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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화려한 복수 (6)
달려드는 마룡을 보며 김선혁은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부족해.
이제까지 끌어모은 대지의 기운만 해도 어지간한 성 하나쯤은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이 정도로는 마룡과 하나가 된 마왕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더. 더. 더.
마음속으로 외쳐보았지만 흉악한 마룡은 벌써 지척까지 짓쳐 든 상황,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만족스럽지 않은 공격이나마 그대로 내지를 것인지, 그도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운을 더 끌어모을지, 결정해야 했다.
이대로 간다.
결국 결정을 내린 그가 창을 꽉, 하고 움켜잡았다.
그가 막 끌어모은 힘을 어머니 나무의 창에 모아 내지르려는데, 골드레이크가 말을 걸어왔다.
[버텨 보이겠다.]
골드레이크 역시 지금의 힘으로는 마룡을 단번에 끝장내지 못할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를 믿어라.]
대답은 필요 없었다. 골드레이크에 대한 김선혁의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지르려던 창을 다시 회수했다.
[온다!]
골드레이크가 짧게 경고하며 자세를 잔뜩 낮추었다. 그 역시 충돌에 대비하여 골드레이크의 등에 깊게 몸을 파묻으며 창을 꼭 움켜잡았다. 골드레이크 역시 등의 비늘을 넓게 펼쳐 기수를 보호했다.
“음?”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 어떤 충격도 전해져 오지 않았다. 마룡의 공격이 덮쳐들었어도 열 번은 덮쳐들었을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골드레이크는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잔뜩 몸을 낮춘 상태였고, 자신 역시 그대로였다.
충돌의 충격 대신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혈관을 타고 움직이는 지기로 인한 고통뿐이었다.
왜?
의문을 참지 못한 김선혁이 한발 늦게 골드레이크가 펼친 비늘 너머를 살펴보았다.
“아….”
흐릿하지만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금빛 날개가 눈 가득 들어왔다.
“용아?”
드높은 창공에서 오연히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던 용이 어느새 대지에 내려앉아 마룡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벌겠다. 하지만 오래는 버틸 수 없을 것 같구나.]
그 순간 용의 음성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서둘러라. 그리고 명심하라. 일격에 숨통을 끊지 못한다면 이 싸움에서 그대가 이길 방법은 없다. 당부하건대 그대는 단 한 점의 살점과 단 한 방울의 용혈이라도 적에게 주어서는 안 되리라.]
용의 말이 아니더라도 김선혁 역시 알고 있었다.
만약 골드레이크의 피와 살을 마룡에게 내주었다간 더욱 강대한 힘을 갖고도 결국은 괴수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던 과거의 용들과 마찬가지 신세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지기를 모으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곧게 뻗었던 어머니 나무의 창이 뒤틀리더니, 가닥가닥 끊어진 결이 투둑거리며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지금까지 끌어 모은 기운 만으로 마룡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얼핏 가늠한 마룡과 마왕의 존재감은 그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상황이 영 좋지 못하게 흘러갔다.
용을 보고 멈춰 섰던 마룡이 슬금슬금 다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실체도 아닌 형상만으로 저 끔찍한 괴수를 잡아두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크르르.
잠시 움츠렸던 마룡이 흉악한 이를 들이밀며 용의 형상을 물어뜯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황금빛 서기가 검은 기운에 밀려 이지러지다 그대로 흩어졌다.
[부디 다음의 만남은 화신(化身)이 아닌 실체로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노라.]
짧은 인사와 함께 용은 사라졌지만, 마룡은 여전히 그 허상을 쫓아 턱을 아구대고 있었다.
크으.
하지만 아무리 입에 구겨 넣어봐야 허상이 남기고 간 빛무리로는 제 배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마룡은 금세 적안을 번뜩이며 골드레이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룡은 골드레이크에게 닿을 수 없었다.
쐬에에엑!
창공에서 내리꽂힌 거대한 검 한 자루가 마룡의 앞을 막아선 탓이었다.
“마렉?”
이번에 끼어든 건 마렉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구시렁거린 마렉이 철검을 고쳐 잡았다.
“자네와 어디를 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걸세.”
노검사의 손에서 철검이 번뜩이더니, 허공에 기다란 선이 그려졌다.
사아아악.
그리고 그 궤적에 걸쳐진 모든 것이 잘려져 나갔다. 어두컴컴한 하늘도 썩어버린 대지도 전부 날카롭게 잘려 어긋나버렸다.
그중에는 마룡의 목도 있었다.
궤적의 한가운데에 걸린 마룡의 머리통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쯧.”
강력한 마룡의 머리를 베어내는 데 성공한 마렉이었지만, 혀를 차는 그 얼굴 어디에도 기쁨은 없었다.
“이거 원 허공에 대고 칼질이라도 하는 기분이야.”
마렉의 불평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잘려졌던 마룡의 목에서 새로운 머리가 돋아났다. 그런데 그 머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크르르르르.
오히려 전보다 한층 사나워진 마룡의 기세에 마렉이 또다시 참격을 날렸다.
이번에도 마룡의 머리통은 너무도 쉽게 떨어져 나갔고, 다시 잘려나간 단면에서 네 개의 머리가 생겨났다.
“어디까지 늘어나나 궁금하군.”
마렉은 몇 번이고 마룡의 목을 베어냈다. 그리고 마룡 역시 몇 번이고 새로운 머리를 재생해냈다.
수도 없이 많은 참격이 이어졌다.
여덟, 열여섯, 서른둘, 예순넷….
어느새 마룡의 돋아난 머리들이 몸통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렇게 돋아난 목과 머리는 촉수처럼 출렁이며 끊임없이 마렉의 빈틈을 노렸다.
채찍처럼 제 머리통을 휘두르는 마룡에게서 더 이상 처음의 외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드레이크를 닮았던 육신은 뒤틀릴 대로 뒤틀려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었고, 새롭게 돋아난 머리통들은 아룡이 아닌 온갖 종류의 마수들을 닮아 있었다.
개중에는 심지어 인간의 형상을 한 머리통도 있었으니, 마룡은 이제 마룡이라고 칭할 수도 없는 괴물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용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광룡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마룡은 그들보다 훨씬 더 조잡했고, 더욱 흉물스러웠다. 그리고 그만큼 더욱 위험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아직인가.”
마렉이 핏발 선 눈으로 김선혁을 재촉했다.
한 번의 칼질마다 영혼을 담듯 공을 들인 마렉이다. 그런 참격을 수십 차례나 내질렀으니 가뜩이나 계승의 의식 이후로 눈에 띄게 약해진 마렉이 견뎌낼 재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마렉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었다.
“아직 멀었냐는 말일세!”
지친 마렉이 다시 한 번 그를 재촉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끌어들인 지기가 그의 온몸을 마구잡이로 휘저어대고 있었던 탓이다.
“크윽.”
강인한 용인의 육신도 견뎌내기 힘들 정도의 지기, 땅의 아룡조차도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만큼 김선혁이 끌어모은 기운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운을 모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직 확실한 한 번의 공격을 위해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마룡과 마렉의 전투는 이어졌다. 마렉은 이제 완전히 지쳐버렸고, 더 이상 마룡의 목을 베어내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드본을 타고 곡예와도 같은 비행을 하며 마룡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빨리 하게! 더 이상은 나도 힘들어!”
하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크르르.
뒤늦게 김선혁을 중심으로 모여든 기운에 위협을 느낀 마룡이 마렉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순간이 되자 김선혁을 중심으로 몰려든 기운에 위협을 느낀 마룡이 마렉을 무시하고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대공!”
마렉이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로 김선혁을 불렀다.
“조심….”
하지만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그를 태운 골드레이크 역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룡이 입가를 쭉 치켜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캬아아아아.
그리고 섬뜩한 포효와 함께 입을 찢은 마룡의 머리들이 동시에 골드레이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직.
골드레이크의 비늘이 순식간에 찢겨져 나갔다. 개중에 성질 급한 마룡의 머리 몇이 날카로운 비늘에 꿰여 꼬치가 되었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머리가 비늘을 뜯어내고 이를 박아 넣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룡은 자신의 식탐을 채울 수 없었다.
팟.
어렵게 뜯어낸 살점을 채 씹기도 전에 갑작스레 벌떡 일어난 골드레이크의 비늘에 턱이 꿰이고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꿰에에에엑.
놀란 마룡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려 했지만, 수십 개의 머리통을 꿰어버린 비늘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도망치시오.”
듣기 거북한 마룡의 비명 속에서도 유달리 선명한 음성이 마렉의 귀를 파고들었다.
“괜찮은가!”
반색을 한 마렉이 드본을 몰아 김선혁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네….”
그는 끔찍한 마룡의 공격에도 무사했고 상처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덜덜덜.
건장한 육신이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창을 움켜잡은 우람한 팔뚝은 금방이라도 창을 떨어트릴 것처럼 버거워 보였다.
그 모든 원흉은 당장 부서질 듯 위태로운 모습의 창 한 자루였다.
“그건….”
마렉은 그 볼품없는 창의 내부에 휘몰아치는 끔찍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확실히 하려다 보니 너무 과했던 모양이오.”
김선혁의 설명이 너무도 황당했다. 하지만 이를 나무랄 수조차 없었다.
“시간이 없소.”
그의 말대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탓이었다.
“가급적이면 멀리 도망치시오.”
양손으로 창을 움켜잡은 김선혁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당부했다.
“도망치다니, 대체 어디로 말인가.”
아직 싸움이 끝이 나지 않았건만 그는 물러나라는 말 대신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려 물었더니 그가 억눌린 음성으로 대꾸했다.
“최대한 멀리. 할 수 있다면 이 일대를 벗어나시오.”
잠시 대화를 하는 사이에 상황이 악화되었다. 뒤틀렸던 창이 곧 폭발할 듯 팽창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돌아오겠네!”
곧 이어질 폭발로부터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챈 마렉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드본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마렉이 떠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어머니 나무의 창이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쪼개지더니, 기어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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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치열한 격전이 있었던 연합군의 전선은 단연 용사와 마왕이 겨루었던 중서부 전선이었다. 단 한 번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고, 또 교국이 자랑하던 용사마저 잃은 곳이 바로 중서부 전선이기도 했다.
그런 중서부 전선에 또 한 번 재앙이 찾아왔다.
콰르르르르르.
갑작스레 굉음이 들려온다 싶더니, 온 세상이 무너질 듯 진동을 했다.
평원 한 켠에 위치했던 야트막한 산은 폭삭 주저앉았고, 황폐하지만 광활했던 평원 이곳저곳에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중서부에 진출해 있던 교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고 말았다.
힘들여 복구했던 서부의 요새와 주둔지들이 폭삭 무너져 내렸다. 간신히 지진을 버텨낸 요새와 주둔지들 역시 끔찍한 피해를 입은 건 마찬가지였다.
지진은 한 번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지진은 세상이 다 무너지고 나서야 멎을 것처럼 계속해서 서부를 흔들어댔고 하루에도 몇 번씩 땅이 흔들려댔다.
하지만 이 세상에 끝이 없는 것은 없었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지진도 마침내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끔찍한 재앙이 끝이 났을 때, 길게 펼쳐진 전선 너머의 검은 땅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