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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그라두스 결투 (2)
당장에라도 오색찬란한 검광을 흩뿌리며 달려들 것 같았던 라이든 레이라크는 어쩐 일인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지난 재판 결투로부터 고작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는 그날의 패배를 곱씹으며 밤낮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 90위 언저리던 그라두스 순위가 79위까지 상승했다. 상대가 얻은 그라두스 78위는 불로소득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에 반해 자신은 무수한 결투를 통해 실력을 입증받았다.
당연하게도 다시 결투의 기회가 온다면 무조건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과거에도 자신이 정말로 드레이크 나이트보다 약해서 졌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은 드레이크 나이트가 창을 세워 드는 순간 완전히 박살이 났다. 무심한 듯 보이는 눈동자와 마주친 것만으로도 거창에 꿰뚫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스스로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끔찍한 압박감 속에서 그는 팔이 굳고 몸이 얼어버렸다.
스스로는 지금의 망설임을 신중함이라 자위했지만, 자신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자신은 신중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상대는 어떠한가. 아무 것도 모르던 가짜 기사 주제에 지금은 마치 진짜 기사라도 된 것처럼 오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흔들림 없는 시선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위축되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라이든 레이라크는 결투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기세에서 압도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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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가 한순간에 갈리는 전장은 응집된 감정이 오가는 혼란의 도가니였고, 그런 아수라장에서 살아온 김선혁은 상대의 감정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의 검은 녹슬고 마법사의 입은 봉해졌다.’
레인하르트 후작의 말이 절실하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지금의 결투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김선혁은 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몸이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라이든 레이라크를 향해 그 날카로운 창끝을 겨누었다.
“윈드 피어싱.”
짧은 읊조림과 함께 바람이 몸을 휘감았고, 낭창거리던 창끝이 꼿꼿하게 목을 세우고 상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것으로 결투는 끝이었다.
“다시는 나에 대한 험담이 내 귀에 들어오게 하지 마라.”
벼락의 검을 상대로 힘겨워하던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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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의 검, 레이라크의 재판관이 또 한 번 드레이크 나이트에게 패배했다는 소문은 금세 왕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야말로 처참한 패배였다지. 나이트 레이라크는 검 한 번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완전히 기가 눌린 채로 결투를 시작했다더군.”
“그뿐인가. 드레이크 나이트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창에 꿰뚫려 절명했었을 거라 들었네. 그간 자신의 패배를 그리도 부정하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된 거지.”
귀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레이라크의 재판관과 드레이크 나이트와의 결투에 대해 떠들어댔다.
“벼락의 검이 약한 것인가. 아니면 드레이크 나이트가 강한 것인가.”
사람들은 단 한 계단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그라두스 78위와 79위의 기사가 펼친 대결의 일방적인 결과에 짙은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의문을 곧 풀 수 있게 되었다.
‘드레이크 나이트! 그라두스 74위의 기사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얻다!’
라이든 레이라크를 패배시킨 드레이크 나이트가 또 다른 그라두스의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철벽의 기사, 로엔그람, 드레이크 나이트에게 패배! 이제 드레이크 나이트의 그라두스는 69위!’
드레이크 나이트의 그라두스 결투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라두스 74위의 기사를 꺾고 곧장 69위에 랭크된 철벽의 기사를 패배시켰다. 그리고 다시 65위, 61위의 자리를 꿰차고 있던 기사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스스로의 힘을 입증했다.
연이은 승리가 드레이크 나이트의 진짜 실력을 증명해주었고, 이제 어느 누구도 라이든 레이라크가 약했던 것인지, 드레이크 나이트가 강했던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게 되었다.
“드레이크 나이트가 철혈의 자작, 로메로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소문은 금세 들불처럼 번져 왕도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이 세기의 대결을 앞두고 흥분을 금치 못했다.
‘왕실 기사단 소속 상급 기사, 철혈의 자작 조슈아 로메로, 그라두스 52위.’
상대는 무려 그라두스 순위 52위에 랭크된 진짜 강자였으며, 철혈이라 불리며 숱하게 많은 기사들을 좌절시킨 검호였다. 이제껏 그가 꺾어온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였다.
“완전히 미쳤군. 몇 번 이기더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야. 하필이면 철혈의 자작에게 결투를 신청하다니.”
“만약 드레이크 나이트가 이긴다면, 정말로 굉장한 이슈가 될 거야!”
그런 기사를 상대로 결투를 신청한 드레이크 나이트의 행동은 용기, 또는 무모함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장 처음에 치렀던 라이든 레이라크와의 결투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드레이크 나이트와 철혈의 자작이 결투를 치렀다는 소식은 없었다. 드레이크 나이트가 왕도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서부로 떠났을 때까지도 결투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철혈의 자작과 드레이크 나이트의 결투 자체가 헛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레이크 나이트가 왕도를 떠나고 발간된 잡지, 사람들은 맨 끄트머리에 수록되어 있던 그라두스 순위를 보고는 경악했다.
‘중앙군 서부방면 소속, 라인펄 백작령의 영주, 용기병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그라두스 52위.’
헛소문이었을 거라 여겼던 철혈의 기사와 드레이트 나이트의 결투 결과가 버젓이 그라두스 순위에 수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투의 공증인이 있을 것이다! 그 자를 찾으면 그들의 결투가 어땠는지 들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제 그라두스 결투에 입회했던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회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게 뭐가 궁금해.”
그라두스 서열 4위이자 왕가 수호대의 수장인 레인하르트 후작이 바로 사람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입회인이었다. 하지만 후작이라는 위치를 떠나서 스스로가 이룩한 검의 경지로 많은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레인하르트 후작에게까지 찾아가서 결투에 대한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물을 간 큰 귀족은 없었다.
“왕녀께서 거친 사내들의 이야기에 그리 관심이 많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레인하르트 후작도 왕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처음 결투는 명백하게 드라흔 백작의 패배였습니다. 하지만 철혈의 자작은 스스로의 승리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후작은 왕녀 앞에서 그날의 결투를 모조리 털어놓아야 했다.
“그래서 철혈의 자작은 드라흔 백작에게 드레이크에 기승할 것을 권했습니다. 모든 힘을 끌어올린 상대를 꺾어야 그게 진짜 승리라 생각했던 탓이지요.”
“호오. 그래서 어찌 되었는가.”
왕녀의 독촉에 레인하르트 후작이 조금이지만 감탄이 섞인 어투로 대답했다.
“드레이크에 올라탄 드라흔 백작은 드레이크에 올라타지 않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습니다.”
“그 정도로 드라흔 백작의 무용(武勇)이 대단하던가.”
왕녀가 눈을 빛내며 한 말에 후작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장담컨대 철혈의 자작뿐 아니라 상급 기사들 중에 드레이크에 올라탄 드라흔 백작을 이길 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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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에 일대 파란을 남긴 김선혁은 그 무렵 자신의 영지에 거의 도착해가고 있었다.
“아고. 삭신이야. 죽겠다.”
“그러게 왜 생전 부리지도 않던 호승심을 부리신 겁니까.”
수레에 드러누워 앓는 소리를 내뱉는 그에게 줄리앙이 잔소리를 해댔다.
“고작 그라두스 몇 계단 차인데 설마 그 정도로 격차가 심할지는 몰랐지.”
“상급 기사들이야말로 왕실의 진짜 힘입니다. 그들을 얕보셨으니 그리 곤욕을 치르신 것도 당연합니다.”
연이은 승리에 이성이 잠깐 출타했던 모양이다. 상급 기사를 꺾고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보겠다는 망발을 부린 것을 보면. 그는 뼈저리게 그날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벼락의 검이 상급 기사를 상대로 승리한 적도 있잖아. 게다가 프레드릭 전 중대장은 그렇게 강해보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자신에게 패배한 라이든 레이라크가 과거 상급 기사를 상대로 결투에서 승리한 전적이 있었고, 한때 기병대의 중대장이었던 프레드릭 실더프 상급 기사의 실력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경력을 쌓아 상급 기사에 오른 자들과 오직 검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기사들은 태생부터가 다른 존재입니다. 프레드릭 실더프 경은 전자고, 철혈의 자작은 후자이지요. 벼락의 검에게 패배한 상급 기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줘. 진즉 알았으면 그런 미친 짓 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 저는 분명 몇 번이나 백작님을 말렸습니다. 고집을 부리신 건 백작님이십니다.”
하기야 그때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고작 그라두스의 차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데 설마 그렇게 큰 격차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철혈의 자작은 살이 떨릴 정도로 강했다. 속성의 힘을 두른 창은 자작이 불러일으킨 검광에 도통 힘을 쓰지 못했고, 자신했던 윈드 피어싱 스킬과 각종 변칙적인 기술들은 자작의 건실한 방어를 뚫어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첫 번째 결투에서 완벽하게 패배했다. 하지만 자작은 기왕 시작한 결투 제대로 결과를 내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며 드레이크에 기승할 것을 권했다.
패배감과 좌절도 잠시, 그는 전의를 다지고 골드레이크에 올라 자작과 다시 한 번 결투를 치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겨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내가 미쳤지. 전에는 무슨 깡으로 레인하르트 후작에게 결투를 신청했을까.”
철혈의 자작보다 아득히 높은 경지에 올랐다 평해지는 레인하르트 후작에게 흙먼지를 뒤집어씌웠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새삼 실감이 되었다.
“때로는 직접 겪어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어린 종자의 애늙은이 같은 말에 피식 웃은 김선혁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트레일 경, 뭐 불편한 건 없습니까?”
“없습니다.”
왕녀에게 소원 찬스까지 쓰며 데려온 아샤 트레일이니만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누군가가 챙겨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잘 하는 성격이었고, 왕도의 고고한 기사라고 해서 노숙에 불평하지 않았다.
“아직도 멀었나요?”
문제는 마법사 아리아 아이젠이었다. 말을 탈 줄도 모르고 생전 먼 거리를 이동해본 적도 없는 폐인 같은 마법사는 수레 위에서도 끊임없이 불평을 토해냈다. 이곳에 오기까지 똑같은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야 했는지, 귀에 딱지가 다 생길 지경이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창백한 얼굴로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차마 화조차 낼 수가 없었다.
마법사라는 족속이 얼마나 체력적으로 떨어지는 존재인지 김선혁의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제 스스로도 환자인 주제에 슬쩍 자세를 바로하고 아리아 아이젠을 달래준 그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영주니이이이이임!”
한참 만에 나타난 기병들, 잭슨이 자신의 영주를 보고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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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이 넘도록 떠나있었던 영지는 또 한 번 몰라보게 발전한 상태였다. 그 모든 게 안토인 몽테뉴의 작품이었다.
“고생하셨소.”
“책상에 앉아 펜 좀 끄적거린 게 고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생은 삭풍 맞으며 전장을 전전하신 영주님께서 하셨지요.”
오랜만에 만난 노학자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늙어 보였다. 말과는 달리 영지의 대소사를 관리하느라 꽤나 고생을 한 게 분명했다. 하기야 현재 팽창 중인 라인펄 영지에 제대로 된 관료라고는 하나뿐이었으니 혼자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져야 했을지 보지 않아도 선했다.
“조만간 왕도에서 영지의 운영을 도울 전문가들과 기술자들이 올 것이오. 그러니 조금만 참고 견뎌봅시다.”
미안한 마음에 그리 이야기를 했더니 안토인 몽테뉴가 별말을 다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아샤 트레일과 아리아 아이젠을 맞이하고는 숙소를 배정해 그들이 바로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영주님. 원로에 피곤하실 것을 알고 있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지간하면 서면으로 그간의 일을 간추려서 보고했을 안토인 몽테뉴가 웬일인지 그를 붙잡았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거요?”
“근래 들어 라인펄 강에 심상치 않은 괴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괴물을 보았다는 자도 있고 허리까지 오던 수위가 어떤 날은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고, 또 어떤 날은 목까지 차오르기도 하니 불길한 징조라며 영지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노학자는 영지민들이 자꾸만 강속에서 괴물을 보았다며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영지의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애로운 영주님께서 영지민들에게 어업(漁業)을 허락하셨으나, 이런 뜬소문으로 인해 오히려 영지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으니 속히 진상을 파악하여 조치하심이….”
“내가 알아서 하겠소. 그 건은 걱정하지 마시오.”
김선혁은 확신에 찬 어조로 안토인 몽테뉴를 안심시켜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괴소문에 등장한 괴물이 블루곤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탓이다.
내친김에 블루곤의 상태를 확인해본 김선혁은 상태 창을 보고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 불만, 불만, 불만, 불만, 불만, 불만, 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