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0 =========================================================================
290. 끝나지 않는 전쟁 (4)
굳게 닫힌 문 너머는 너무도 조용하기만 했다. 출산을 할 때면 당연히 들렸어야 할 비명도 신음도 일체 들리지 않았다. 지엄한 군주의 새된 소리가 행여라도 밖에 새 나와 위엄이 상할까 염려한 황실의 마법사들이 미리 손을 써둔 탓이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더욱더 미칠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굳게 닫힌 저 문을 열고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오필리아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남긴 당부가 그를 붙잡았다.
‘대공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소.’
그녀는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었을지언정 제 남편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 빈틈없는 모습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어쩌랴. 태어나기를 군주의 혈통으로 태어나 그렇게 자라온 그녀의 천품이 그러한 것을 이제 와서 어찌할 수는 없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기를 한참, 어스름 아른거리던 창틀 너머로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철컥.
둔탁한 문소리에 김선혁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너머에서 늙은 시녀장이 나타났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다시 닫고 흠잡을 곳 없는 자세로 여제의 반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나이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쾅댔다. 시녀장이 다음에 할 말이 미치도록 궁금하면서도, 또 듣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사랑스러운 오필리아에게 변이라도 생겼을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건강한 황자님이십니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대공이시여.”
곁에 있던 황가 수호대의 기사가 나서서 부축을 해주지 않았다면, 천하의 전승 대공이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폐, 폐하께서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더니, 시녀장이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폐하께서도 무탈하십니다.”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가가 순식간에 화끈 달아오르고,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가슴 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왈칵 올라왔다.
“폐하를 봐야겠다.”
정신없는 와중에 문을 향해 다가서는데, 시녀장이 앞을 가로막았다.
“왜…?”
“페하께서 애를 참으로 많이 쓰셨던지라, 그 용태(容態)가 평소와 같지 않나이다. 부디 매무새를 다시 하실 수 있도록 잠시의 인내를 발휘해주소서.”
시녀장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그가 그제야 한 발자국 물러섰다.
“기다리겠다.”
“대공의 배려에 폐하를 대신하여 감사를 드리나이다.”
시녀장이 다시 문 너머로 사라지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조금 전의 무겁고 거북스러운 침묵에 비하면 지금의 침묵은 차라리 상큼하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오필리아가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하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굳게 닫힌 문이 다시 움직이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도 결국에는 열리고 말았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금 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시녀장의 말에 김선혁이 냅다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곳에 그토록이나 다시 보기를 바랐던 오필리아가 있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오필리아의 얼굴에는 혈색 좋게 꾸민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피로가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기 좋게 휘어오른 그녀의 눈가와 슬며시 올라간 입가는 몹시도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아….”
그 평안한 모습을 보니 밖에서 마음 졸였던 한나절의 시간이 모두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감사의 인사를 속으로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읊조렸다.
“안쪽으로….”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채 다가설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사내를 시녀장이 이끌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소.”
엉거주춤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에게 오필리아가 물었다.
그녀의 말에 흠칫 놀란 그가 제 얼굴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억지로 얼굴을 펴고 웃어보려고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간신히 편 얼굴이 금세 구겨지고 경련을 일으켰다.
“천하의 전승 대공이 그게 대체 무슨 꼴이오.”
“저는… 저는….”
목이 메여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몇 번이고 입을 우물거리는 그를 보며 오필리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 다 알고 있소. 사려깊고 다정다감한 대공이 얼마나 염려했을지. 하지만 보시오. 나는 이리도 무탈하기만 하오.”
정작 위로받고 축하받아야 할 사람은 오필리아인데 멍청하게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엉망진창으로 격동된 가슴은 도무지 진정될 줄을 몰랐고, 흐트러진 머릿속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결국 한참 만에 꺼낸 말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바보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리숙한 남편의 모습을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그를 다독여주었다.
꼬물꼬물.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김선혁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황금빛 강보에 쌓인 생경한 무언가가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우리 아이요.”
그의 시선을 발견한 오필리아가 슬며시 제 품에 안긴 아이를 내보였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는 필사적으로 제 어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젖을 찾고 있었다.
김선혁은 어쩐 일인지 아이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 어떤 적을 만나도 단 한 번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 흔들렸고, 시선은 아이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향한 채였다.
“대공.”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오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대공이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소.”
마치 그가 보이는 기이한 태도의 이유를 알고 있는 듯, 책망은커녕 온기만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아이의 신체 그 어디에도 인간의 것과 다른 것은 없소.”
속마음을 들킨 김선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필리아를 바라보았다.
“모를 줄 알았소? 나는 진즉부터 대공이 몸에 생겨난 비늘과 용의 피에 대해 몹시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그녀의 말 대로였다.
용혈기사에 오르며 몸에 돋아난 비늘과 용의 그것을 닮은 눈동자는 김선혁으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을 벗어난 건 아닌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은 태어날 아이에 대한 염려로 이어졌으니,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로 인해 아이의 몸에 좋지 못한 일이 생겨날까 몹시도 염려했다.
그래서 차마 그녀가 내민 아이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아이의 몸에 그런 몹쓸 것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이는 평범한 인간이오.”
그제야 김선혁이 강보에 쌓인 아이를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보시오. 대공을 닮아 아주 잘 생기지 않았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녀도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일그러져 있던 표정에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 감동과 환희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대답이었으니까.
“빅토리우스… 빅토리우스….”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던 그가 몇 번이나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
김선혁은 오필리아와 아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잘못될까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고, 온종일 아이의 곁에 앉아 아이가 자는 모습을 구경했다.
여제를 수발드는 시녀들마저도 그 지극정성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봐요! 빅토리우스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날 쳐다보잖아요.”
“아직 귀도 트이지 않고 눈도 못 뜬 아이요.”
오필리아가 몇 번이나 설명을 해주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빅토리우스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온갖 의미를 부여하며 혼자 감격하고 그걸 또 시녀들에게 푼수처럼 자랑을 해댔다.
그때마다 시녀들은 난처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아이를 천재인 양 자랑하는데 그녀들이 뭐라고 장단을 맞춰주겠는가.
“체통을 지키시오.”
보다 못한 오필리아가 나서서 그를 만류하고 나서야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식 자랑은 끝이 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유난스러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처럼 시녀들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법석을 떨지 않게 되었을 뿐이었다.
“아, 좋다.”
이 세상에 떨어진 뒤로 이렇게까지 마음이 평화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전장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충만함이 온 가슴을 가득 채웠다.
김선혁은 부디 언제까지고 이런 평화를 만끽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모든 중부의 왕국, 오늘부로 적대 활동을 멈출 것을 선언.]
[중부의 왕국들이 동부 왕국 연맹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중단해줄 것을 호소. 이를 위한 중부의 협상단이 황도로 출발.]
처음 중부의 전쟁이 극적으로 종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교국에 새로운 마왕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는 바, 본인 역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마왕을 타도하기 위하여 원정대를 꾸려 출발하였다. 하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한 교국의 상황은 말로 전해 들었던 것보다 몇 배는 끔찍했고, 나는 교국 너머로 단 한 발도 디딜 수 없었다.]
용사의 이름이 적힌 전문 한 통이 평화롭던 그의 일상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교국은 마왕의 권역을 넘어 마계가 되었다. 이는 서쪽에서 일어난 재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다. 마계화(魔界化)가 일어난 대지를 한시바삐 정화하지 않는다면, 열의 마왕, 일백의 마왕이 이 대륙에 도래하게 될 것이다.]
[이에 나 용사 박준민은 나를 비롯한 중부의 왕국들만으로는 아스토리아에 일어난 재앙이 대륙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중부와 동부의 모든 군주들과 초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바이다.]
대체 어떤 재앙이길래 그토록이나 자신만만했던 용사가 발을 내딛는 것마저 포기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건 이번에 새로 개발된 영상 기록구입니다. 상급 마법사 이은서 자작의 제안으로 개발된 것인데 어쩌다보니 중부에서 먼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아덴버그가 제국으로 기틀을 마련한 이후, 이방인들의 문물을 엄히 제약하던 제국의 법률이 철폐되었다. 아무래도 영상 기록구라는 것 역시 그때 개발된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 기록구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영상을 기록하여 보여주는 것이겠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흥분해 기록구에 대해 설명하려던 마법사가 김선혁의 말에 풀이 죽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허영심을 채워주기에는 그의 마음이 그다지 여유롭지 않았다.
“나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것이니 따로 설명할 것 없이 즉시 시현하도록 하라.”
“끙. 뜻대로 하겠나이다.”
잠시 불만스러운 얼굴을 해 보인 마법사였지만, 감히 대공의 명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팟.
영상 기록구를 틀기가 무섭게 홀로그램과도 같은 형상이 눈앞에 맺히더니, 다급한 비명이 귀를 파고들었다.
[막아! 놈이 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기사단! 기사단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서쪽 방어선이 뚫리려고 하지 않는가!]
[기사단 현재 전선에 전원 투입됐습니다! 여력이 없습니다!]
[빌어먹을! 그럼 마법사단은! 우리가 다 죽고 나서야 준비를 끝낼 참인가!]
기록구가 만들어낸 영상 속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밤을 발라놓은 듯 새까만 장막, 그 안에서 끝도 없이 마물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중부의 병사로 보이는 이들이 그들을 막아선 채 필사적으로 전투를 이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피가 튀고 살이 튀는 전장, 하지만 기이하게도 시체는 단 한 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김선혁은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