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초고속 승진 -->
“결정했습니다.”
영지 후보들을 둘러보고 돌아온 김선혁은 곧장 사령관을 찾았다.
“너무 성급한 건 아닌가.”
사령관은 오고 가는 시간을 빼고는 숙고의 시간이 과히 없었다 해도 좋을 정도로 빠른 결정에 우려를 표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성급한지는 모르겠지만, 잘못된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부귀영화를 바란 것도 아니고 영지에서 영주놀음을 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하게 살아갈 제 땅과 약간의 돈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거기에 더해 용기병으로서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결정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래. 애초에 봉토라는 게 저마다 다 인연이 있는 법이지. 하고 많은 땅 중에 하필이면 그곳이 자네의 마음에 든 것은 다 그리 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게야.”
사령관도 더 권하지는 않았다.
“준비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을 걸세. 자리를 잡기까지는 꽤나 신경이 쓰일 테지. 하지만 봉토를 갖는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네.”
영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줄리앙을 통해 전달하겠다는 사령관을 보며, 김선혁이 뒤늦게 항의했다.
“그 줄리앙이라는 친구는 대체 뭡니까. 안내역으로 그런 어린 아이, 그것도 여자 아이를 붙여주시다니...”
“그래서 줄리앙이 짐이 되었든가.”
그건 아니었다. 줄리앙은 분명 꽤나 능숙한 기병이었고, 좋은 안내인이었다. 거기에 더해 영지에 대한 해박한 지식까지 있으니 적잖게 도움이 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럼 뭐가 문젠가. 안내역으로 붙여준 친구가 아이면 어떻고, 노인이면 어떤가. 그저 제 할 일만 잘 하면 그만인 것을.”
역시나 돌려서 항의를 하는 것으로는 이 능구렁이 같은 사령관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백기를 든 김선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그 아이가 사령관님께서 추천하려 하셨던 그 종자입니까?”
사령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긍정과 같은 대답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줄리앙을 종자로 추천하려던 이유를 물었다.
“공적으로는 기사로서나 신임 영주로서나 그 아이만큼 자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가 없다 여겼고, 개인적으로는 재능이 있는 아이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좌절하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이네.”
솔직할 때는 또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사령관다운 대답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부탁하네. 그 아이를 종자로 써주지 않겠나?”
하지만 단지 줄리앙이 겪는 개인적인 고충을 배려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사령관의 태도가 지나치게 간곡했다. 그래서 그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그 아이가 사령관님 같은 분께서 그렇게 신경을 써야 할 정도 중요한 아이입니까.”
“세상에 핏줄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없네. 그것이 나같은 노인이라면 더더욱.”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순간적으로 얼빠진 얼굴을 해보였던 김선혁은 뒤늦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줄리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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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의 말처럼 새로운 영지를 봉토로 받는다는 것은 꽤나 복잡한 일이었다. 작게는 영지를 상징할 문장을 구상해야 했고, 크게는 영지 전반에 대한 정보와 주변과의 관계를 숙지해야 했다.
“지금은 이렇다 할 이름도 없어 일대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이름을 따 라인펄이라 마을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줄리앙의 설명은 마치 유능한 관료라도 되는 것처럼 유창하기만 했다. 어린 소녀가 알기에는 과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 하지만 그녀의 박식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김선혁은 더없이 귀족적인 줄리앙의 얼굴을 보며 새삼 사령관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줄리앙 로이엔 맹스크. 그 아이가 제 어미의 성을 따르기 전까지의 이름일세.’
‘그 말씀은...’
‘줄리앙은 내 손녀라네.’
‘그런데 귀한 손녀를 굳이 왜 저 같은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부득불 종자로 보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6년 전에 줄리앙의 아비가 사스테인 놈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네. 그 아이는 아비의 죽음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6년 전의 전쟁에서 줄리앙의 아버지이자 사령관의 아들이 이끄는 보병대가 적 부대에게 포위를 당한 적이 있었다. 비보를 들었으나 당시에 서부 전체 걸쳐 형성된 전선이 워낙에 위급하여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었고, 사령관은 제 아들을 구원하는 대신 가장 급박한 전장으로 정예 기병대를 출진시켰다. 줄리앙의 아버지는 구원을 기다리며 결사적으로 항전하다 끝내 사스테인 기병단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비를 잃은 줄리앙의 비탄과 절망은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서부군의 총사령관일세. 사사로운 정에 휩쓸려 우선순위를 바꿀 수는 없었지. 설령 그 아이가 나를 냉혈한이라고 욕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모진 비바람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았던 거목이 처음으로 인간적인 고뇌를 내비쳤다.
‘못나게도 직급을 내세워 그 아이를 곁에 두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염치가 없어졌네. 이 맹스크는 그 아이가 자라기에는 토양이 그리 좋지 않은 땅이니까.’
김선혁은 왜 사령관이 사스테인의 섬멸에 대한 대가로 금쪽같은 봉토를 내리겠노라 말한 것인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령관은 당시 자신이 하지 못했던 사스테인에 대한 복수를 이루어준 그에게 나름대로 감사를 표한 것이다.
‘그러니 부탁하네. 다른 귀족들은 안 되네. 오직 자네여야만 돼. 다른 귀족들은 줄리앙의 능력보다 그 아이가 지닌 배경을 더욱 중히 여길 것이고, 결국은 화병에 꽂아 장식품으로만 취급하려 할 테니까.’
‘저는 일개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이방인이기에 이런 부탁을 하는 거네. 자네들은 능력이 있는 자에 한해서만큼은 성별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들었네. 그 아이가 제 능력을 꽃피우려면 자네밖에 대안이 없네. 그러니 내 이렇게 부탁하네. 부디 그 아이를...’
“...작님. 자작님!”
사령관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던 김선혁은 앙칼진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아, 어디까지 했지?”
“라인펄 영지의 가호(家戶)와 수확량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설명해드릴까요.”
똑 부러지는 줄리앙의 대꾸에 그는 잡념을 털어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들 따위 아무려면 어떤가. 사령관이 무능한 짐덩이를 떠넘긴 것도 아니고, 손녀와의 화해를 주선해달라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사령관의 부탁은 분명 그가 수용 가능한 범위의 것이었다.
‘부탁하네. 언제든 자네에게 이번 일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리라 약속하네.’
게다가 왕국의 수호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서부군의 총사령관이 합당한 보상을 약속했으니, 그로서는 줄리앙의 출신이 어떻든 간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유능한 인재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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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약식으로 봉토 하사 절차를 밟았고, 김선혁은 이제 드라흔이라는 성 외에도 라인펄이라는 성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조합도 어감도 엉망인 이름이었지만, 그 자체로 어엿한 귀족의 증명이자 권위의 상징이었으니 받아들여야 했다.
“자작에 오른 이방인들은 있으나 그중 영지를 얻은 것은 그대가 처음이군. 영주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사령관을 비롯한 맹스크 요새의 주요 인사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자네의 소속뿐이군. 자네는 여전히 동료들과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겠지?”
“네.”
사령관의 질문에 김선혁은 짧게 대답했다.
“이제는 내가 마지막 약속을 지킬 차례군.”
사령관은 웃음기를 거둔 엄숙한 얼굴로 그에게 자세를 바로 하라 말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정자세를 취하자, 사령관이 말했다.
“아데스덴 왕실이 부여한 서부군 총사령관의 권리로 드라흔 자작을 드레이크 기병대의 중대장으로 임명한다. 또한 앞으로 드레이크 기병대는 제 24 주둔지가 아닌 라인펄 영지를 근거지로 할 것이며, 모든 관리와 인사권을 신임 중대장에게 위임한다. 드라흔 자작은 이에 동의하는가.”
“네. 동의합니다.”
“충성스러운 왕국의 군인답게 자작은 앞으로 왕실의 부름에 충실할 것이며, 외세의 침범 앞에 초개와 같을지어다.”
“명심하겠습니다.”
엄숙하게 선언한 사령관이 금세 웃는 낯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렇게 김선혁은 드레이크 기병대의 대장이 되었다.
**
“이야. 정말 니가 우리 대장이 된 거네?”
“앞으로 우리도 슬슬 말투를 고쳐야겠군. 이제는 정말로 선혁이가 우리 상급자니까.”
“그럴 것까지야 있나요. 지금처럼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주의하면 될 텐데.”
축하를 건네는 한센과 요나슨의 말에 김선혁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들도 굽히지 않았으니, 앞으로는 빼도박도 못하고 저들의 상관 행세를 하게 생겼다.
“딱, 이번 휴가까지만. 우리도 당장 고치기에는 어색하잖아.”
한센이 엄살을 피웠고, 김선혁은 아무래도 상관없노라 대답했다. 그로서는 자신을 온전한 기병으로 만들어준 이들에게까지 제 권위를 내세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
“그럼 이제 이 아저씨들도 그...”
“드라흔 자작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끼어든 엠마가 호칭에 난색을 표하자 요나슨이 지적해주었다.
“드라흔 자작님의 영지에 머물게 되는 건가요?”
자작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긍정을 표해주었다.
“언제쯤?”
“아무래도 준비가 필요하겠지. 그냥 보병도 아니고 1백이나 되는 기병들이 머물러야 하는데, 우리는 막사에서 지낸다고 해도 말들은 제대로 된 집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요나슨의 대답에 그녀가 뭔가 결심한 얼굴을 해보였다.
“너, 설마...”
“왜요? 안 돼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김선혁이 멀뚱멀뚱 눈만 꿈뻑거리자 엠마가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드라흔 자작님. 아니 영주님. 저와 아이들이 영주님의 영지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가 무의식중에 한센과 요나슨을 바라보니, 두 사내가 대답대신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
“축하하네. 신임 중대장.”
이미 소식을 들은 것인지 24연대의 연대장은 주둔지 밖까지 나와 김선혁을 맞아주었다.
“이제는 자네가 내 후임이 되는 건가. 뭐, 나쁘지는 않군. 자네라면 나도 걱정없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으니.”
느끼기에 따라 자신이 밀려난 것이라 생각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프레드릭 중대장은 스스럼없이 사령관의 결정을 따르겠노라 말했다. 아무래도 상급 기사라는 직함이 있는 이상 자신의 소속따위야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 왜 나와있지?”
두 지휘관과 간단한 대화를 마친 김선혁은 곧장 기병대원들이 있는 막사로 향했다. 그런데 막사로 가기도 전에 정복을 차려입고 도열한 기병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클라크?”
“전 기병대원!”
클라크를 발견한 그가 반가운 얼굴을 해보이는데, 클라크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신임 중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클라크의 구령에 맞춰 1백에 가까운 기병들이 흉갑을 두들겨 보이며 발을 굴렀다.
“앞으로!”
“아...”
예상치 못한 대우에 김선혁이 얼떨떨한 얼굴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중대장님. 취임사라도 한 마디 하시지요.”
클라크는 그전까지의 관계는 이미 잊은 듯한 칼 같은 태도를 해보였다.
“내가 무슨 취임사를...”
“중대장님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없으시단다! 그럼 우리가 대신 해드려야지!”
기다렸다는 듯이 기병대원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중대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드레이크 나이트를 환영합니다!”
“앞으로 중대장님 뒤만 보고 따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일사분란했던 외침이 나중에 가서는 정신 사나운 환호가 되었다.
“와! 멋있다! 신임 중대장님 최고다!”
“클라크. 한센. 요나슨...”
어느새 기병대원들 틈에 파고들어 장난스레 환호를 외치는 동료들을 본 김선혁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끙. 늦잠 잤습니다. 아무래도 하루 두번 쪼개서 두시간씩 자다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ㅜㅜ
*인기투표 집계와 당첨자 발표는 다음 자정 연재본으로 연기하겠습니다. 집계하고 추첨하다가 오늘 새벽 다 지날 거 같아서 우선 연재부터...
*추천과 코멘트로 지친 글쟁이에게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