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0 =========================================================================
200. 어머니 나무 (1)
오필리아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워낙에 고가인지라 부유한 귀족들조차도 긴급을 요하는 상황이 아니면 쓰기를 꺼린다는 귀한 연락석이 빠르게 빛을 잃어갔지만, 김선혁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조숙한 왕녀의 침묵이 너무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던 탓이다.
그녀의 아비인 테오도르 국왕은 범부(凡夫)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보다, 군주로 단명하기를 선택했다. 그녀는 제 아비의 선택을 존중해 그 어떤 이견도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속까지 편한 것은 아닐 터였다.
죽어가는 아비를 보고도 그 비탄을 표현하지 못하는 군주의 자리, 얼마나 속으로 끙끙 앓아야 했을까.
긴 침묵이 그간 그녀가 느껴왔을 심적 고통을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그대는….]
한참 만에 입을 연 오필리아의 음성은 그사이 깊게 잠겨 있었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떨리는 음성에 그녀가 느끼고 있을 형언할 수 없는 격정이 가득 묻어났다.
[참으로 괘씸한 자다.]
그 떨리는 음성에 질책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래서야 나만 속 좁은 여인이 되었지 않느냐.]
아무래도 나지마를 의식하여 불퉁거렸던 스스로의 행동이 이제 와서 후회가 되었던 모양이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선혁은 부드럽게 그녀를 다독여 주고는 미리 양해를 구했다.
“한동안은 정신없이 바빠질 것 같습니다. 아마 연락도 한참 하지 못하겠지요.”
원정대의 책임자로서 전선의 일을 거들면서 서부의 생존자들을 구해 아덴버그로 빼돌리는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퀘이샤들의 부탁도 들어주어야 했으니, 한동안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뻔뻔한 자다.]
엉뚱한 한마디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김선혁은 이어진 그녀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공사가 다망한 그대의 사정을 알면서도 나는 억지를 부릴 것이다. 끊임없이 그대의 안부를 묻고 그대가 무사함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것이다.]
이 또한 일을 진행함에 있어 스스로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왕녀만의 독특한 애정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대가 말했던 것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으니, 그대는 나를 욕심 많은 군주라 험담해도 좋다.]
배우자의 안위에 대한 염려와 제 아비에 대한 정을 어찌 따로 두고 볼 수 있겠는가.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는 그녀의 입장을 김선혁은 십분 이해했다.
“그깟 욕심, 더 부리십시오.”
그래서 그는 힘을 주어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다 채워드리겠습니다.”
**
그간의 시간을 만회라도 할 것처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느라 한참이나 이어졌던 오필리아와 김선혁의 통신은 결국 연락석 하나가 완전히 수명이 다하고 나서야 종료되었다.
“커흠.”
두 남녀의 대화가 끝이 났을 때, 바로 곁에서 차기 여왕과 그 배우자의 은밀한(?) 대화를 엿들은 꼴이 되어버린 마법사는 민망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커흠. 수고하셨습니다.”
뒤늦게 제 3자가 있었음을 떠올린 김선혁은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벼, 별말씀을.”
마법사는 건성으로 손사래를 치고는 수명이 다한 연락석을 챙겨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흠.”
마법사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진즉부터 풀 내음 가득한 인기척을 알아챘던 김선혁은 곧장 방문을 열어주었다.
“이야기는 잘 됐습니까?”
그의 질문에 나지마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해요.”
아무래도 마인과의 거래라는 게 그의 생각보다 퀘이샤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썩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덴버그의 도약을 위해서라면 퀘이샤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김선혁은 그녀를 다그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싫든 좋든 간에 퀘이샤들은 마인들과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일족이 온갖 마물들이 바글대는 마왕의 땅을 무사히 벗어나려면 마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설령 예상이 빗나가 퀘이샤들이 마인과의 거래를 끝까지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때는 자신의 몸이 고달프더라도 직접 그들의 이주를 도우면 그만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퀘이샤들이 무사히 아덴버그에 정착하는 것이었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탈출하느냐가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그 태평한 음성에 나지마가 표정을 가다듬고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말해주었다.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그녀는 마인들과의 거래에 앞서 어머니 나무 곁에 남아있는 일족들과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다며, 그에게 함께 일족의 거처로 가자고 말했다.
“최대한 빨리 출발할 생각입니다.”
어차피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제가 안내하도록 하죠.”
**
라인펄의 기사가 된 일백의 생존자들은 이베리아 연합의 선단을 통해 아덴버그로 향하기로 결정되었다.
“줄리앙. 클라크. 부탁한다.”
김선혁은 그렇게 먼 길에 올라선 생존자들을 줄리앙과 클라크 일행에게 부탁했다. 녹테인과 그리핀도르마저 관통하여 이곳까지 달려온 그들이라면 생존자들을 무사히 왕국으로 이끌 수 있을 거라 여겼던 탓이다.
“꼭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줄리앙은 못내 이곳에 남아있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신들이 남아 있어 봐야 이곳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저 영주의 무사 귀환만을 빌어주었다.
“그래. 돌아가서 보자.”
줄리앙 일행과 생존자들이 신성 교국을 나서 남쪽으로 향했고, 남겨진 김선혁은 아돌프 호츠네크를 찾아 원정대의 일을 맡겨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아룡들의 성장을 부추긴답시고 온 사방을 들쑤시고 다닌 덕에, 이 근방에는 마수는커녕 마물의 씨가 말라버렸다.
그 덕에 그는 비교적 큰 걱정 없이 홀가분하게 떠날 채비를 할 수 있었다.
“성전에 참전한 원정대로 의무에 소홀히 하라는 건 아니지만, 이곳이 교국의 땅임을 명심하도록 하라.”
그러면서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원정대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할 것을 주문하였다.
“전승공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단 한 명의 기사도 상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시원스러운 아돌프 호츠네크의 대답에 김선혁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짧은 시간이나마 지켜본 바로는 정세 파악에 능한 이 중년의 기사라면 최소한 타국의 전장에서 칼받이로 아군의 초인들을 헛되이 소모시키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럼 부탁하도록 하지.”
“신명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원정대의 지휘권까지 모두 처리한 김선혁은 마지막으로 용사 박준민을 찾아갔다.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아덴버그 원정대 소속의 이수혁을 찾아라.”
이미 몇 번이나 용사의 뒤에 자신이 있음을 못 박아 두었지만, 어리숙한 용사가 영 미덥지 못해 미리 당부해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형님이 말해준 대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간 몇 번이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이야기를 나누었던지라 박준민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을 모두 마무리한 김선혁은 나지마를 찾았다.
“이제 볼일이 모두 끝난 건가요?”
이제나저제나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지마는 반색을 하고 그를 반겨주었다.
“갑시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이상 더는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레드번이 두 남녀를 태우고 훌쩍 날아올랐다.
**
겨우 길이나 잘 안내하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던 나지마는 놀랍게도 레드번과의 비행에 아무런 곤란도 호소하지 않았다.
“비행이라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군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바람을 만끽하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강인한 여기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공에서의 마법 폭격에 맛 들린 미치광이 마법사조차도 억지로 비행을 감내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이들만 보아왔던 김선혁에게는 나지마의 이러한 반응이 신선할 지경이었다.
다행이었다.
먼 길을 가는 내내 끙끙 앓아대는 이를 태우고 가는 건 그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더러는 그의 등판에 대고 토악질을 해대는 경우까지 있었다.
최소한 나지마가 등판에 대고 토악질을 해댈 염려는 없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행이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염된 땅의 마물은 지상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온갖 기기괴괴한 비행 마물들이 나타나 그들을 가로 막았다.
“또 옵니다!”
새까맣게 몰려드는 비행형 마물들을 보며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드번! 그대로 통과해!”
벌써 몇 번째 습격인지, 이제는 상대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꽉 잡아요!”
나지마는 대답대신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가자!”
그의 명령에 레드번이 거칠게 날개를 휘저으며 마물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캬아악!
까마귀를 닮은 마물들이 부리를 딱딱거리며 달려들었다.
그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며 김선혁은 창을 꽉 움켜잡았다. 전선의 기병들에게 받아온 마상창은 그가 평소 즐겨 애용하던 전용 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질이 낮은 것이었지만, 마물들을 상대로 용기병의 스킬을 사용하기에는 충분했다.
“윈드 피어싱.”
창끝에 바람이 몰려들고 순식간에 거대한 광풍이 일어났다. 작은 까마귀들이 그 바람에 휘말려 비명을 지르며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고, 그와 레드번은 금세 습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마물들이 까마귀 마물처럼 손쉽게 뿌리칠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레드번 이상으로 덩치가 거대하고 흉폭한 놈들도, 전속력으로 비행하는 레드번을 따라잡을 정도로 날랜 놈들도 존재했다.
그때마다 나지마가 나서서 마물들을 처리했다.
장난 아닌데?
고속으로 비행 중인 레드번 위에서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움직이는 마물의 급소를 맞추는 그 신묘한 궁술에 김선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녀는 왜 퀘이샤 궁사들의 힘이 경지에 오른 상급 기사 못지않다는 말이 생겼는지를 넘칠 정도로 증명해 보였다.
레드번의 두 배쯤 되는 거대한 덩치를 한 비행 마물을 단 세 발의 화살만으로 격추시킨 것이다.
그녀는 최소한 레드번과 함께 할 때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파트너였다.
단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 신묘한 궁술을 발휘할 때 취하는 그녀의 자세가 문제였다.
활을 사용하려면 필연적으로 양손을 써야 했다. 땅 위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과격하게 기동하는 레드번의 등 위였다. 그녀는 자신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김선혁의 허리였다.
그녀는 과감하게도(?) 팔을 대신해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 덕분에 양손을 떼고도 레드번 위에서 추락하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지만, 모양새가 이상해지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음.”
김선혁은 이 또한 전투 중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라며 애써 태연하게 상황을 넘겼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그녀가 뒤에 따라붙은 마물을 떨궈내겠다며 앞쪽으로 돌아와 허리를 휘감았을 때는 아찔해지고 말았다.
“이건 좀….”
“네? 왜요?”
곤란함을 표하는 그를 보며 되묻는 요정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앙큼했다.
**
수많은 난관(?)을 헤치며 김선혁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제 다 왔어요! 여기서부터는 어머니의 힘이 미치는 땅이에요!”
그녀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넘실대며 숨통을 조여오던 마기가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 있었다.
아니, 마기가 아니었어도 그는 자신들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마치 하늘까지 닿을 듯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가 빤히 눈에 보이는데.
“저분이 바로 저희 일족의 어머니랍니다.”
서쪽의 어머니 나무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백 수천 배는 거대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이제껏 보아왔던 그 어떤 성과 요새보다 커다란 어머니 나무를 보며 몇 번이고 감탄했다.
[나지마가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구나.]
하지만 감탄도 잠시였을 뿐,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에 그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