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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죽음의 군대 (1)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 세상의 언어와 저쪽 세상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상대의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한국어를 떠올리고 말았다.
“한, 한국말이고 나발이고 일단 이것부터 좀 어떻게 해줘!”
연이어진 괴한의 비명에 그는 그제야 자신이 착각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과 다른 이방인들이 이곳에서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저쪽 세상의 억양과 어투를 상대는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그랬기에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한국어를 들은 것이라 착각하고 말았다.
“이것 좀 어떻게 해달라고!”
“그 전에 네가 누군지 먼저 밝혀야지.”
아티야에게 짓눌려 비명을 지르는 괴한을 보며 김선혁이 차갑게 말했다.
“나 이방인이라고! 너랑 같아! 한국에서 왔어!”
“자기소개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누군지 정체를 밝히라고 말했더니, 대뜸 이방인이라 말하는 모양새가 정상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같은 이방인이면 충분한 거 아냐? 빨리 이것 좀 풀어줘. 아으으….”
“이름, 소속.”
내버려 두었다간 언제까지고 대답을 듣지 못할 것 같아 김선혁은 직접 그 정체를 캐물었다.
“안동진! 노르딕, 노르딕에서 왔어!”
“노르딕?”
노르딕이라면 이방인들이 주도하여 내란을 일으킨 북서부의 왕국이었다. 그런 소란의 주모자 중 하나가 이 먼 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그는 몸이 싸늘하게 식은 듯한 기분이었다.
“노르딕의 이방인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지?”
“그것보다 이것보다 먼저 좀 어떻게 해달라고! 목뼈 부러지겠어!”
김선혁은 상대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벽 한 켠에 걸려 있는 장식용 검을 집어 들었다.
기사 서약을 할 때 테오도르 국왕에게 하사받은 제식용 검, 날은 무뎠지만 속성의 힘을 불어넣으면 사람 하나의 목 정도는 쉽게 자를 수 있는 검이었다.
“아티야.”
검을 챙겨든 그가 아티야에게 명령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동진을 압사시키려는 것처럼 있는 힘껏 짓누르고 있던 아티야가 그제야 힘을 풀고 물러났다.
하지만 주인이라면 끔찍이 여기는 이 바람의 정령은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안동진의 바로 뒤편에 머물며 언제든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익!”
몸을 일으킨 안동진이 품 안에서 짧은 단도를 꺼내 허공에 휘둘렀다. 마치 방금 전까지 자신을 억눌렀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베어내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당연히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아티야에게는 통할 리 만무했다.
“정신없으니까, 헛짓거리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해.”
그의 말에 한참이나 더 화풀이하듯 허공에 검을 휘두르던 안동진이 단검을 갈무리했다.
“아오. 목이야. 하마터면 목 돌아갈 뻔했네.”
목덜미가 뻐근한지 한참이나 주물러대는 불청객의 모습이 너무 느긋해 보여 김선혁은 경고했다.
“하나만 말하지. 나는 지금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아. 그러니 서둘러 용건을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왕도에서 막 돌아와 이제 쉬려던 차에 휴식을 방해받은 그는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물며 허락도 없이 침실까지 침입한 안동진이다. 상대가 같은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좋게 말을 섞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았어. 듣기하고 다르게 성격이 까탈스럽네.”
“들어? 누구한테? 뭘?”
“그 강정태라고 알지? 그 친구한테 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었거든. 분명 수더분한 성격에 모난 데가 없는 친구라고 했는데 말이지.”
강정태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뜩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돌덩어리처럼 변하고 말았다.
“용건.”
짧지만 힘 있는 어조에 안동진이 찔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금세 친근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그래도 동향인데 너무 날 세우지 말라고.”
“그 할 말이 뭔지 밝혀.”
도대체 저 대륙 반대편에 있는 노르딕의 이방인이 무슨 용건이 있어 여기까지 온 것인지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단도직입적인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돌리지 않고 말하지.”
정말 말도 더럽게 많은 사내였다. 김선혁은 차갑게 눈을 빛내며 턱을 치켜드는 것으로 상대를 독촉했다.
“우리와 함께 하자.”
“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그는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너도 소식 들었을 거 아냐. 우리가 좀 일을 크게 벌였거든.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해.”
그런 그를 보며 안동진이 뻔뻔스럽게 입을 나불거렸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엉뚱한 곳에 끌려와서 노역에 동원됐어. 어디 개새끼도 안 먹을 쓰레기를 밥이라고 던져주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하루 종일 광산에서 굴러야 했지. 진짜 사람이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다는 게… 빌어먹을 자식들.”
김선혁은 일단 상대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기로 했다.
“남자는 노역에 끌려다니고 여자는 귀족들한테 불려 다녔지. 진짜 사람 같지도 않게 살았어.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이따위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지? 억울하지 않아?”
“음.”
노르딕의 이방인들이 처우가 좋지 않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강제노역에 동원되고 여자는 노리개취급을 받았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이방인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고 해도 하나하나가 초인으로 거듭날 가능성을 품은 재원들이 아닌가. 노르딕의 지배자들은 정말이지 미친 게 틀림이 없었다.
“뭐, 아덴버그는 대우가 좋다길래 와서 봤더니, 그것도 아니라며? 강정태한테 듣자 하니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고 태반이 죽어나갔다고 하던데. 살아남은 애들도 언제 죽을지 몰라 완전 반미치광이처럼 살고 있더만.”
“음….”
김선혁은 침음을 내뱉고 말았다. 지금이야 자신도 왕국의 당당한 귀족 취급을 받는다지만, 한때는 강제로 전쟁터에 내몰려 죽을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과 다르게 공을 세우지 못한 하급의 이방인들이 어떤 꼴로 지내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선했다.
“그쪽도 좀 너무 인정머리 없는 거 아냐? 먹고 살 만하면 그 친구들 챙겨주지. 동향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죄책감이 아예 없다면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동진의 비난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서부군의 이방인들은 분명 제 스스로 군에 남아 얻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강정태는 능력을 키워 중급에 올라 귀족이 되기를 바랐고, 박수홍을 비롯한 다른 이방인들은 공을 세워 한몫 챙겨 전역 후에 평안한 삶을 대비하려 했다.
‘어차피 돌아갈 길도 없다는데 여기서라도 자구책을 마련해야죠. 전 기간 다 까면 여기 나가서 어디 장사나 해볼까 해요. 그래도 21세기를 살아가던 현대인의 노하우가 있는데 말아먹기야 하겠어요?’
‘그러냐? 난 아예 말뚝 박으련다. 들어보니 군인 대우가 썩 나쁜 것도 아니더라고. 밖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 천지라더만.’
‘하긴 중급만 올라도 아예 대우가 천지 차이라니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그렇게 떠들던 이방인들의 모습은 분명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치 자신의 의지는 요만큼도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모든 것이 강제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는 것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태도였다.
그들이 이 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강제로 이곳에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바라던 것을 손에 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는 그 과정이 지나치게 험난했던 탓이었다.
“동료잖아. 힘이 생겼으면 챙겼어야지. 우리가 믿을 게 뭐가 있어.”
“동료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정 먼저 떠오른 것은 낮은 코에 노란 피부, 검은 머리를 한 이방인들이 아닌 험악하게 생긴 기병대의 사내들이었다. 비록 그들 중 태반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얼굴이 되었지만,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목숨을 걸고 달려든 것은 이방인이 아닌 그들이었다.
“뭐, 잔소리 하려고 온 건 아니야. 이제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가만히 그의 눈치를 살피던 안동진이 입맛을 다시며 화제를 돌렸다. 뒤늦게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우리와 함께 하자. 우리를 노예로 아는 이 빌어먹을 새끼들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우리만의 왕국을 만들자.”
안동진은 다시 한 번 그에게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거지 같은 신분제를 엎고 저쪽 세상처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애초에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밑에서 그렇게 노예처럼 산다는 건 불공평하잖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이방인들은 분명 강하다. 당장 중급의 병과만 해도 어지간한 기사들 이상의 잠재력을 갖고 있었고, 상급 병과의 이방인들은 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당장 스스로가 아덴버그의 창이니 뭐니 명성을 얻고 있다지만, 그건 왕국의 진짜 강자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라두스 상위 넘버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아직까지 왕성에 틀어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고, 그들의 힘이 자신에 못지않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당장 레인하르트 후작만 해도 아룡 위에 기승하고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런데 그런 초인들을 다수 보유한 아덴버그도 동남부의 패자를 자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노르딕의 사정도 아덴버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방인들만으로 거병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국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모르지.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일단 시도해봐야 알게 되는 거니까.”
“미쳤군.”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들더라고.”
그의 탄식에 안동진이 히죽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여간 섬뜩한 게 아니었다. 건들거리며 입을 놀려대던 괴한은 어디 가고 한이 사무친 눈동자를 번들거리는 사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도 명분은 우리한테 있어.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이 썩어빠진 신분주의를 타파하는 건 차라리 우리의 사명이야.”
게다가 그냥 반란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이곳에 전파할 생각이라니, 김선혁으로서는 눈이 시뻘게져서 달려들 왕국의 초인들이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강력한 검력 앞에 이방인들의 스킬은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이고, 마법사들의 사역한 이능 앞에 저들은 지리멸렬할 것이다.
“함께 하자. 벌써 우리와 함께 하기로 한 동료들만 해도 500명이 넘어. 이 정도면 썩어빠진 왕국 하나 정도는 들어 엎어볼 만한 숫자 아니야?”
이번에는 김선혁도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500명의 이방인이라면 절대 만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전력이 생겨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인근 3개의 왕국에서 합류한 이방인들의 숫자만 해도 그 정도야. 그 숫자는 앞으로도 더 늘어나겠지.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마냥 꿈만은 아냐.”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500의 이방인이라면 안동진이 꾸는 꿈도 결코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왕국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
“가만 안 있었지. 우린 싸웠고, 이겼어. 그리고 계속해서 이기고 있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륙 북서부의 왕국들이 무능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안동진의 무리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기민하게 움직인 것일까. 그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놀라는 것도 이해는 해. 우리도 처음에는 악에 받쳐서 벌인 일이니까.”
그런 그의 내심을 짐작이라도 한 것인지 안동진이 낄낄대며 말했다.
“근데 우리 중에 진짜 끝내주는 놈이 하나 있거든.”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지, 입이 간지러워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한 안동진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아서 정보를 술술 토해냈다.
“박상진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병과가 뭔지 알아?”
낮게 깔린 안동진의 음성에 김선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상 모든 몬스터들의 지배자, 죽음조차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왕.”
거창한 설명을 늘어놓던 안동진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마왕(魔王). 그 말도 안 되는 존재가 우리의 리더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선혁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맹렬한 적개심과 증오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용의 기세, 드래곤 피어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컥!”
그 압도적인 기세 앞에 안동진이 목이라도 졸린 것 같은 모습으로 허물어졌다.
[저주받을 이름, 마왕이여!]
갑작스레 들려온 용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격앙되어 있었고, 짙은 분노를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