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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145화 (14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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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서서히 돌기 시작하는 수레바퀴 (3)

“그게 무슨….”

줄리앙을 만난 김선혁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저는 치료받지 않겠습니다.”

치료법을 찾았다는 소식에 들떴던 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치료를 받지 않겠다며 완강히 버티는 줄리앙의 태도에 그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지은 죄가 있으니 차마 화조차 내지 못하고 애써 감정을 추슬러가며 물었지만, 줄리앙은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을 반복해댔다.

“줄리앙.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치료받지 않으면 평생 자라지 않는다고. 지금처럼 아이로 남아야 한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치료를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에 그는 저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차라리 지금 상태가 낫습니다.”

그는 몇 번이고 설득을 한 끝에 절대로 치료받지 않겠다는 줄리앙의 의사만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이유가 뭔데?”

뭔가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김선혁은 이해할 수 없는 어린 종자의 태도에 이유를 물었다.

“받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줄리앙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줄리앙!”

버럭 소리를 지르며 종자의 어깨를 잡았다. 고된 훈련으로 단련이 되었지만,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육신은 성인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가녀리기만 했다.

이런 몸이 평생을 간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이대로 아이로 남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늙지 않는 게 아니었다.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건 차라리 저주였고, 평생토록 안고 가야 할 장애였다.

“줄리앙. 이대로 남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알아? 너 기사가 되고 싶다며. 그런데 이 몸으로는 기사가 될 수 없다고.”

담담하던 줄리앙의 표정에 금이 갔다. 하지만 끝내 왜 뒤집어썼는지 모를 가면은 벗겨지지 않았다.

결국 김선혁은 그 이유를 줄리앙이 아닌 제 3자에게 들어야 했다.

“치료를 무사히 마친다 하여도, 그녀는 기사가 될 수 없노라.”

줄리앙에게 집중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한 왕녀의 등장에 김선혁이 황급히 예를 표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숙였던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물어오는 그의 태도에 왕녀가 짧게 혀를 차며 대꾸했다.

“그대의 어린 종자가 가진 후유증을 치료한다는 건,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가능성마저 빼앗는다는 것과 다름이 없느니라.”

왕녀가 줄리앙에게 시선을 둔 채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는 그녀가 기사가 되기 위해 해온 평생의 노력이자, 기사로서의 미래 그 자체이니라.”

“그게 무슨….”

“후유증을 치료할 경우, 저는 다시는 검력을 수발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맙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김선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줄리앙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룬 쥐꼬리만 한 검력도 잃고, 다시는 기사로서 검력을 다룰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부질없는 바람에 불과했고, 현실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갑고 잔인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저는 평생 자라지 않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치료를 받으라 몇 번이고 설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김선혁은 입을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왕실은 완벽한 치료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니, 두 사람은 벌써부터 그리 실의에 빠지지 말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왕녀에게 몇 번이고 부탁했다.

**

줄리앙을 치료한다는 목적이 무색해진 이상, 더 이상 왕도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김선혁은 지체 없이 왕도를 떠날 준비를 했다.

“벌써 떠나려는가.”

“중간에 한 번 영지에 다녀오기는 했지만, 장장 두 달이나 왕도에 머물렀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서 지난 전쟁의 피로를 풀어볼까 합니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한참을 더 왕도에 머물렀다. 안락한 숙소와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까지 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내는 동안 후은을 베풀어주신 것 잊지 않겠습니다.”

혹시라도 왕도에 잡히게 될까 봐 걱정이 된 그가 황급히 작별의 예를 표하니, 테오도르 국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시 만날 때는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다.”

국왕은 약속한 포상은 따로 영지로 보내주겠다며, 웃는 얼굴로 그를 보내주었다.

“그럼 다시 뵙게 될 때까지, 강녕하시기를.”

후다닥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온 김선혁이 이번에는 오필리아 왕녀를 찾았다.

“왕녀께 인사드립….”

“그 자리에 앉거라.”

왕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번에 동부에서 진상을 해온 차다. 향과 풍미가 일품이니, 한번 들어 보거라.”

김선혁은 가만히 그녀가 하라는 대로 차를 입에 댔다. 하지만 불과 한 모금도 채 마시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그만 왕도를….”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려는 모양이다.”

왕녀는 그가 작별을 고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자꾸만 그의 입을 막았다.

“여름의 내원은 봄과는 또 다른 풍취가 있노라. 수줍게 고개를 숙인 꽃들도 저마다 만개하여 자태를 뽐내고, 가장 수수한 초목조차도 그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 없으니 그대도 여름의 내원을 마음에 들어 할 거라 장담하노라.”

몇 번이나 왕도를 떠날 예정이라 말을 하려던 김선혁은 그때마다 번번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떠날 것을 결정한 마당에야 더 이상 이별을 미룰 수는 없었다.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는 왕녀가 끼어들기 전에 황급히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음….”

어린 왕녀는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찻잔을 어루만졌다. 마치 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영지로 가볼 생각입니다.”

왕녀의 풀죽은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그는 굳게 마음을 먹고 다시 한 번 작별을 고했다.

“결국 떠나는 게로구나.”

결국 왕녀도 더 이상 그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짙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당초 예상보다 한참을 더 머물렀습니다. 아무리 수하들에게 영지를 떠넘긴 무능한 영주라지만, 이제는 돌아가 봐야지 싶습니다.”

“내 실수다.”

차분히 사정을 설명하는 그를 보며 왕녀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차라리 치료법을 찾았다 할 때, 조금 더 늦게 알려주라 할 것을 성급히 알려주는 바람에 그대가 왕도를 떠날 결심을 했구나.”

아쉬움이 가득한 왕녀의 목소리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정치적인 식견이나 성숙함은 자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지만 이렇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왕녀의 모습이 딱 그 나이 또래의 아이로 보여 기꺼웠던 것이다.

“시간이 되면 또 찾아오겠습니다.”

“그래주겠는가?”

“왕녀께서 거절치만 않으신다면….”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에 조금이나마 미소를 되찾은 왕녀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왕성의 수문장과 수비대장에게 미리 말해두어야겠구나. 하늘에 적색 그림자가 아른거리면 지체 말고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하라 미리 일러두어야겠다.”

사실 레드번을 타고 방문하는 그에게 왕성의 문이 열려 있고 말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사실을 콕 짚어 지적하지 않았다. 왕녀도 그 사실을 몰라서 한 말은 아니었을 테니까.

“부디 다시 만나 뵐 때까지….”

“거창한 인사는 필요 없다. 어차피 다시 보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왕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가 가급적이면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겠노라.”

왕녀는 그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사라졌다.

“돌아올 때, 선물이라도 가져다줘야 하나.”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된 왕녀가 남기고 간 찻잔을 빤히 바라보던 김선혁은 이내 자신도 자리를 떴다.

**

김선혁이 왕도에 머문 시간만 해도 벌써 두 달에 가까웠다. 그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왕가의 인물들과 보낸 그였지만, 그래도 다른 귀족들과 아예 친분이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다시 만날 때를 기대하겠소.”

명실상부한 국왕파 귀족들의 수장인 로젠하임 후작은 복잡한 왕도의 사정상 차라리 잠시나마 왕도를 떠나 있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그를 배웅해주었다.

“부디 백작이 모든 귀족들이 소문에 흥미를 귀를 기울인다 여기지는 않았으면 좋겠소.”

“왕실의 신뢰를 잊지 마시오. 우리 또한 기꺼이 백작을 위한 방패가 되어주겠소.”

국왕파의 귀족들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며 그를 격려해주고 변함없는 지지를 약속하며 다음의 만남을 기약했다.

“아오. 이것도 일이네.”

하루를 꼬박 왕도의 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데 사용한 김선혁은 떠나기 직전 문득 왕도의 이방인들을 떠올렸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다른 이들은 몰라도 수완 좋은 안유정이라면 이방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여론 속에서도 중심을 잘 잡을 것이다.

하지만 내심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라서 그는 레인하르트 후작에게 왕도의 이방인들을 잘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네가 아니어도 왕실이 알아서 잘 챙겨줄 테니, 너는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거라.”

레인하르트 후작은 콧방귀를 끼며 그의 요청을 무시했지만, 투박한 말투와는 달리 속정이 꽤나 깊은 후작이니만큼 알아서 이방인들을 잘 챙겨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자. 레드번.”

영지까지의 기나긴 비행에 벌써부터 하얗게 질린 아샤 트레일과 줄리앙을 태운 레드번이 왕성의 하늘 위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빼애애액!

긴 포효를 남기고 레드번이 왕성 위의 하늘에서 자취를 감췄다.

**

“줄리앙.”

영지에 도착한 김선혁은 어린 종자를 안아 레드번 위에서 내려주었다. 줄리앙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그의 태도가 영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굳이 그의 배려를 거절하여 손이 부끄러워지도록 만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그가 미안함을 표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트레일 경.”

유독 레드번만 타면 파김치처럼 늘어지기 일쑤인 아샤 트레일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안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쉬고 내일 뵙겠습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인지 그녀는 금세 자리를 떴고, 줄리앙도 비행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제 거처로 돌아갔다.

“수고했어. 레드번.”

왕도에서 살이 토실토실 올랐던 레드번은 영지와 왕도를 몇 번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본래의 날렵한 몸매를 되찾았다. 물론 채 걷어내지 못한 살집이 이곳저곳에 붙어있기는 했지만, 살만 뒤룩뒤룩 올라 돼지처럼 보였던 과거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너도 가서 쉬어.”

등 위에 고정된 안장을 떼어낸 그가 레드번을 자유로이 풀어주고는 제 스스로도 휴식을 취하기 위해 거처로 향했다.

“아오! 드디어 집이다!”

왕성의 으리으리한 숙소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했지만, 최소한 그에게만큼은 더없이 안락한 침실이다. 반가운 마음에 그는 그대로 달려들어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아. 집 떠나면 고생이야. 고생.”

자신이 없는 사이에도 철저하게 관리를 한 것인지 눅눅함 없이 보송보송하기만 한 침구에 얼굴을 파묻은 그가 나른하게 얼굴로 하품을 했다.

줄리앙을 신경 쓰느라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던 비행, 몸을 눕히고 나서야 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탁.

막 잠이 들려던 김선혁은 귓가를 파고드는 이질적인 소음에 몸을 뒤척였다.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낮게 중얼거렸다.

“아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의 정령 아티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

“잡아.”

앞뒤 다 잘라낸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아티야는 용케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돌풍을 일으켰다.

쐬에에에엑!

순식간에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침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한 자락이 산산이 찢겨나가며 그 틈에서 불쑥 괴한이 튀어나왔다.

“머, 멈춰! 잠깐만!”

비명과도 같은 다급한 외침에 김선혁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눈을 치켜떴다.

“한국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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