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24화 (24/305)

<-- 12. 전장의 여인들 -->

예상하지 못했던 관심에 당황하면서도 김선혁은 엠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몇 마디 말이라도 더 건네올 것 같았던 그녀는 말간 눈으로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그녀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관심이 아닌 무시,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전시라 술은 안 될 테고, 뭘로 할 거예요?”

“엠마만 눈 감아주면 술도 나쁘지는... 아, 농담이야. 농담!”

당장에라도 문을 박차고 나설 듯 시늉을 하는 엠마의 몸짓에 지레 놀란 요나슨이 재깍 주문을 했다. 가만히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김선혁이 그녀가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 곧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근데 여기 그냥 평범한 술집 같네요.”

“평범하지는 않지. 엠마처럼 이쁜 아가씨가 주문을 받는데, 이 정도면 엄청 특별한 거 아니야? 혹시 다른 거 기대했어? 만약 그런 거면 내가 저녁에 따로 데려가줄 수도 있지.”

언제 일어난 것인지 홀에 자빠져 있던 한센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좀 의외라...”

성질 드센 기병들이 의외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니, 그렇게 낮설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묻자 한센이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 술집뿐이 아니라. 요새에 있는 식당이나 술집, 시설들 대부분이 전사한 병사들의 유족이다. 말하자면 우리하고 아예 남도 아니지.”

“아...”

아무래도 전쟁에 휘말린 민간인들 중에 살아남은 이들이 이렇게 요새에서 생업을 이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이 가게는 특별해. 엠마를 요새로 데려온 게 우리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3조의 여동생 같은 존재랄까?”

“여기 이 테이블도 저기 저 그릇들도, 전부 우리가 폐허 속에서 뒤져서 가져온 것들이지.”

이 정 많은 사내들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투박한 가운데 따뜻하기만 한 속정이 여실하게 느껴져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본 기병대원들이 괜히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는데, 홀 뒤로 사라졌던 엠마가 나서서 말했다.

“그래. 그래서 그 여동생 같은 애한테 그딴 농담이나 해요?”

막내를 품어주라는 둥 헛소리를 해대던 한센을 겨냥한 말인 듯했다.

“저 새끼는 실제로 지 친 누이한테도 그딴 농담을 하니는 골 빈 놈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한센이 누나도 있었어요?”

“있지. 그것도 아주 제 놈이랑 빼다 박은 누나가.”

“저런...”

앞니 빠진 얼굴로 히죽히죽 웃어대는 한센을 본 김선혁이 끔찍한 상상을 하고는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탄식에 한센이 버럭 화를 내는데 엠마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한마디를 툭, 하고 내뱉었다.

“조금 다르네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가만히 눈만 굴리고 있자니, 다른 기병들이 대꾸했다.

“다른 놈들이랑 똑같이 생각하지 마. 저렇게 비리비리 해 보여도, 진짜 사내다. 우리들 중에 저놈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놈은 없어.”

“흥. 그래봐야 그 스킬인지 뭔지...”

“아니. 저놈은 그런 거 몰라. 제 힘으로 말에서 수백 번 떨어져가면서 기초부터 배운 놈이야. 그러니 엠마가 다른 이방인들에게 감정이 안 좋은 건 알겠는데, 이놈까지 그렇게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요나슨의 진지한 어투에 엠마가 그러냐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그 사이 그녀가 내온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기병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각자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계산할 준비를 했다.

“어?”

음식 값을 치르는 줄 알았더니, 그들이 주머니 채로 테이블 위에 올려두는 게 아닌가.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 싶어 물으려는데 홀 너머에서 엠마가 나타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 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크. 도망치자!”

고래고래 고함치는 엠마를 내버려두고 사내들이 낄낄대며 도망치듯 술집을 나섰다.

“가져가라고!”

“우리가 돈 쓸 때가 어디있어! 그냥 그걸로 애들이나 챙겨주라고! 애들 고생시켜지 말고!”

“야이! 헤픈 놈들아! 니들이 지금 남 걱정 할 때냐! 어디서 죽어 나자빠질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갈 때 챙겨갈 것도 아닌데, 엠마가 돈 쓰는 것 좀 도와달라고!”

오고가는 말이 거칠고 투박했지만 서로에 대한 염려와 진심만큼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멋도 모르고 기병들을 따라 달리면서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쩌지. 이 사람들이 자꾸 좋아지는데.

신이 나서 뛰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마치, 초인종 누르고 도망가는 어린아이 같아 그는 다시 한 번 또 웃었다.

**

미묘하게 자신을 적대하던 엠마의 태도, 그 이유를 김선혁은 곧 알게 되었다.

“근래 들어 실전에 투입됐던 이방인들이 제 몫을 제대로 못 하는 바람에, 전선에서 몇 번 크게 피해를 봤다더군. 아무래도 이방인들은 능력에 비해 정신력이 지나치게 나약하니까.”

아무래도 자신보다 먼저 실전에 투입됐던 이방인들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게 전장에 섰던 이방인들이 동료의 발목을 붙잡는 바람에 피해가 꽤나 생겼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현장에서는 그런 짐덩이들을 배제하려 했지만, 왕실에서 고집을 피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란다.

미래를 향한 투자니 뭐니 이방인들을 향한 후원과 지원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왕실 탓에 죽어나가는 건 전선의 병사들 뿐, 급기야 병사들이 검은 머리만 보면 이를 갈아댈 지경이 된 것이다.

“너도 아마 투구 안 쓰고 들어왔으면, 그 정도 환대 못 받았을 걸.”

“끄응.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하기야 능력 있는 이방인들은 중앙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능력이 부족한 이방인들이 죄 국경에 몰려서 실전 경험이라는 명목 하에 민폐만 끼치고 있으니 이방인들에 대한 인식이 좋을 턱이 없었다.

“근데 그 이방인들은 어떻게 됐데요?”

“3분의 1은 전사. 그리고 3분의 1은 폐인. 나머지 3분의 1만이 그나마 사람 같은 꼴이라더군.”

벌써 전사자가 나오고 폐인이 생겨났다는 말에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저쪽 세상에서 함께 넘어왔다는 정이 있어 영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턱.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김선혁은 제 어깨를 짚는 투박한 손길에 고개를 들렸다. 말없이 그저 신뢰의 눈빛만 보내오는 클라크와 기병대원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저들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어.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 오지랖을 떨기에는 아직 본신의 능력이 부족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그가 애써 웃는 얼굴을 해보였다.

**

요새는 평화로웠지만, 성벽 너머의 세상까지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국지전이 벌어졌고, 녹테인 왕국과 아덴버그 왕국은 소득 없는 소모전을 이어갔다. 김선혁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당장 두 국가가 전력을 다 해 들이받을 듯 살벌한 상황, 하지만 의외로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이러다가 대충 정리 되겠는데?”

“전면전은 진짜 같이 죽자는 거니까. 녹테인 애새끼들이 아무리 전쟁광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

그들은 이런 소소한 국지전 정도는 해마다 있는 일이라며, 잠시나마 3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집결했다 하여 대응에 나섰을 뿐이라 말했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의 주민들이 그렇다는데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이대로 잠시 상황을 지켜보다 주둔지로 돌아가게 될 거라며 클라크가 중대장의 말을 전해왔다. 이제는 살아남는 게 아니라 어설픈 전공으로 왕실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걱정해야 할 판국, 김선혁은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해결이 되었다.

“국경 순찰대의 말에 의하면 2개 중대 규모의 기병대가 넘어온 흔적이 발견됐다는군. 아마도 사스테인 놈들이겠지, 국경을 제 집처럼 들락날락 거리는 미친놈들은 그놈들밖에 없으니까.”

중대장은 그렇게 넘어온 사스테인 기병단의 행적이 묘연하며, 인근 마을을 습격할 징후도 보이지 않노라 말했다.

“필시 놈들이 노리는 건 복수일 것이다.”

“그 말은?”

“놈들의 목표가 우리라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하나 때문에 저놈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까요.”

설마 하는 기색이 역력한 클라크의 반문에 프레드릭 중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껏 단일 부대간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놈들이 압도적으로 패배하여 부대를 잃었다. 놈들은 아마 분해서 잠도 못 자고 있을 거다.”

“제 놈들은 이제껏 그렇게 많은 부대들을...”

“그래서 더욱 화가 났겠지. 그런 자부심이 깨졌으니까.”

중대장의 말은 짐작은 사실로 드러났다. 사스테인 기병단이 24연대 중갑 기병대를 전멸시키겠다고 공언을 했다는 정보가 입수된 것이다.

“이대로 요새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사스테인 놈들이라고 해도 무한정 적진을 누비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국경 마을들의 피해가...”

“만약 필요하다면 감수해야지. 사스테인 놈들을 꺾은 아군 기병대의 명성은 전선에서 더없이 크다. 병사들은 더 이상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우리는 실리만 챙기면 그만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사스테인의 잔당을 제거해달라고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사령관의 태도, 기병대 전원이 발끈해서 외쳤다.

“지금 사스테인 놈들이 무서워 꽁꽁 숨어 있으라는 말입니까? 그것도 민간인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클라크가 중대장 대신 나서서 억눌린 음성으로 물으니, 사령관이 대꾸했다.

“만약 원한다면 그렇게 조치를 해주겠다는 거지. 그런데 자네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보이는군. 내가 제대로 본 건가?”

기병대원들은 말이 아닌 결의어린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좋아. 자네들의 뜻은 알겠어. 하지만 그 전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지. 만약 붙는다면 다시 이길 자신은 있나? 저들은 벌써 몇 개나 되는 기병대를 잡아먹은 악마들이야. 그런 악마들이 자네들을 잡겠다고 결사의 각오로 국경을 넘었네. 그런 그들을 맞아 이길 자신은 있는가?”

사령관의 질문에 기병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렇게 시선이 향한 곳이 실로 의외였다.

직책상 최상급자인 중대장도 아니고, 실질적인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조장 클라크도 아니다. 그들의 시선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김선혁을 향해 있었다.

사령관이 눈에 이채를 띄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이 거친 사내들을 사로잡은 이방인의 존재가 꽤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지난 며칠간 얻은 소득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있다는 건가?”

다른 대원들을 두고 막내에 불과한 자신이 나서도 되는 것일까, 망설이던 김선혁의 입이 한참 만에 열렸다.

“머릿수만 맞춰 주시면,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뭐? 지지는 않아?”

김선혁의 대답에 사령관이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독이 오른 사스테인 놈들을 상대로 그런 자신감이라니! 하지만 실적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군.”

기꺼운 얼굴을 한 사령관이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는 웃음기를 채 거두지 않은 얼굴로 요새의 수뇌부를 소집해 전략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 자네는 나가지 말고 있게. 아무래도 자네가 승리의 핵심인 것 같거든.”

그렇게 들어선 이들이 하나같이 중대장급의 핵심 지휘관들이라 다른 기병대원들과 함께 자리를 뜨려던 김선혁은 사령관의 음성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일개 기병이 지휘관들의 회의에 참석한 것은 그야말로 이례적인 상황, 이번에는 중대장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전공 보고를 했더니, 위에서 난리가 났어. 아마도 자네는 생각 이상으로 큰 대가를 받게 될 거야. 어쩌면 그중에 장교의 자리가 있을지 누가 알겠나. 그러니 이런 자리를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것은 예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리 만들겠다는 확신이었다. 사령관의 흐뭇한 얼굴을 보며 김선혁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골치 아픈 양반의 마음에 든 모양인데.

하지만 그가 고민에 빠져들거나 말거나, 회의는 시작되었고 요새의 수뇌부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병력을 너무 크게 잡으면, 적들이 아예 몸을 빼는 수가 있습니다. 오늘 같은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야...”

“그렇다고 병력을 너무 짜게 보냈다가는 괜히 아군의 피해만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상대는 기병대를 수십이나 잡아먹은 사스테인이란 말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사스테인을 놓칠 겁니까? 피해가 얼마가 되든 간에 놈들은 꼭 잡아야 합니다!”

갑론을박,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원 병력의 규모였다. 너무 많은 병력을 붙여주자니, 사스테인이 몸을 사릴까봐 걱정이고 그렇다고 너무 적은 병력을 붙여주자니 안심이 되지를 않은 것이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사령관이 제시했다.

“귀관들의 생각은 잘 알았다. 나 역시 그러한 점에 대해 각고의 고민을 한 바, 운 좋게도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낯선 인물이 들어섰다.

“양을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없다면, 질을 높이면 그만이지.”

그런데 그렇게 들어선 이의 머리가 검은 머리였다.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래곤 푸어 김선혁, 에서 이름이 빠진 드래곤 푸어로 제목 수정했습니다.

*이벤트는 딱 요번 편까지입니다. 다음편에 요번 편까지의 댓글 추첨하여 후기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천과 선작 코멘트는 글쟁이의 가장 큰 힘입니다.

*설정상 김선혁이 떨어진 이계에는 검은 머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암갈색을 비롯해 근접한 머리는 있을 수 있지만, 순수한 흑발은 이방인들만이 유일하다는 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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