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우두머리의 소양 -->
사령관의 특권으로 중대장이 되었지만, 부대의 지휘관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김선혁은 라인펄 영지로 향하기 전에 먼저 지휘관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따로 교육받아야했다.
“아오! 말년에 다시 말뚝 박은 것도 짜증나는데 또 유격이야!”
그런데 그 교육이라는 게 하필이면 저쪽 세상의 유격 훈련과도 닮아 있었다. 그것도 교육을 받는 이들이 대부분 기사 서임을 받을 정도의 초인들이라 그에 맞춘 훈련의 강도는 끔찍할 정도로 고되고 가혹했다.
“난 기병인데 왜 보병들이나 받아야 할 훈련을...”
“지휘관이 꼭 한 가지 병과만 맡으라는 법 있습니까. 살다 보면 보병도 맡을 수 있고, 궁병도 맡을 수 있고, 보병도 많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기병은 말에서 안 떨어집니까. 평생 말 위에서 삽니까.”
바닥을 기고 구르다보니 하도 억울해 따져 물었다. 하지만 교관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젠장. 더러워서 내가 한다. 해.”
“우웩.”
앞서 가던 사내, 왕국의 동부 어딘가에서 왔다던 기사 하나가 노란 위액을 토해냈다.
“힘들면 말하십시오. 언제든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누가 포기한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퇴소 권유를 하는 교관에게 기사가 악에 받혀 빽 소리를 질렀다. 퇴소가 자유로운만큼 중도포기는 평생을 따라다닐 정도의 불명예였고, 어느 누구도 제 입으로 포기한다는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젠장. 젠장.”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척대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선혁이 욕설을 내뱉었다. 어지간한 평기사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체능력을 지녔건만, 힘에 부치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구보 한 바퀴 돌고 바로 전술 교육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나면 전술 교육이 시작되었다.
“기병 돌격의 핵심은 일반적으로 최대한의 속도와 중량을 이용한 충격 전술로 보병 방진의 와해를...”
이맘때 쯤 들려오는 전술 교육관의 고저 없는 음성이 세상에 다시없을 자장가나 다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부터 시작된 훈은 해가 지고 한참은 지나야 끝이 났고, 그 무렵이 되면 피로에 지친 육신은 끔찍한 수면 욕구에 시달리게 마련이었다.
“회전의 승리 조건은 누가 먼저 적의 측면을 잡느냐인데, 이때 이용되는 전술로는...”
맨 정신으로도 듣기 힘든 지루한 전술 이론을 듣고 있노라면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텨내면 그 다음에는 전술 교육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마법 식별 교육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개 화계(火系) 마법은 발현 직전에 예열 과정이 필요하며, 마법력이 충분히 모이기 전에 미리 징후를 발견할 수 있으므로 대비가 가능합니다. 이때 우리는 냉철하게 마법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하며, 필요에 따라 경중을 두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어야...”
마법 식별 교육도 끝이 나고서야 겨우 교육생들은 침상에 누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교육생들에게 허락된 수면시간은 불과 3시간이었고, 그 정도로는 피로를 풀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하루가 지날수록 훈련의 피로는 쌓여만 갔다.
“내가 왜 중대장 따위를 맡는다고 해서!”
동료들과 떨어지기 싫어 사령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게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영주로 자유롭게 살아가며 간간히 동료들과 만나면 그만인 것을, 사내들끼리 붙어있어 봐야 뭐 좋은 게 있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후회를 해봐야 이미 늦었고, 퇴소는 평생을 따라다닐 수치였다. 딱히 커리어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나이 자존심에 중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각오를 다졌지만, 마법 내성 교육을 받을 때만큼은 그도 정말이지 포기라는 말이 턱끝까지 올라오고야 말았다.
“지휘관은 언제나 마법의 최우선 저격 목표입니다. 직격당하면 소용없겠지만, 빗맞거나 운 좋게 마법을 견뎌냈을 때 지휘관은 휘하 부대를 돌볼 여력이 있어야 합니다.”
각종 마법처리가 된 밀실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교육생들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전격 마법에 직격 당했다. 강도를 조절한 탓에 죽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지가 경련하고 침이 질질 새어나오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으으으.”
김선혁은 용기병 특유의 마법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다른 교육생들과는 달리 마법의 충격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그도 쏟아지는 마법에 턱을 덜덜거리며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호오.”
마법 저항력 교육을 맡은 마법사가 그런 그를 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 뒤로 한참이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지옥 같았던 시간이 끝이 났다.
“물론 실전에서는 겪는 마법은 이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럽고 위력이 강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경험이 언젠가 경들의 목숨을 살리고 휘하 부대를 살릴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다양한 계열을 마법을 친히 교육생들에게 내리꽂은 마법사가 가증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야말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면상이었다.
하지만 교육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각자 검이나 방패를 이용해 마법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교육 받았다.
“합!”
누군가는 날아드는 불덩어리를 검으로 비껴냈고, 또 누군가는 방패로 섬광을 막아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김선혁은 처음으로 기사들의 검력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전장에서 보았을 때는 그저 번쩍거리는 검광처럼 보였을 뿐이었지만, 이렇게 여유를 갖고 지켜보니 검 자체가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발광(發光)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검날에 속성을 덧씌운 것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과연 동부의 사자! 검력이 아주 훌륭하오!”
기사들은 그것을 검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준비 됐으면, 말하십시오.”
자신의 차례가 된 김선혁은 다소 굳은 얼굴로 마법사의 손끝에 걸린 불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꽤나 먼 거리임에도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어쩐지 전의 교육생들에게 사용했던 것보다 위력이 강한 듯한 기분이었다.
“힘 조절을 잘못 하신 건 아닙니까. 조금 강한 거 같...”
“똑같습니다.”
짤막한 대답에 그가 와락 인상을 찌푸리니, 주변의 교육생들이 수군거렸다.
“쯧. 기사씩이나 돼서 저리 겁을 먹어서야...”
“애시당초 검을 제대로 만져본 적도 없는 이가 우리와 같이 훈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오. 차라리 일반 군사 교육 쪽으로 갔을 자가 이곳에 온 게 잘못이지.”
김선혁은 훈련소 내에서도 제법 유명한 편이었다. 그것도 그다지 좋지 않은 쪽으로 유명했다. 기사단도 아닌 일반 기병대를 상대로 공을 세워 기사 서임을 받은 이방인, 검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이방인, 그게 바로 그에 대한 평가였다.
“어디 폐하께서 직접 성을 하사하실 정도로 대단한 자인지,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봅시다.”
그간 잊고 있었던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새삼 다시 피부에 와 닿았다.
망할 놈들.
애초에 이곳에 모인 자들은 하나같이 왕가보다는 귀족들과 관계가 긴밀한 이들이었다. 스스로가 귀족이거나 귀족을 섬기는 기사들이니만큼 이방인을 우대하는 친왕가 쪽의 인사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그가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은연중에 오기가 생기는 것만큼은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99에 도달해 수발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워진 풍 속성이 양손으로 꽉 움켜쥔 창끝에 몰려들었다.
“준비 됐습니다.”
뾰족한 창날 끝에 매달린 희끄무레한 기운을 눈에 담으며 김선혁이 마법사에게 말했다.
“그럼 셋 하고 던질 테니, 조심하십시오. 하나, 둘, 셋.”
마법사의 손짓에 불덩어리가 불쑥 달려들었다.
이런 망할 놈. 뭐가 똑같아.
다른 이들에게 사용했던 것보다 최소한 한배 반은 더 강력한 열기,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창을 내질렀다.
“밀쳐내야지! 저걸 찌르기로!”
“멍청한 이방인!”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구경꾼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래도 충돌의 순간 폭발할 마법의 영향력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 순간 그가 내지른 창이 불덩어리를 관통했다.
“어?”
원래대로라면 이 마법적으로 만들어낸 불꽃은 꿰뚫리는 순간 충격을 받아 폭발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불꽃은 폭발해 사방으로 비산하는 대신 꿰뚫리고 찢겨져 창끝을 휘감고 맴 돌았을 뿐이다.
“저게 무슨...”
교육생들은 난생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에 입을 쩍 벌렸고, 마법을 시전한 마법사도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지금의 모습만 보아서는 김선혁이 날 대신 불꽃을 두른 창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앗뜨뜨!”
창끝에 불꽃을 매단 채 한참을 그가 창을 내던지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아오. 뜨거워.”
양손을 호호 불며 울상을 지어보이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지만, 교육생도 교관도 아무도 웃지 못했다.
**
그날 이후로 김선혁을 기본도 없는 이방인이라고 무시하는 교육생들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원이 기사라고 하나 이곳에 있는 교육생들은 하나같이 갓 서임을 받은 햇병아리들에 불과했다. 그들 중에 마법사의 공격 마법을 온전하게 파쇄시킬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명백하게 격차가 드러난 것이다.
하기야 왕실 수호대의 수장이자 왕국에서 이름난 검호, 레인하르트 후작은 김선혁을 가리켜 선임 기사 정도의 실력은 있는 자라 말했다. 그리고 선임기사는 여기 모인 교육생들이 한참을 더 고련해야 이를 수 있는 경지였다.
애초에 김선혁과 이들 사이에는 당장 극복할 수 없는 실력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입방아를 찧어대다가 직접 눈으로 그 실력을 목도하고 나니, 햇병아리 기사들이 감히 그에게 이죽거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김선혁은 더 이상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없이 16주 간의 교육을 무사히 이수할 수 있었다.
[레벨업 했습니다.]
교육이 얼마나 고되고 강도가 높았는지, 한동안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던 레벨마저 한 단계 상승할 정도였다.
훈련장 인근에 풀어두었던 골드레이크를 다시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잠시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교육은 끝이 났고 김선혁은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
김선혁은 24연대 주둔지가 아닌 라인펄 영지로 향해야 했다. 어차피 자신이 교육을 받는 동안 클라크의 주도 하에 근거지를 이주하기로 했던지라, 24연대로 향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훈련장을 나서기가 무섭게 기다리고 있던 줄리앙이 그를 맞아주었다. 줄리앙은 능숙하게 그의 짐을 옮겨 받고는 제 말에 실었는데, 그 태도가 너무도 자연스러워 그는 무심코 그녀가 하는 양만 지켜보고 말았다.
“기다린 거야?”
“네.”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중간에 퇴소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 안 했어?”
어린 소녀 혼자 오기에는 꽤나 먼 거리, 그가 황당한 얼굴로 물으니 줄리앙이 무감정한 어투로 대꾸했다.
“중간에 포기하실 리 없다 생각했습니다.”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게 마냥 나쁜 기분만은 아니라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가자.”
“안내하겠습니다.”
줄리앙의 안내를 받으며 김선혁은 귀환길에 올랐다.
========== 작품 후기 ==========
*염려해주신 여러 독자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조언 받자와 정 힘들다 싶으면 연재 속도를 조금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잠도 최대한 잘 챙겨서 자보도록 하겠습니다. 찡긋.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싸랑입미다. 찡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