔뻔스럽게 지껄인 그가 침실을 나섰다. 전날의 고민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아.”
그가 떠나고 오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왕과 내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건만, 지금은 그게 너무도 후회가 되는구나.”
말귀 못 알아듣는 빅토리우스는 제 어미의 고민도 모르고 젖만 찾아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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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를 뒤로 하고 회의에 참석한 김선혁은 귀족들과 함께 중부에 일어난 재앙에 대해 대책을 강구했다.
“일단은 일반 병력의 추가적인 지원은 잠시 보류하는 걸로 하겠소. 현재까지 중부에 파견나간 인원만으로도 이미 그 어떤 왕국보다 큰 부담을 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중부 왕국 연맹 또한 이를 탓할 수는 없을 거요.”
일반 병사들을 아무리 투입해봐야 방어선을 지키는 게 고작이었다. 교국에 일어난 재앙을 해결하려면 장막을 막아서는 게 아니라 장막 너머로 뚫고 들어가 그 근원을 제거해야 했다.
그리고 장막 너머에서 제 몫을 할 수 있는 건 기사와 마법사를 비롯한 초인들뿐이었다.
하지만 초인들을 무작정 파견하기에는 제국이 그간 흘린 피가 지나치게 많았다. 아무리 초인 전력이 모든 대륙을 통틀어 가장 풍부한 제국이라고 해도 무제한적으로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었으니, 초인 전력의 지원 여부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해봐야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정말인가보군. 예전의 대공이라면 덮어놓고 중부로 달려갔을 텐데 말이지.”
귀족들이 해산하고 홀로 남은 그를 레인하르트 후작이 찾아왔다.
“설마 대공이 제국의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 기사단의 파견을 보류할 줄은 상상도 못했네.”
“마음 내키는 대로 귀한 제국의 초인을 사지로 내몰라고, 폐하께서 제게 잠시나마 국정의 운영을 맡기신 게 아닐 테니까요.”
오필리아의 전폭적인 신뢰가 오히려 그를 움츠리게 만들었고, 그를 수비적으로 만들었다. 그녀가 국정의 전면에 복귀하기까지 현재의 상황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를 짓눌렀다.
“비난하려는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대륙의 누가 있어 대공을 비난하겠는가. 그간 대공이 해온 일만 해도 대륙의 모든 이들이 대공 앞에 엎드려 경배를 해야 할 판국이거늘.”
레인하르트 후작은 그간 그리 수고를 했으니, 앞으로는 다른 이들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고 한발 물러날 것을 권했다. 또한 대륙에 인물이 오직 전승 대공뿐만이 아님을 몇 번이나 강조하기도 했다.
후작답지 않은 위로였다.
“후우.”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마치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박힌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는 오필리아 앞에서 일절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그는 여전히 호들갑스러운 아버지였고, 유난스러운 남편이었다.
“빅터! 빅터!”
그 작은 몸짓이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 내내 붙어서 질리는 기색도 없는 김선혁을 보는 오필리아의 표정이 복잡하기만 했다.
“대공.”
“말해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산책이라도 갈까요?”
지나칠 정도로 쾌활한 어투에 오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주시오.”
난데없는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치지 않겠다고.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말이요.”
“그게 무슨 말….”
완전히 굳어버린 표정으로 물으니, 오필리아가 힘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중부로 가시오.”
“오필리아!”
김선혁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말씀만으로 고맙소. 내 대공이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을 충분히 보았소. 그것으로 충분하오. 그러니 더는 망설이지 말고 중부로 가시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전 안 가요! 내 집은 여기라고요. 그런 제가 어딜 또 가요!”
“대공.”
오필리아의 음성이 한결 차분해졌다.
“단, 중부로 향하더라도 먼저 대공이 해야 하는 바를 하시오.”
“대체 뭘 하라는….”
“대공이 지닌 최후의 힘을 완벽하게 취하라는 말이오.”
그녀가 손을 들어 북쪽을 가리켰다.
“용과 함께라면 나 또한 대공을 안심하고 보내줄 수 있을 테니.”
“오필리아….”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한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만을 되뇌고 있자, 그녀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대공이 돌아왔을 즈음에는 제국과 동부 왕국들의 정병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을 터. 그대 오직 승리만을 아는 기사여. 그들을 이끌고 나아가 또 한 번 찬란한 승리를 내게 가져다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