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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그라두스 결투 (1)
아슈테인 후작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대국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아국의 요구는 정말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받아들일 수 없다 하시면, 아국도 처음부터 조건을 검토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테오도르 국왕은 요지부동이었다.
“원한다면 그리 하라.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노라.”
설마 협상 막바지에 와서 이렇게 국왕이 직접 나서 어깃장을 놓을 줄은 아슈테인 후작도 예상하지 못했다.
“허나 그대는 알 것이다. 시간이 누구의 편인지.”
테오도르 국왕의 말에 아슈테인 후작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던 탓이다. 오만불손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적국의 후작을 보면서도 테오도르 국왕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짧게 손을 흔들어 관료들을 격려하고는 회의장을 나섰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조건을 다시 조율해야겠소.”
후작이 국왕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회의실을 찾은 또 다른 관료와 이야기를 하던 아덴버그의 고위 관료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귀국이 치러야 할 배상금을 두 배로 올리겠소.”
“그게 무슨 소리요!”
이쯤 되면 아예 협상을 뒤엎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던지라 아슈테인 후작이 격분해서 소리쳤다.
“이미 아국은 충분히 성의를 보였소! 그런데 이제 와서 배상금을 두 배로 올리겠다니!”
“후작이 타지에 나와 있어 귀가 어두워졌음을 감안하여 내 친히 한 가지 소식을 알려주겠소. 똑똑히 들으시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항의하는 후작을 보며 아덴버그의 관료가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핀도르의 군대가 귀국의 서쪽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이 방금 전에 들어왔소.”
“그게 무슨….”
너무 놀란 나머지 의자가 뒤로 넘어가도록 과격하게 몸을 일으킨 후작이 관료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듣자하니 동원된 병력만 해도 최소 3개 연대라고 하였소. 이리 전격적으로 움직인 것을 보면 필시 날이 풀리기를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하여 일을 벌였을 터, 그들을 몰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오.”
이어진 설명에 후작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비틀거렸다. 뒤늦게 녹테인의 인물들이 달려들어 그를 부축한다고 소란을 피워댔다.
‘허나 그대는 알 것이다. 시간이 누구의 편인지.’
테오도르 국왕이 남기고 간 한마디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은 후작을 보며 아덴버그의 관료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배상금의 규모는 점점 더 올라갈 것이오. 그러니 잘 생각해보고 판단하시오.”
그 자신만만한 음성을 들은 순간 후작은 직감했다.
이번 협상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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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테인과의 전후 협상이 모두 끝이 났다는 소식은 금세 김선혁의 귀에 들어왔다. 이제나저제나 협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고대하던 포상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는 레인하르트 후작을 찾았고, 어렵지 않게 후작을 만날 수 있었다.
“녹테인이 걸었던 조건은 무산되었다.”
“어째서말입니까?”
“어째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었지만, 김선혁은 변명하는 대신 다시 한 번 녹테인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폐하께서는 왕국의 창이 다른 검들처럼 녹슬지 않기를 바라셨다.”
결국 그 말은 발이 묶인 기사들을 대신해 그라도 더 굴리고 써먹어 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시무룩해진 그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니 후작이 혀를 차고는 갑작스러운 협상 타결의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녹테인이야 어떻게든 확답을 받고 싶었겠지만, 폐하께서 완강하게 거부하신 데다가 서부 국경까지 시끄러워졌으니 별 도리가 없었겠지. 더 버티다가는 전황에 따라 배상금이 몇 배는 더 올라갈 판국이었으니까.”
하기야 아무리 호전적인 녹테인이라고 해도 한꺼번에 두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건 부담스러웠으리라.
“어쨌건 간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네가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다.”
“저야 뭐, 이제 드레이크 기병대도 해산됐고 영지나 잘 건사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레인하르트 후작의 말에 그가 질색을 하며 한 발 물러났다. 그런 그를 보며 후작이 또 한 번 혀를 찼다.
“맹스크 노인네도 칼스테인 요새의 반환이 끝이 나면 공식적으로 서부군 사령관 자리를 내놓고 은퇴할 터, 영지가 전부 서부에 붙어 있으니 완전히 손을 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서부 전체를 아우르진 않겠지.”
김선혁은 후작의 말에도 심드렁했다. 그런 문제야 신임 사령관과 맹스크 사령관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자신은 한발 빼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했다. 하지만 후작은 서부군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명성이 높은 그도 뒷짐 지고 물러나 있을 수만은 없을 거라 장담했다.
결국 원하지도 않았는데 쌓여버린 명성이 발목을 붙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과연 전쟁이 비일비재한 이런 세상에서 어디까지 약속이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협상으로 녹테인히 향후 10년간 아덴버그의 국경을 넘지 않기로 약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뭐, 마음대로 생각해라. 전쟁이라는 게 꼭 방어전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너도 이제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후작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했다. 찝찝한 마음에 절로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한 그가 뒤늦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리핀도르의 침공이….”
“맞아. 모두 국왕 폐하의 작품이지.”
레인하르트 후작의 확답에 김선혁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도 완전히 안녕이라 생각했는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후작은 그리핀도르가 얼마나 활약을 해주냐에 따라 향후 정세가 달라질 거라 말하며 확전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망할.”
**
확전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왕도는 도리어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이제껏 협상 뒤로 미루고 있던 승전식과 여러 가지 행사가 뒤늦게나마 시작이 된 것이다.
가장 먼저 치러진 것은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녹테인의 수를 읽지 못해 수많은 피해가 생기고 말았으니, 전선을 책임진 총사령관의 입장에서 어찌 포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나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는 아덴버그가 칼스테인을 녹테인에 반환하는 그날까지 이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으리라.”
하지만 칼스테인 요새를 점령하며 가장 큰 공을 세운 맹스크 사령관은 이전의 침공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스스로의 과오를 핑계로 모든 포상을 거부했고, 요새를 반환하는 그날까지 칼스테인에 머물 것을 천명했다.
가장 큰 공을 세운 자가 그렇게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으니,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관심은 그 다음 가는 공을 세운 이에게 향했다.
그게 바로 김선혁이었다.
“아덴버그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빠르게 신분이 상승한 자는 없었노라”
승전식에서 만난 테오도르 국왕은 여전히 군왕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흥이 잔뜩 올라 미소가 만개한 얼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테오도르 국왕이 말하는 동안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하여 왕실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대체 어떤 상을 내려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던 탓이니라.”
이미 몇 년 만에 아무것도 아닌 말단 기병을 백작의 자리까지 끌어올린 것만 해도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조치였다. 왕실의 고민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다.
“드라흔 백작은 들으라!”
테오도르 국왕의 말에 김선혁이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제법 능숙해진 왕실의 예법에 수많은 귀족들이 감탄을 토해냈다.
“명예 백작의 작위를 정식 백작으로 인정하고, 그대의 영지를 백작령으로 칭하겠노라. 새로운 봉토를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지금까지 라인펄에 공을 들인 드라흔 백작의 노고를 생각하면 이는 포상으로서의 의미가 무색하다. 하여 병이 없는 가임기의 여성과 건장한 남성을 각기 2천씩 라인펄로 이전케 하고, 일백의 장인들을 보내 영지가 부흥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또한 그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모든 비용을 왕실이 부담하겠노라.”
머릿수가 곧 영지의 재정이 되는 이곳 세상에서 4천여 명의 남녀를 영지로 보내준다는 것은 엄청난 보상이었다. 하지만 세운 공이 워낙에 크고 그 승리 하나하나가 상징성이 있었던지라 국왕의 포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왕실의 관리 하에 있는 마장(馬場)에서 엄선된 준마 오십을 내리고, 일백 벌의 철갑과 잘 정련된 검을 하사하도록 하겠다. 거기에 더해 각기 삼백 두의 돼지와 소를 하사하며….”
처음에는 세운 공이 있으니, 이 정도의 포상은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 입을 쩍 벌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왕실이 내리는 포상은 막대했다.
“끝으로 금화 일천 닢을 하사하며, 향후 5년간 모든 조세의 의무를 면제토록 하겠다.”
자신이 대체 뭘 받았는지조차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길었던 포상의 목록에 그가 멍한 얼굴을 해 보이니 테오도르 국왕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너무 많다 여기는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테오도르 국왕이 자신을 죽을 만큼 굴릴 작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지라, 김선혁은 차라리 뻔뻔해지기로 작정했다.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하라는 뜻으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지금 당장의 포상을 거부한다고 해서 왕실이 자신을 그대로 영지에서 빈둥거리게 둘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그러면 된 것이다.”
국왕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의 대답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포상이 지나치다 생각했는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좌중을 압도하는 테오도르 국왕의 위엄에 감히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만만한 그를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미운털 박힌 거 같은데.
질시와 우려가 가득한 수십 쌍의 눈초리마저도 테오도르 국왕이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선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도 논공행상이 이어졌다. 워낙에 그가 받은 상이 대단했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의 포상이 초라하게 느껴져, 분위기가 다소 미적지근해지고 말았다. 이를 느낀 것인지 포상을 마친 테오도르 국왕이 잔을 들며 외쳤다.
“오늘만큼은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취할 때까지 마시고 즐겨라! 이는 왕명이니 오늘 취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내 기억해둘 것이니라!”
“명대로 하겠나이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축하해야 할 승리가 왕국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승리였던 것은 모두가 인정했던지라, 처음에는 왕명에 못 이겨 억지로 즐기는 척하던 귀족들도 금세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너는 내 옆에서 마셔라. 애먼 곳에 가서 주사 부리지 말고.”
언제 다가왔는지 슬쩍 잔을 내미는 레인하르트 후작을 보며 김선혁이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을 해보였다.
“수호대의 수장께서 그렇게 막 드셔도 되는 겁니까?”
“못 들었어? 오늘 안 취하면 폐하께서 두고 보신다잖아.”
되지도 않을 후작의 변명에 결국 그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표정으로 비어버린 후작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언제 영지로 돌아갈 건가?”
“기다렸던 행사가 거의 끝났으니, 볼일 몇 개만 처리하고 바로 출발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영지를 비운지도 너무 오래 돼서 슬슬 걱정도 되던 참이기도 하고.”
“그러냐.”
단숨에 술잔을 비운 후작이 빈 잔을 건네주었다. 어렵지 않게 후작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가 제 손에 쥐고 있던 잔을 치우고는 후작이 건네준 잔을 받아들었다.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영락없는 애송이더니, 잘도 안 죽고 여기까지 왔구나.”
악담이라기보다는 대견함이 느껴지는 음성, 후작이 채워준 잔을 들이킨 그가 대꾸했다.
“뭐, 여러 번 죽을 뻔 하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방심하지 마라. 자만하지 말고, 절대 자신하지도 말아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후작의 음성은 전에 없이 무거웠다.
“이전까지야 그저 신경 쓰이는 이방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질 거다. 적들의 모든 이목은 항시 네 주변에 있을 것이며, 틈을 보이는 즉시 칼을 쑤셔 박으려고 들 테지.”
듣기만 해도 으스스해지는 이야기라 그가 저도 모르게 목가를 쓰다듬는데 후작이 저 멀리 떨어져 이쪽을 힐끗거리는 귀족들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비수가 앞에서만 날아올 거라 생각하지 마라. 폐하의 위엄에 억눌려있다지만, 귀족들의 탐욕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지금의 너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나설 수 없는 전장에서 명실상부한 아덴버그 최강의 검이다. 그러니 시답잖은 일로 꺾이지 말란 말이다.”
후작의 거듭된 당부를 듣고 있자니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취기가 날아가 버렸다. 눈빛이 또렷해진 그를 보며 후작이 피식 웃었다.
“정 버겁다 싶으면, 전부 버리고 왕실 기사단에 들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가 그리고 왕실이 기꺼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처음부터 그 말을 하시려던 겁니까.”
잔뜩 무거워진 분위기가 다소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 김선혁이 웃으며 농담처럼 물으니, 후작이 손을 몇 차례 흔들어 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취할 때까지 마신다더니.”
어느새 테오도르 국왕의 뒤편에 자리를 잡고 눈을 번뜩이는 후작의 모습 그 어디에도 취기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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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식을 마치고 돌아온 김선혁은 왕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한편, 몇몇 기사들에게 심부름꾼을 보냈다. 그중에서도 그의 연락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은 라이든 레이라크, 벼락의 검이었다.
“네가 그렇게 내 험담을 하고 다닌다지?”
평기사들을 통해 라이든 레이라크가 스스로의 패배를 어떻게 변명하고 다니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말 많은 패자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라이든 레이라크는 변명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지난 패배를 납득하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벼락의 검은 차라리 오늘의 만남을 통해 설욕하겠다는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실력이다.”
언제고 라이든 레이라크가 처참하게 패배했던 그날처럼 그가 손을 까딱거렸다. 라이든 레이라크가 그 모습을 보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검력을 불러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