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200화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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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어머니 나무 (2)

바람결에 흔들리는 잎사귀가 사부작사부작하는 듯한 소리, 그건 차라리 바로 곁에서 건네오는 속삭임과도 같았다.

“당신은….”

사방이 탁 트인 하늘, 말을 걸어올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어머니 나무?”

[너와는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구나. 기다리고 있으마.]

자애의 화신과도 같은 온화한 음성이 금세 사라지고, 창공을 할퀴어대는 칼바람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마치 봄날 불어오는 그것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그의 주변을 감싸 안았다.

그 순간 김선혁의 심신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끈덕지게 따라붙던 마물들을 뿌리치느라 쌓였던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전에 없는 활력이 몸 곳곳에 퍼져 나갔다.

각성과 전직, 레벨업으로 인한 활력과는 달랐다.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제 몸에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김선혁은 뒤늦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아….”

온 세상에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실 작정이신가 봐요.”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치는 나지마의 싱그러운 음성에도 김선혁은 멍하니 숲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어머니 나무의 환영 인사는 그가 생전 겪어보지 못한 황홀한 것이었다.

낙원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듯한 절경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낙원도 천국도 아니었다.

“저건….”

꽃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광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천막들, 그리고 그만큼이나 남루하고 볼품없는 모습을 한 사람들이 얼빠진 얼굴로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고 있다.

“피난민….”

마기를 피해 도망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제가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군요.”

진즉부터 저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나지마의 음성을 듣는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

“마, 마물이다!”

“사, 살려줘어!”

레드번을 발견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친다고 악다구니를 써댔다. 가뜩이나 난잡하던 천막촌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으아앙! 엄마!”

제 어미를 찾아 울부짖는 아이의 모습은 멀리서 보았던 것보다 몇 배는 처참했다.

누렇게 뜬 얼굴과 골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앙상한 몸, 아이는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 그 자체였다.

“내 아기! 내 아기!”

내달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타난 아이의 어미가 아이를 감싸 안고 주저앉아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이의 어미 역시 제 아이와 그 몰골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무력하게 주저앉아 거대한 괴수가 자신들을 지나쳐주기를 바라는 모자의 모습을 본 김선혁은 차라리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생존자들이 더 있을 거란 사실쯤은 그도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그 생존자들을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피난민들을 발견했다고 새삼 놀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 서부의 참상을 가까이서 보았고, 직접 겪어보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지옥으로 변해버린 서부의 참모습은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가 아니었고, 마기로 오염된 검은 대지도 아니었다. 인간이 있던 자리를 가득 채운 마물들이 울부짖는 끔찍한 들판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것을 간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제껏 서부에서 만나온 생존자들이 모두 ‘전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궁지에 몰렸을지언정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무심코 잊고 말았다.

난리통에 가장 먼저 희생되었을 일반인들의 존재를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것이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무력한 존재들이 다시 의식의 표면 위로 부상한 순간, 그는 비로소 서부의 참상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세운 서부 생존자 구출 작업 그 어디에도 무력한 평민들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죽고 죽이는 굴레에 너무도 익숙해졌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평민들의 애환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아진 스스로의 위치에 눈이 가려졌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토록이나 혐오하던, 전쟁 뒤에 숨어서 죽음의 가치를 셈하던 귀족들과 자신의 마음가짐이 소름 돋도록 닮아있다는 것뿐이었다.

“빌어먹을….”

어머니 나무의 조치 덕에 활기가 넘치던 육신이 더없이 무거워졌다.

“어머니께서 처음부터 저들을 숲 밖에 두셨던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너무도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고, 저들은 숲과 더불어 사는 법을 알지 못했어요.”

궁색한 모습의 피난민들을 발견한 김선혁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나지마가 변명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저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자신의 일족과 어머니 나무 때문에 그가 화가 난 것이라 오해라도 한 모양이었다.

“끔찍한 파괴가 있었어요. 결국 어머니께서는 저들을 숲의 외곽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으셨죠.”

그녀의 말에 김선혁이 천막촌 바로 곁에 앙상하게 남은 숲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상황이 그려졌다.

마기를 피해 달아나느라 변변한 피난 준비도 못한 사람들은 풍요로운 숲을 보고 눈이 돌아갔을 것이다. 이곳의 주인인 퀘이샤들이 얼마나 숲을 사랑하는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땔감을 구하기 위해 나무를 베고 짐승들을 사냥했으리라.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숲의 주인은 어머니 나무와 퀘이샤 일족, 주인의 법도를 따르는 게 당연했다.

“그러니 혹시라도 우리 퀘이샤들이 인간들에게 적대적이라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곳까지 왔는데 혹시라도 그의 생각이 변할까 봐 염려가 되었던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자신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던 탓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변명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그도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변명조차도 싱그러운 그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김선혁의 음성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당신….”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나지마가 염려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당신들에게 화난 게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죠?”

그녀의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후우.”

김선혁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렸다.

분명 그가 느낀 자괴감과 자기혐오는 스스로를 침잠시킬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영웅 보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짓눌려 신음하던 과거의 나약한 병사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명확하게 구분 할 능력이 있었고, 지금의 일은 스스로가 분명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지마.”

그의 음성이 또 한 번 돌변했다.

건조하던 목소리에 굳은 의지가 깃들고, 음울하게 가라앉았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오늘 단 하루 만이라도 저들을 배불리 먹여주십시오.”

나지마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어렵습니까?”

“하루 정도라면 어렵지 않지만, 그 정도로는 쇠약해진 저들의 육신을 회복시킬 수 없을 텐데요.”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듯한 그녀의 말에 김선혁이 힘을 주어 말했다.

“제가 어머니 나무를 설득해보겠습니다.”

**

외곽을 통과하고도 한참을 비행하고 나서야 김선혁은 겨우 퀘이샤 일족의 심처라고 할 수 있는 숲의 한가운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솨아아아아.

공터 하나 없이 숲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던 나무들이 마치 길이라도 열어주듯 가지를 접고 레드번이 내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저기로 가자.”

김선혁은 망설임 없이 레드번을 몰아 공터에 내려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퀘이샤들이 몰려들었다.

숲 밖에서 만난 퀘이샤들과는 달리 숲의 퀘이샤들은 팔과 다리 등 맨살을 여기저기 드러낸 다소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답답한 복면만 빼면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머니 나무의 곁을 지키는 퀘이샤들의 느낌이 달랐다.

밖에서 만난 나지마 일행이 가을날 마주한 앙상한 나무와도 같은 인상이었다면 눈앞의 퀘이샤들은 봄, 여름 생기가 넘치는 꽃과도 같은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숲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오.”

대표로 나선 늙은 퀘이샤는 그중에서도 유독 특별했다.

느릿느릿 다가와 인사를 건넨 노 퀘이샤의 맨 거죽은 고목의 껍질처럼 기이한 주름이 가득 잡혀 있었는데, 마치 나무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단지 퀘이샤들의 새로운 면모를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지마. 설명을.”

그는 나지마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주라 말했고, 나지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말을 따랐다.

“오오! 나지마! 설마 손님과….”

그런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퀘이샤들이 갑작스레 호들갑을 떨었다.

“네. 저분에게 제 평생을 헌납키로 하였답니다.”

나지마는 굉장히 뿌듯한 어투로 일족에게 그와 자신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대단한 자랑이라도 하는 듯해 김선혁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오오! 축하한다. 나지마.”

“축하할 일이로구나!”

더욱 이상했던 것은 퀘이샤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큰 경사라도 생긴 것처럼 기뻐하며 그녀에게 축하를 해주었다. 단순히 동반자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그들의 눈빛이 지나치게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나지마?”

그게 못내 이해가 가지 않아 나지마에게 그 연유를 물었지만, 그녀는 그저 알쏭달쏭한 얼굴로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더 나중에.”

다음을 기약하는 나지마를 달리 다그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필요하다면 그녀가 이야기해줄 거라 생각했던 탓이었다.

한참이나 자신들끼리 축하의 말과 답례를 주고받던 나지마와 퀘이샤들의 표정이 금방 진지해졌다. 나지마가 마인들과의 거래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 뒤였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겠군.”

역시나 퀘이샤 장로는 마인들과의 거래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장로는 일족의 중지를 모아볼 필요가 있다며 대답을 보류했다.

“어머니께서 이토록이나 환대를 한 손님을 우리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구려.”

그렇게 말한 장로가 슬쩍 길을 열어주었고, 나지마가 김선혁의 손을 잡고 어머니 나무에게 이끌었다.

**

어머니 나무에게 가는 길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나무까지 특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을 통과해 도착한 널찍한 공터, 그 가운데 어머니 나무가 김선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호의를 갖고 먼 길에 온 손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레드번 위에서 들었던 자애로운 목소리가 또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음.”

이제껏 여러 존재들을 만나보았지만, 나무를 상대로 어떤 인사를 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어머니 나무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나눌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지만 그에 앞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아티야?”

어머니 나무의 말이 끝나는 순간 부르지도 않은 바람의 정령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언제나 제 주인만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쩐 일인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티야, 왜 갑자기….”

난데없는 아티야의 등장에 미처 그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땅속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다른 정령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없는 동안 잠시 맡아두었던 물건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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