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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창공의 기사 (1)
‘최대한 교전을 피하고, 현상유지를 우선하라.’
왕실로부터 내려온 절대 교전 금지령은 사실상 무의미한 명령이었다. 이미 지침이 내려오기도 전부터 녹테인의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사실상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녹테인의 군대는 새롭게 꾸린 중부와 동부의 경계선에 마련한 임시주둔지에 웅크린 채 밖으로 나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협정을 염두에 둔 영토 수복 의지 따위는 이미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보급이 끊겨 체력이 상할 대로 상했고, 거듭된 패배와 퇴각으로 병사들의 의지마저 꺾여버렸다. 사기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녹테인의 병사들은 이미 패잔병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선 전체에 만연한 패배의식, 지휘관들도 그런 병사들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사기가 바닥을 친 것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게 아덴버그의 이방인 하나로부터 시작되었다.
푸른 늑대 기사단과 마법병대가 합류했을 때까지만 해도 녹테인의 병사들은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수복하고, 아덴버그의 기회주의자들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마법병대는 별다른 활약을 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아 전멸했고, 살아남은 푸른 늑대 기사단은 죽을 정도로 괴롭힘만 당하다 전선을 떠났다. 새로이 보충된 붉은 늑대들과 마법사들이 복수를 천명했다.
하지만 교활한 이방인은 복수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철저하게 기사들을 무시하고 일반 병사들을 사냥하고 다녔다.
그 와중에 와해되거나 지휘관을 잃은 부대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아덴버그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전선에서 맹활약을 하는데, 아군 기사단과 마법병대가 헛물만 켜고 있으니 의욕이 살 리가 없었다.
그때 붉은 늑대 기사단과 마법병대가 꾀를 내었다. 보병으로 위장하여 눈엣가시 같던 이방인을 유인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작전을 주도했던 마법사 탈리스만과 다섯의 선임 마법사들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살해당했고, 붉은 늑대 기사단의 간부들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붉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 헤일로와 몇몇 운 좋은 보병들뿐이었다.
“드라흔은 폭풍을 부리는 악마야.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폭풍에 잡아먹히고 말았어.”
살아남은 보병들의 입을 통해 그날의 패배가 전선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허무맹랑한 소문을 퍼트리는 자들을 일벌백계하여 더는 병사들이 동요하는 일이 없게 하라.”
뒤늦게 지휘부가 나서서 입을 함부로 놀린 보병들을 참수했지만, 이미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난 뒤였다.
사납고 날래기로 유명하여 승냥이라고도 불리던 녹테인의 병사들이 그때부터 겁 많은 토끼가 되었다.
**
빼에에에엑!
황야에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포효, 녹테인의 병사들은 목책 뒤에 웅크린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내려오지 마라. 제발 내려오지 마라.”
그들은 창공의 붉은 악마가 자신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쳐 주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다행스럽게도 하늘은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푸른 하늘을 배회하던 악마가 머리를 돌려 전선에서 사라진 것이다.
“하아.”
단지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을 뿐인데, 목책에 버티고 있던 병사들은 격전이라도 치른 것처럼 땀범벅이 되어 숨을 몰아쉬었다. 개중에 심약한 자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자 마저 있을 지경이었다.
그와 비슷한 광경이 전선의 곳곳에서 벌어졌다.
드라흔과 와이번은 마치 무력시위라도 하듯 전선을 배회했고, 녹테인의 병사들은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겁을 집어먹고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전장의 상황이 이러하니, 왕실의 교전 금지 지침은 하나 마나 한 명령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조용하구만.”
전선을 배회하던 김선혁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녹테인의 병사들이 들었다면 경기를 일으킬 만한 말을 뻔뻔스럽게도 지껄여댔다.
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전선이 이렇다 할 전투도 없이 조용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는 것은 녹테인뿐이 아니었고, 연전연승하던 아덴버그 역시 굳이 무리한 전투를 자처하지 않았다.
녹테인을 견제하던 한 축, 그리핀도르가 빠르게 철군하여 종전 협정까지 전광석화로 맺어버린 이상, 전처럼 녹테인을 마음 놓고 몰아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녹테인이 동부로 모든 전력을 집중할 경우 끔찍한 소모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아덴버그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전쟁은 아마 이대로 끝이 날 것이다. 과연 아덴버그가 점령한 영토를 전부 흡수할 것인지 대가를 받고 일부나마 반환을 할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 정도는 김선혁도 알 수 있었다.
쉬고 싶다.
전쟁의 끝이 보이자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 내가 어쩌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손에 너무도 많은 피가 묻어 있었다.
이제껏 몇 번이나 전쟁에 참가하고 수십 번의 전투를 치렀지만, 이번 전쟁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적은 있었던가. 비록 그 죽음이라는 게 대부분 아리아 아이젠의 손을 빌려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들, 자신 역시 공범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복수고 뭐고 이제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서부의 영웅.’
‘아덴버그의 창.’
‘전신(戰神), 드라흔.’
‘폭풍의 기사.’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아군은 맹목적으로 그를 칭송했고, 무조건에 가까운 신뢰를 보내왔다. 그 덕분에 그는 피로를 견디며 계속해서 전선을 배회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마침내 전선에서 더 이상 전투가 발생하지 않은지 3주가 되었을 때, 그는 더 견디지 못하고 맹스크 사령관과 면담을 요청했다.
“아덴버그의 전신께서 이 퇴물을 다 찾아주고, 무슨 일인가.”
“이제 영지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웃으며 김선혁을 반겨주었던 맹스크 사령관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폐하께서 자네가 청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간에 들어주라 하긴 하셨다지만,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군.”
사령관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재고의 여지는 없나? 자네의 빈자리가 아주 클 거야.”
“전선이 이미 안정화된 마당에 저 하나 빠진다고 표가 나기라도 하겠습니까. 설령 표가 난다고 해도 유능한 기사와 마법사들이 잔뜩 있으니, 금세 메꿔지고도 남을 겁니다.”
자신이 적 기사단과 마법병대를 붙들고 늘어진 덕에 아군 기사단과 마법사단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온전하게 전력을 보전한 그들이라면 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어렵지 않게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닐세. 아니야. 저들이 웅크리고 있는 것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네.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붉은 악마, 드라흔의 이름뿐일세.”
“듣기 거북한 별명일 뿐입니다.”
딴에는 추켜 세워준다고 한 말이었겠지만, 김선혁의 입장에서는 과히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붉은 악마라는 별명이 자신의 손에 묻은 피와 죄업을 꼬집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저 하나가 빠져서 무너질 전선이라면, 무리하게 지키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예전이라면 감히 하지 못했을 당돌한 말, 하지만 세운 공이 있고 달라진 위치가 있으니 그 말에 무게가 실렸다.
전장은 초인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맹스크 사령관이 입버릇처럼 해왔던 말이었다.
“그렇군. 자네 말이 맞네. 기사 하나 빠졌다고 무너질 국경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기존의 국경이라도 단단히 지켜야겠지. 내가 멍청한 소리를 했군.”
사령관은 그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 그를 붙잡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저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이젠 정말 지쳤습니다.”
맹스크 사령관도 그 말만큼은 십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리도 아닐세. 개전 이후 자네만큼 전선에서 혹사당한 사람은 없지. 내가 무능하여 자네에게 너무 큰 짐을 짊어지게 했던 모양이야. 정말 면목이 없네.”
짧은 기간 동안 그가 치른 전투의 횟수만 해도 다른 이들의 수십 배에 달했다. 게다가 그가 치른 전투가 어디 보통 전투이든가.
개전 초기에는 마법사를 전멸시키고 녹테인의 푸른 늑대 기사단의 발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묶었다. 푸른 늑대 기사단이 무력화된 이후에는 전선을 돌며 수많은 부대들을 와해시켰다. 나중에는 작정하고 달려든 붉은 늑대들과 마법병대의 집중공격을 홀로 감내해야 했다.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기동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만큼 그는 전장에서 혹사당했다.
“이제는 돌아가서 쉬고 싶습니다.”
김선혁은 정말로 피로했고, 맹스크 사령관이 보기에도 낯빛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사령관은 그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 떠날 건가?”
“혹시 모르니 녹테인의 주요 시설 몇 개를 파괴해놓고 떠날 생각입니다.”
붉은 늑대들과 마법사들의 함정에 빠져 악전고투했던 그날, 그의 레벨은 무려 19에 이르렀다. 직감적으로 또 한 번의 레벨업이 머지않았음을 느낀 그는 마지막으로 경험치를 긁어모을 작정이었다.
**
마지막 출격을 앞두고 테오도르 국왕의 연락이 왔다.
[기사들의 칭찬이 자자하더군. 그대가 힘을 써준 덕분에 피해가 줄었다고.]
“국왕 폐하의 말씀 하나만 믿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대가를 약속받고 참가한 전쟁이니, 일한 만큼 대가를 받겠다고 다시 한 번 확인을 한 것이다. 곁에서 통신을 듣고 있던 맹스크 사령관이 그 뜻을 알아채고는 뜨악한 얼굴을 해보였지만, 테오도르 국왕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도리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래. 나 역시 최선을 다해 그대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다.]
국왕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그의 공을 치하해주었다.
[그래. 전선을 떠나고 싶다 했다지?]
“영지도 습격을 받았고, 저 역시 지난 전투에서 입은 부상과 피로가 누적되어 더 이상은 제힘을 발휘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부디 헤아려주십시오.”
[그대는 오해하지 말라. 분명 나는 그대에게 독자적인 작전권을 주었고, 진퇴를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대가 지금이 물러나야 할 때라 여겼다면 그리하면 그만이다.]
과연 자신의 말을 천금같이 여기는 아데스덴 왕가의 수장다운 대답이었다.
[허나 그 전에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이미 귀환을 인가받은 김선혁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테오도르 국왕의 말을 기다렸다.
[만약 그대와 같은 존재들이 녹테인을 거든다면 어찌하겠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뜻 모를 질문에 그가 되물으니 국왕이 잠시 텀을 두고 대답했다.
[그리핀 라이더들이 그리핀도르의 왕도를 떠났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폐하. 제가 우둔하여 폐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창공의 기사 일곱 중 둘이 그대가 있는 서부 전선으로 향했다는 말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그가 대답할 말을 찾는 사이에 국왕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대는 창공의 기사들을 두고 전장을 떠날 셈인가.]
순간적으로 절망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녹테인 병사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폐하….”
그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국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창공의 기사들이 공언을 했다더군. 누가 진짜 창공의 주인인지 판가름 내겠다고. 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한한 신뢰의 표현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보면 유치한 도발 같기도 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하지만 김선혁으로서는 그 어느 쪽이든 대답하기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