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
083. 전설의 시작 (2)
힘의 격차는 명명백백(明明白白)했다. 솟구치던 성광은 거대한 창을 뿔처럼 내세운 흉폭한 짐승을 이겨낼 수 없었고, 금세 흩어져 온데간데없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성광을 모두 먹어치우고도 허기가 가시지 않은 것인지, 풍아가 달려들어 성기사의 한쪽 어깨를 통째로 물어뜯었다.
“끄아아악!”
마치 철갑탄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한쪽 어깨부터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사내, 그때 지켜보고 있던 이방인들이 끼어들었다.
하나가 부상당한 동료를 받아들고, 남은 다섯이 각기 검과 창, 활을 내쏘았다. 사내를 물어뜯고도 흉성이 가라앉지 않아 달려들던 풍아가 그 일시에 이루어진 공격에 흩어지고 말았다.
김선혁은 울컥 솟아오른 무언가가 기어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투구 안쪽에 퍼져 나가는 비릿한 냄새, 당장에라도 바이저를 올리고 목 끝에 걸린 이 불쾌한 피가래를 뱉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바이저를 들어 올리는 대신, 창을 꽉 움켜잡았다.
가자. 골디.
마음속으로 속삭이는 순간, 골드레이크가 앞발을 들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창을 내지르는 그에게 보조를 맞춰 내리찍듯 상체를 숙였다. 거대한 괴수의 신체가 들렸다 숙여지는 것만으로도 돌격에 필요한 거리가 갖추어졌다.
“윈드 피어싱.”
김선혁은 내리찍듯 창을 찔렀다.
“막아!”
부상자를 곁에 둔 탓인지 감히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이방인들이 다시 힘을 모았다. 검광과 들끓는 에너지가 모여 마주 쏘아져 온다.
저들 중에 상급 병과의 이방인은 성기사뿐이다.
강력하지만 성광을 두른 철퇴에 비하면 분명 손색이 있는 공격, 김선혁은 피투성이가 된 입매를 꽉 다물었다.
쐬에에에엑.
방금 전에 내질렀던 공격처럼 광폭하고 거대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상대를 노린 그의 찌르기는 범위가 좁은 만큼 훨씬 더 날카로웠다.
카드득.
비명은 없었다. 그저 철갑 부서지는 작은 소리와 푸욱, 하고 무른 살 파이는 파육음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불타오르던 생명의 불꽃 하나가 꺼지는 소리였으니, 창에 심장을 꿰뚫린 이방인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다.
쾅!
한발 늦게 적들이 내지른 공격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은 단단하게 비늘을 세운 골드레이크에게 차단되고 말았다. 서걱거리며 단단한 비늘이 우수수 잘려나갔다. 괴수의 가슴팍에서 피가 튀어 오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크아아아아.
피를 본 괴수는 몸을 웅크리는 대신 흉성을 터뜨리며 적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엇, 하는 사이에 이방인 하나가 괴수의 억센 턱을 피해 물러나다 주저앉고 말았다.
김선혁은 눈을 빛내며 허점을 드러낸 이방인을 향해 창을 내리찍었다. 더 이상은 무리하게 스킬을 사용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지친 와중에도 그가 내지르는 찌르기는 빛살과도 같았고, 적의 심장을 꿰뚫기에는 충분했다. 어차피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 만신창이가 되든, 보잘 것 없는 나무창에 찔리든 죽는 것은 매한가지, 또 하나의 생명이 스러져간다.
푸욱.
목가를 꿰뚫린 이방인이 입을 벙긋거렸다. 무언가 유언이라도 남기려는 것인지, 필사적으로 입을 놀려보지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뿐이었다. 이내 손 내밀어 허우적거리던 이방인의 손이 떨구어지고 고개가 꺾였다.
순식간에 동료를 연달아 잃은 이방인들의 기세가 돌변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저쪽 세상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억양, 하지만 마음이 약해지기에는 전황이 너무 급박했다. 가장 큰 적을 무력화시키기는 했지만, 이방인들은 아직 넷이나 남아있었다. 그는 기력이 고갈돼 축 늘어진 손을 치켜 올리며 창을 잡고 자세를 취했다.
쐬엑!
하지만 그보다 한 발 빨리 이방인들 중 하나가 내쏜 화살이 투구를 꿰뚫을 듯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큽.”
숨을 들이키며 내지르려던 창이 방향을 틀어 투구 앞에 세워졌다. 창끝에 맴돌던 바람이 게걸스럽게 화살을 빨아들이고 이내 힘을 잃은 화살이 툭, 하고 떨어졌다.
“성태 살려내! 이 개자식아!”
쓰러진 이방인들 중 누가 성태라는 이름을 지녔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미 자신의 손에 쓰러진 기병들의 수만 기백(幾百)이다.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듣는다면 그것만으로 머리가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바람에 휘감긴 거창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지만, 김선혁은 그 은빛 창이 어쩐지 붉게만 보였다. 스스로가 이룬 살겁의 무게에 억누르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악물고 창을 들어 올렸다. 등 뒤에서 달려오는 아군 기병들의 발소리와 함성,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죽어 몸 누이는 것은 아군이었다.
“죽어! 이 괴물!”
이방인들은 이제 완전히 독기가 올라 스킬을 연달아 토해내며 맹공을 퍼붓고 있었고, 풍아를 사용하고 몇 번이나 윈드 차징을 거듭한 자신은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벌써부터 시야가 흐릿하게 뭉개지는 듯한 기분에 그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았다.
한 번만 더 견뎌다오!
생명을 담보로 끌어모은 바람이 다시 한 번 거대한 회오리가 되었다. 피 흘리던 골드레이크가 목을 세우고 사납게 울부짖었다.
쾅쾅.
내딛는 골드레이크의 걸음마다 땅이 파이고 단단한 바위가 부서져나갔다. 촘촘하게 검광을 일으켜 진로를 차단했던 이방인들이 그 광폭한 돌진에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크아아아!
골드레이크가 포효하며 발을 구르자, 땅이 흔들렸다. 다시 한 발을 더 내딛자 이번에는 단단하던 대지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세 걸음 째에서 갑작스레 땅이 일어나 앞뒤로 거대한 벽을 세웠다. 물러나던 등을 막고 솟아오른 흙으로 이룬 성벽, 이방인들이 기겁을 하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윈드….”
지진과도 같은 이변 직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력, 김선혁은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피어싱!
기력이 고갈된 손끝이 벌어지며 금방이라도 창이 떨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이대로라면 윈드 피어싱 스킬이 제대로 발동되기도 전에 창을 놓치고 말리라.
‘주인님.’
그 순간 투명한 손이 힘없이 벌어지던 손을 부드럽게 감아쥐고 흘러내리던 창을 고정해주었다.
‘조금만 더!’
아티야의 음성을 들으며 그는 눈을 번쩍 떴다. 혼미해지던 정신이 순식간에 돌아오고, 위태롭게 흔들리던 창끝이 곧게 적들을 향해 세워졌다.
“신의 형벌은 가차 없어라!”
그때 완전히 무력화되었다고 생각했던 성기사가 철퇴를 잡고 달려왔다. 한 팔로 겨우 움켜잡은 철퇴는 불안하기만 했지만, 스킬을 발동하기에는 충분했다.
허공중에 일어난 거대한 손바닥이 내리찍듯 그와 골드레이크를 덮쳤다. 그 뒤로 이방인들이 펼친 검광이 찌르듯이, 베듯이 짓쳐들었다. 언젠가 투구를 노리고 쏘아졌던 섬광 머금은 화살이 송곳처럼 달려들었다.
“죽어! 이 개자식아!”
스킬의 발동에 성공한 성기사가 보란 듯이 웃어보였다. 그가 성광과 검광, 그리고 화살까지 전부 막아내지는 못할 거라 확신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의 목표는 모든 공격을 걷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창을 높게 들어 거대한 손바닥 형상을 흩어냈다. 내달리는 괴수의 발길질에 성기사가 형체도 없이 짓뭉개지고, 틈을 노리고 달려든 검광과 화살이 그를 향해 쏘아져 왔다.
“돌격!”
김선혁이 갑작스레 돌격을 외치는 순간, 성벽처럼 일어서 있던 거대한 흙벽이 무너져 내리며 그 너머로 은빛 반짝이는 중갑을 차려입은 기병들이 뛰어들었다.
“아티야! 저들에게 힘을!”
‘네! 주인님!’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상큼한 음성이 들려오고, 그의 양손을 꽉 잡고 있던 바람의 처녀가 날아올랐다. 풍아와도 윈드 피어싱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바람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와 중갑 기병들을 감쌌다.
그 순간 이미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던 드레이크 기병대가 희끗한 섬광을 남기며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선두 충돌!”
일백의 창이 하나가 되어 적을 관통했다.
**
“아직도 소식이 없나!”
수많은 적군에게 요새가 포위되었을 때조차도 평정을 잃지 않았던 맹스크 사령관이 근래 들어 부쩍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로 모인 녹테인의 기병대가 22연대의 주둔지를 노리고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줄리앙.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제 주인을 따라 종자로 그곳에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탓이다.
이미 한 번 스스로의 고지식함으로 혈육을 잃은 바, 그 남은 핏줄마저도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마법 전문까지 사용해가며 22연대의 주둔지로 지원을 급파했다.
하지만 이미 흩어질 대로 흩어진 아군들이 얼마나 빨리 전장에 당도할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노사령관의 가슴은 꺼멓게 타들어갔다.
“22연대 주둔지 인근에 4개 중대 규모 적 기병대 확인!”
찾아오는 전령마다 좋은 소식을 가진 이가 하나도 없다.
“현재 22연대 주둔지에 주둔 중인 병력 보고! 보병 중대 둘! 중갑 기병대 하나! 그 외 민간이 다수입니다! 방어시설 미비, 기병대를 막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22연대 퇴각 포기!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하겠다는 마지막 보고를 끝으로 연락 두절!”
“교전 확인! 현재 해당 지역에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맹스크 사령관의 급한 마음을 아는 것인지, 내놓으면 깨질 새라 꽁꽁 숨겨두고 있던 인근 영주들의 마법사들까지 동원되어 전장을 관측하고 마법 전문을 보내오고 있었다.
“교전지에서 막대한 충격파 감지! 관측 마법사들의 소견으로는 최소한 상급 기사, 또는 상급 마법사 이상의 초인들이 격돌한 여파라고 합니다!”
한 번 주고받을 때마다 어지간한 남작령의 한 달 치 유지비가 나간다는 마법 전문이 시시각각 요새로 날아들었다.
“급봅니다!”
초조한 심정으로 지휘부를 떠나지 않고 소식을 기다리던 맹스크 사령관은 전령의 보고에 굳은 얼굴로 기다렸다.
“말하라.”
최소한의 품위만큼은 잊지 않은 그의 묵직한 음성에 전령이 황급히 상황을 보고했다.
“이틀 전 새벽 시간 기준, 22연대 주둔지 전투 종료되었습니다! 현재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순찰대를 급파했으며, 인근 주둔지의 협조를 구하고 있습니다!”
“마법 전문은!”
“안타깝게도 지난 연락을 마지막으로 영지 측에서 구비 중이던 연락석이 모두 소모되어, 현재로서는 그 어떤 보고도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마법 전문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변방의 영주들이 비싸디 비싼 연락석을 몇 개씩이나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사령관님!”
맹스크 사령관이 드물게 화를 내며 애꿎은 테이블만 두들기고 있는데, 참모가 뛰어들어왔다.
“22연대의 전령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지막까지 그를 지탱해주었던 인내심이 고갈되었다.
“생존자는! 줄리앙은 무사한가!”
전에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사령관의 음성에 잠시 움찔한 참모가 이내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22연대 주둔지 3일에 걸친 격전 끝에 방어 성공했습니다! 스콰이어 줄리앙 역시 무사합니다!”
“오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렇게 환한 웃음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환하게 웃는 사령관을 보며 참모가 보고를 이어갔다.
“적 격퇴되어 후퇴중입니다! 잔당 소탕을 위해 기병의 출진을 허락해주십시오!”
“그리하라! 단 한 필의 말도 국경을 넘을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박멸하라!”
하지만 기쁨도 잠시, 참모가 금세 굳어버린 얼굴로 아군의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2개 중대 보병 중 생존자 62명! 연대장 전사! 중대장 모두 전사!”
“아….”
소란을 듣고 몰려든 참모들이 처참한 피해 상황에 참담한 얼굴을 해보였다.
“드레이크 기병대 정원 94명! 전사 38, 부상 40! 드라흔 자작 현재 중상!”
“드라흔 자작까지?”
압도적인 적의 전력을 맞이해 싸웠으니, 피해가 적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반 기병도 아닌 무려 그라두스씩이나 받은 기사가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사령관이 신음을 내뱉었다.
“사제를 급파해라!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치유술에 능한 고위 사제를 급파해 부상자들을 돌보고 드라흔 자작의 상세를 호전시켜라!”
“이미 인근 영지에서 출발한 사제단이 22연대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중상자들 대부분이 치료를 받고 빠르게 회복중이랍니다. 하지만 드라흔 자작만큼은 현재 손도 못 대고 있는 상황이라 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사제들이 기껏 나서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치료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다는 말에 사령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필시 이 모든 승리 뒤에 그의 혁혁한 공이 있었을 터! 설마 사제들이 그의 출신을 핑계 삼아 차별을 둔 것인가!”
“아닙니다. 사제들 역시 드라흔 자작부터 치료하려고 했으나, 그게 불가능했답니다.”
“설마 손도 못 댈 정도의 중상인가.”
참모가 다시 고개를 젓고는 뒤늦게 설명을 덧붙였다.
“부상을 입은 드라흔 자작을 그의 드레이크가 가로막은 채, 그 어느 누구도 접근을 불허하고 있답니다. 이를 제압하고 치료를 강행하자니, 드레이크 역시 부상이 심해 손을 댈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