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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잊혀진 자들 (3)
풍 속성 지배력이 한계치에 도달한 후로도 한참이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던 지 속성 지배력이 마침내 100에 이르렀다.
- 속성 지배력이 한계치에 도달하며 정령과 전보다 한층 더 긴밀한 유대관계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훨씬 더 복잡한 의사의 표현과 이해가 가능해졌습니다.
근래 들어 피난민들에게 치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김선혁에게는 드물게 힘이 나는 소식이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 그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 최상급 땅의 정령 누다르가 고대 땅의 정령(Dwarf)으로 진화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최상급 정령인 누다르 위로는 정령왕 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당에 무슨 변화가 있을까 싶었던 그다.
그런데 정령 진화의 끝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최상급 정령이 끝이 아니었다.
- 아무리 강력한 최상급 정령이라고 해도 그 힘을 온전히 이 세상에서 발휘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대 정령은 다릅니다.
- 고대 정령은 최상급 정령보다 크게 강력하지는 않지만, 훨씬 더 근원에 가깝고 다재다능합니다. 또한 제 힘을 사용하는 데 더욱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 고대 정령은 원하는 만큼 계약자의 곁에 머무를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제 모습을 변형시킨다거나 특정 사물과 일체화를 이루는 식으로 계약자와 보다 가까운 곳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습니다.
- 이 세상의 물건과 일체화된 정령은 매개체를 통해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단, 매개체가 파괴될 경우 정령 역시 끔찍한 피해를 입습니다. 최악의 경우 정령이 본체에 타격을 입고 계약자와의 유대가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간 다른 정령들에 비해 유별나게 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짧았던 누다르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엄청난 변화였다.
“좋았어!”
이제야 비로소 최상급 정령의 강대한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암담했던 귀환길에 한줄기 서광이 비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당장 그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주변의 상황이 너무도 어수선했다.
“자기 조에 사망자나 부상자 있는지 보고해!”
마물들이 한차례 휩쓸고 간 피난민 행렬, 소모한 화살을 회수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퀘이샤들 사이로 유달리 악을 써대는 이가 있었다.
“조장 새끼들 뭐하는 거야! 빨리 빨리 움직여야 정리하고 또 움직일 거 아니야! 시체 사이에서 자빠져 잘래!”
바로 존이었다.
‘굳이 나으리께서 오물을 뒤집어 쓸 필요는 없습니다. 나으리께서는 지금처럼 고고하게 계십시오. 저밖에 모르는 피난민 나부랭이들과 드잡이질이라면 제가 대신 해드리겠습니다.’
존은 피난민들의 이기적인 행태에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있던 그에게 찾아와 사람들의 통제를 맡겨줄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느라 진이 빠져 있던 그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절대로 나으리께 누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요.’
그날 이후로 존은 가장 먼저 사내들을 뽑아 그들로 하여금 하나의 작은 무리를 이끌도록 하였다.
효과는 탁월했다.
존과 사내들의 행동은 다소 지나치게 거친 면이 있었지만 그만큼 효과적이었고, 당장 무질서하던 피난민들 사이에 새로운 규율이 세워졌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쥐꼬리만 한 권력도 권력이라고 무리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난민들을 상대로 패악질을 부리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존은 녹록지 않았다. 이 산전수전 다 겪은 사내는 은밀하게 제 눈과 귀가 되어줄 이들을 뽑아 각 무리에 두어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였다.
‘네놈들이 그따위로 행동하면 믿고 맡겨주신 나으리 입장이 어떻게 되냐. 나으리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살려보겠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마물들과 드잡이질을 하시는데 안전한 곳에 있으니 살만하지 아주?’
존의 처벌은 무자비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김선혁이 피난민들에게 원망을 사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착취하던 몇몇 사내들이 처벌을 받자 그를 칭송하기까지 했다.
온정과 헌신으로 대할 때는 불평과 불만을 일삼더니 정작 대우가 더욱 나빠진 지금은 또 그를 칭송하고 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김선혁은 그 모든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고, 존이라면 최소한 이곳을 벗어나기까지 피난민들을 통제하기에 충분할 거라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존 덕분에 퀘이샤들은 더 이상 피난민들을 신경 쓰지 않고 전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김선혁 역시 습격의 여파를 수습한다고 부산을 떨 이유가 사라졌다.
“하나가 다쳤습니다.”
“열일곱이 다쳤지만,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둘이 죽고 셋이 크게 다쳤습니다.”
존의 욕설과 독촉에 이끌린 이들이 무리의 피해를 보고하고는 사상자들을 수습하는 모습을 본 김선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 하고 있군.
비록 그 방식이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존 같은 사내가 필요했다.
그는 피난민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가만히 누다르를 불러보았다.
“누다르.”
‘주인이시여.’
호명과 함께 땅이 솟아오른다 싶더니 누다르가 나타났다.
“너 모습이….”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정령의 모습이 전과 확연하게 달랐다.
마법사 아리아 아이젠을 닮은 외형과 유달리 짜리몽땅한 모습이야 여전했지만, 흙으로 빗은 인형처럼 무채색 일색이었던 정령은 온데간데없었고, 총천연색의 정령이 그곳에 있었다.
각기 풀잎과 흙의 그것을 닮은 알록달록한 색, 그런데 그 모습이 김선혁에게는 몹시 익숙하면서도 반갑지 않았다.
“왜 하필….”
불규칙하게 녹색빛과 갈색빛이 어우러진 그 색이 마치,
“개구리 무늬냐….”
저쪽 세상의 군복과도 같았다.
‘네?’
순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누다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 모습이 꼭 자대에 갓 배치 받은 신병처럼 보여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주인이시여?’
속성 지배력이 한계치에 도달한 덕인지 한층 풍부해진 누다르의 표정에서 의아함이 느껴졌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털며 물밀 듯이 밀려오는 잡념을 떨쳐냈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애써 표정을 수습한 김선혁이 누다르에게 물었다.
“고대 정령은 뭐지?”
메시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가장 중요한 것만을 알려주었고, 그것만으로 고대 정령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이럴 땐 혼자 머리 싸매고 궁리할 것 없이 바로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게 최선이었다.
‘지금과 달리 정령이 실체를 갖고 존재하던 시절, 퀘이샤들이 어머니를 모시기도 한참 더 이전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어머니를 모시던 수호자 일족, 하지만 이 세상에 머무는 대가로 영원을 잃었기에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존재, 그게 바로 고대의 정령입니다.’
누다르의 장황한 설명만 들어서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딱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영원을 잃었다는 건 안 좋은 거 아냐?”
염려 가득한 김선혁의 질문에 누다르가 고개를 저었다.
‘영원보다 더한 것을 얻었으니, 그 정도의 희생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요.’
영원한 생명보다 더한 가치를 지닌 건 대체 무엇인지 그로서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물론 당장 고대 정령이 되었다고 해서 제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경계를 가로막고 있던 이 세상의 율법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졌을 뿐이지요.’
최상급 정령의 힘은 언젠가 그가 고전했던 거대 환수 토르고스를 잠깐이나마 홀로 막아설 정도로 강력했다. 단지 그 강력한 힘만큼이나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주인의 기력을 많이 소모하는지라 그 활용에 제약이 컸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었다.
누다르는 그게 다 본체의 힘을 온전히 가져다 쓸 수 없어 계약자의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서 기인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번 변화로 말미암아 그런 제약이 상당히 완화되었으니 앞으로 그 어떤 적을 만나서도 전과 같이 도중에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라 장담했다.
물론 문제도 있었다.
‘전이야 타격을 입어도 잠시 물러나는 정도로 끝이 났지만, 이제는 제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약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는다면 소멸할 수도 있겠지요.’
마왕의 권역을 무사히 벗어날 큰 힘이 필요했던 김선혁에게야 좋은 소식이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정령 스스로에게는 좋지 못한 것들 투성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누다르는 크게 걱정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그만큼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리라.
“정말이네.”
과연 누다르의 말을 듣고 보니 전과는 달리 기력의 소모가 과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몇날 며칠이고 내내 누다르를 내놓고 다녀도 부담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제가 머물기에 그렇게 바람직한 환경은 아닙니다. 마기로 오염된 이 땅은 정령과 상극, 억지로 있자면 못 있을 것도 없겠지만 더 좋은 방법이 마침 눈에 보이는군요.’
“더 좋은 방법?”
의미심장한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니 누다르가 양해를 구해왔다.
‘잠시 주인님의 물건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제야 김선혁은 고대 정령이 사물에 깃들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메시지를 떠올려내고는 탄성을 내뱉었다.
“근데 적당한 게 있어?”
지금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다 깨어지고 망가진 갑주와 소소한 잡동사니들뿐이었다. 그나마 멀쩡한 것이라고는 어머니 나무의 가지로 만든 창이 유일했다.
하지만 생목의 창은 그 자체로 정령왕의 힘이 깃든 무구인지라 누다르가 머물기에 그리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누다르가 성큼 다가와 레드번의 안장의 한켠에 고정되어 있던 무언가에 손을 올렸다.
아데스덴 왕실의 비고에서 꺼내온 뒤로 용도를 찾지 못해 방치해두었다가 그대로 잊어버리고 말았던 애물단지, 부러진 창이었다.
‘지금이야 부러지고 꺾여 이리 볼품없는 모습이 되었다지만, 과거에는 필시 뛰어난 무기였겠지요.’
“과거에야 어쨌건 간에 지금은 어디에 쓸지도 모르는 고물인데, 정말로 그걸로 괜찮겠어?”
정령이 깃든 매개체가 파괴되면 정령 스스로도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니 누다르의 힘이 필요한 김선혁으로서는 조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염려와는 달리 누다르는 부러진 창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아마도 인간들이 이놈을 이리 방치한 것은 이놈이 지금은 다룰 수 없는 재질로 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어쩐지 창을 바라보는 누다르의 눈동자에 형언할 수 없는 빛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땅에서 비롯되지 않는 쇠붙이는 없으니, 땅에서 태어난 드워프 일족에게 세상 모든 쇠붙이들은 제 몸과도 같습니다.’
고집스럽기까지 한 그 말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이놈이야말로 과거 대장장이 일족의 손이 닿은 명품이기도 합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다르의 손이 닿은 부러진 창의 단면이 꿈틀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