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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잊혀진 자들 (2)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던 나지마가 행렬에서 이탈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선혁의 감각에 소규모 마물 무리의 움직임이 걸려들었다.
“음?”
아티야가 사라진 뒤로 땅의 정령을 통해 주변의 정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지도 꽤나 오래된 지라 이제는 진동을 통해서 근방의 상황을 파악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 그의 감각에 쿵쾅거리는 마물들의 이동이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를 쫓듯 다급한 걸음이었다.
“레….”
혹시나 나지마가 마물과 우연히 조우한 것은 아닌지 레드번을 타고 나서려던 그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상했다.
마물들의 규모는 그가 위협이 될 수 없다 판단했을 정도로 보잘 것 없었다. 그리고 나지마는 그 정도의 마물들에게 쫓길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그녀가 작정하고 쏜 화살은 어지간한 마물들을 단번에 쓰러트릴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 그녀가 저깟 마물 무리에게 쫓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잠시 고민하던 김선혁은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물들이 나지마를 쫓는 게 아니었다. 나지마가 마물들을 쫓는 것이다. 그렇게 내몰린 마물들이 향하는 방향에는 추방당한 사내들이 있었다.
쿵쾅거리는 발소리 사이로 약한 진동이 섞여들었다. 하지만 작은 진동은 너무나도 미약했고 그마저도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지마가 돌아왔고, 그녀의 몸에서는 희미한 마물의 피 냄새가 묻어 있었다.
죽었군.
아니, 죽은 게 아니다. 나지마가 마물들을 유인해 ‘처형’한 것이다.
“나지마.”
“네?”
평소와도 같은 상큼한 음성, 그녀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 해맑은 눈빛을 보고 있자니 열렸던 입도 닫히고 말았다.
어차피 나지마가 나서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그리 될 사내들이었다. 단지 그녀는 그 시일을 아주 약간 더 앞당겼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 그녀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사내들에게 죽음과도 같은 추방의 벌을 내린 것은 김선혁 자신이다.
그들을 죽인 건 나지마도 마물들도 아니었다. 바로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속이 불편했다. 전장에서 수도 없이 많은 적들의 목을 베었지만, 지금의 거북스러움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핑계도, 전장의 흥분도 이곳에는 없었고, 난생 처음 냉철한 이성으로 적이 아닌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그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하지만 그는 굳이 다른 이를 탓하지도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도 않았다.
김선혁은 우직하게 모든 것을 견뎌냈다.
몇 번 심호흡을 하자 불편하던 속이 조금씩 진정되어갔다.
여전히 그 여운은 남아 있었지만, 그의 눈빛 그 어디에도 방금 전의 흔들림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
그날 이후로 김선혁은 아예 작정한 것처럼 대열을 떠나지 않았다.
가장 큰 위협이었던 흑기사, 혼돈의 전령을 처리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의 마음가짐이 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물이 넘쳐나는 마왕의 권역 한 가운데, 하지만 그가 먼저 나서서 마물들의 접근을 원천차단 해왔기에 피난민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사내들이 추방되며 다소 긴장했던 피난민들은 이제 긴장감은커녕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선혁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덴버그의 백성들은 이러지 않았다. 그들은 녹테인의 사나운 기병들에게 숱하게 시달리면서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항상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눈앞의 피난민들은 어떠한가.
“배고파.”
“조금만 기다려. 그럼 먹을 게 나올 거야.”
그들은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생을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어미 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끼니 때가 되면 퀘이샤들을 바라보았고, 멀리서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와도 그저 웅크린 채 몸을 떨 뿐이었다.
누군가 시키지 않으면 스스로 행동하는 법이 없었으며, 늘 누군가가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고 무언가를 시키기를 바랐다.
“아, 언제까지 걸어야 하나.”
“차라리 어딘가에 숨었으면 좋겠는데.”
단지 그뿐이라면 나았을 텐데, 피난민들은 황당하게도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다.
과연 이대로 괜찮은 걸까. 지금까지야 그 혼자 나서는 선에서 습격이 정리되었다지만 언제까지고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그리고 만약 마물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자신과 퀘이샤들만으로는 이들을 모두 지키는 건 불가능했다.
피난민들은 수는 수만에 달했고, 일천에 불과한 퀘이샤들이 그들을 모두 지키기에는 그 행렬은 너무도 길고 어지러웠다.
최악의 경우 저들을 지킨답시고 많은 퀘이샤들이 희생될 수도 있었다.
안 될 말이었다.
자신이 살리고자 한 것은 스스로의 삶을 위해 머나먼 퀘이샤들의 숲까지 제 힘으로 도달한 피난민이었지, 몰이꾼을 따라 생각 없이 이동하는 소떼 같은 무리가 아니었다.
저들을 위해 퀘이샤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건 지나치게 인간만을 생각하는 일이었다.
지금만 해도 퀘이샤들이 짊어진 짐은 너무도 과했다.
그들은 마물들을 사냥하여 독기를 정화하고 식수를 구해 먹을 수 있게 만드느라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그들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천년화의 힘마저 빌려가며 말이다.
“정지.”
분주히 오가는 퀘이샤들과 반송장처럼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피난민들을 살펴보던 김선혁이 행렬을 정지시켰다.
“앞으로 사내들은 돌아가며 저들을 도와 식수와 식량을 조달하라.”
“저, 저희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요.”
“짐만 될 겁니다요.”
“저희 같은 놈들은 순식간에 괴물들에게 먹히고 말….”
어려운 것을 주문한 것도 아니다. 단지 퀘이샤들을 도와 식량이나 식수를 옮길 것을 주문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난민들은 엄살을 피워댔다.
“따르지 않겠다면 떠나라.”
차갑게 식은 그의 불호령에 피난민들이 그제야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니가 먼저 해! 나는 발에 물집 투성이라 걷기도 힘들다구!”
“힘 좋다고 자랑할 때는 언제고!”
돌아간 피난민들이 저들끼리 시끄럽게 싸워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 딴에는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춘 모양이지만, 귀 밝은 김선혁에게는 바로 옆에서 지껄여대는 것처럼 선명한 소리였다.
그리고 귀가 밝은 것은 퀘이샤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지마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과연 저런 자들을 구할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 것만 같아 김선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
날마다 퀘이샤를 도울 이를 뽑는다고 피난민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욕설과 주먹다짐마저 하며 위험천만한(그들 딴에는) 임무를 서로에게 떠민다고 난리를 피워댔다.
차마 내려진 명령을 거부하지는 못했던지라 그런 소란 속에서나마 어찌어찌 그의 말이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깨달은 김선혁의 마음은 짜게 식고 난 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벌어졌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마물들이 피난민 행렬을 습격한 것이다.
김선혁은 분명 혼돈의 전령마저도 압도할 정도로 강했지만, 홀로 피난민 전체를 보호할 수는 없었다. 그의 몸은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사정은 퀘이샤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피난민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이이….”
전투가 끝이 났을 때 김선혁은 족히 수천 이상이 비어버린 행렬을 보며 허탈해했다. 단 한 번의 습격으로 치른 대가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지막지했다.
하지만 허탈감은 잠시였을 뿐,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쳤다.
“너희들이 진정 사람 새끼냐!”
피해자의 대부분은 아이와 노인들이었다. 가뜩이나 힘없는 이들이 저 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대는 피난민들에게 떠밀리고 짓밟혀 죽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짓밟혔는지 만신창이가 된 소녀의 시체를 안아들고 김선혁은 피난민들을 노려보았다.
저들은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지 않기를 바라며, 어서 이 끔찍한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 저열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본 김선혁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으아아아아!”
하지만 전투가 끝이 난 지금 분노를 풀 곳이 없었고, 그는 허물어지듯 엎어지며 양손으로 대지를 후려쳤다.
콰드드드득.
검게 썩은 땅이 갈라지고, 다시 또 솟구쳤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온 세상이 몸을 떨어대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용기사가 되어 땅의 정령왕의 유지마저 얻은 그의 분노는 차라리 거대한 재앙이었다.
“으아아아!”
“살려줘어어어!”
비명을 지르며 피난민들이 아우성을 쳐댔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고, 대지는 한참이나 더 울부짖었다.
얼마나 그 난리가 이어졌을까.
세상에 끝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지진도 조금씩 잦아들다 마침내 멎어버렸다.
소소한 부상자는 있었지만, 목숨을 잃은 자는 없었다. 그 끔찍한 재앙에도 피난민들 중 죽은 자가 없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 모든 게 그가 화가 난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힘의 방향을 틀었던 탓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바닥에 엎드려 오들오들 떨어대는 피난민들을 본 김선혁은 허탈함에 욕설만 내뱉어댔다.
차라리 악독하고 힘이 있는 자들이라면 이 자리에서 요절을 낼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대열을 다시 꾸려라. 최우선적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약한 자들을 보호한다.”
그의 말에 지진에 휘말려 어그러졌던 대열이 다시 한 번 변하기 시작했다.
**
“나으리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날 저녁 김선혁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지난 단독 행동 이후로 벌을 받아 고된 부역을 떠안게 된 존이었다.
“뭐?”
가뜩이나 속이 불편한 와중에 찾아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니 그의 대답도 자연 사나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죽음을 각오했던 탓인지 존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저희들은 애초에 사람으로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마소처럼 부려지며 가축처럼 살아왔습죠.”
김선혁도 알고 있었다. 서부의 귀족들이 어떤 식으로 평민들을 대했고, 평민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도 여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아닙니다요. 나으리께서는 모르십니다.”
존은 그런 그의 깨달음이 틀린 것이라 말했다.
“저희는 노예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지, 존의 말은 신랄하기만 했다.
“그런데 왜 자꾸 사람으로 대하려고 하십니까.”
“아….”
뒤늦게 상대의 말을 알아들은 김선혁이 신음을 내뱉었다.
“노예는 노예를 다루는 법이 따로 있습니다.”
존이 그런 그를 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노예를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보듬어주는 따뜻한 손길보다 매섭게 내려치는 채찍질입니다.”
그렇게 말한 존이 피난민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 눈빛 어디에도 같은 처지에 처한 피난민들에 대한 유대감도 동질감도 없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그냥 명령하십시오.”
존은 그게 마치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지껄여댔다.
“저들은 절대로 나으리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겁니다.”
**
존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물들이 다시 찾아오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김선혁은 그날 이후로 피난민들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졌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제약을 두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여지를 주지 않는 강한 명령으로 피난민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효과는 놀라웠다.
피난민들은 마물들이 습격했을 때조차도 마치 땅에 발이 못 박힌 것처럼 그의 명령대로 대열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그의 명령이 그들의 혼백마저 지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으리의 위엄은 저들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것으로 각인이 되었습니다.”
존은 그게 다 그날 그가 보여주었던 무지막지한 분노와 재앙으로 인한 각인 효과라 말했다.
그 뒤로 존은 입에 혀처럼 굴며 그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누구보다 피난민들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가 곁에서 성심성의껏 보좌하니 그간 통제 불능이었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질서정연해졌다.
무력과 공포로 인한 폭압, 평소였다면 넌더리를 쳤을 방식이었지만 지금 만큼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김선혁은 강압적일 정도로 피난민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였고, 그럴수록 피난민들이 불평을 토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덕분에 피난이 한층 수월해진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마물들이 다시 몇 번인가 습격해왔지만 처음만큼 피해가 크게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이는 피난민들이 통제를 잘 따라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김선혁 스스로가 그날 이후로 한층 더 지 속성을 이용하는 데 능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껏 손발처럼 자유롭게 사용해왔던 풍 속성을 대신할 새로운 능력에 완전히 눈을 뜬 것이다.
“누다르!”
마수의 몸통에 창을 꽂은 그가 명령하자 최상급 땅의 정령이 나타나 거대한 마수의 몸을 끌어안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수는 다시는 땅 위로 기어 올라오지 않았다.
“끝난 건가.”
퀘이샤들이 남은 마물들을 향해 화살 세례를 퍼붓는 모습을 보며 김선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 속성(地) 지배력이 마침내 한계치인 100에 도달했습니다.
- 속성 지배력이 최고 수치에 이르며, 소속 정령(地) 누다르가 변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