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23화 (23/305)

<-- 12. 전장의 여인들 -->

“그렇게 프레드릭을 노려볼 것 없네. 24연대라면 몇 번이나 함께 전장을 다녔던 나일세.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병대라는데는 이견이 없지만 사스테인과 정면 승부를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지나치게 뛰어난 전공이 도리어 화가 되어 사령관의 의심을 산 모양이다.

“자네의 우려가 왕실의 관심이라면, 자신 있게 단언하지. 나 역시 자네 같은 인재가 전선에서 물러나 중앙에서 아귀다툼이나 하는 꼴은 보고 싶지가 않네. 그러니 행여라도 이번 일이 새어 나갈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일세.”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고는 표정을 다잡았다. 결국 비밀을 공유하는 이가 하나가 더 늘게 되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전공을 나누어 먹을 이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마저 실리는 자신에게 있으니, 저쪽에서야 몇 명이 공을 나누든지 간에 손해 보는 것은 없었다.

“약속 꼭 지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그가 원하는 때까지 비밀이 유지된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였다. 그는 프레드릭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덧붙였다.

“당돌한 친구군. 일개 기병이 나에게 이렇게 대담하게 뭔가를 요구한 적은 없었지.”

“이 친구가 이방인인데다가 늘 주둔지에만 처박혀 있으니, 세상 물정을 모릅니다. 제가 차후 따로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딱히 탓하려던 게 아니야. 최전방을 전전하는 군인으로서 저 정도의 패기는 있어야지. 중앙에서 쓸 만한 놈들을 전부 쓸어간 탓인지 국경에 있는 놈들은 죄다 샌님 같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네.”

자신을 앞에 두고 멋대로 품평하는 사령관과 중대장을 보며 김선혁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척 보니 사령관은 인재를 중앙에서 독식하는 현 상황이 몹시도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 역력했다. 잘만 이야기 하면 중대장에게 받아낸 약속 이상을 대가로 받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중대장과 거래를 했다더군. 나는 거기에 한 가지 제안을 더 할 생각이야.”

한참을 중대장과 주거니 받거니 요즘 젊은이들 어쩌구 하며 떠들어대던 사령관이 뒤늦게 용건을 꺼냈다.

“남은 사스테인 놈들을 처리해주게. 할 수 있겠나?”

가능성 여부를 떠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사스테인의 악명이 드높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그 한 번의 승리가 당장 자신과 왕실의 관계를 청산할 정도의 공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던 탓이다.

“달리 사령관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덜컥 사령관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상대의 의중을 떠보았다.

“승리. 사스테인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일세.”

이런저런 계산이 쏙 빠진 담백한 대답이 너무나 의외라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니,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군인이 승리를 원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명예도 전공도 필요하지 않아. 10년 넘게 이 분에 넘치는 자리를 지켜왔으면 할 만큼 한 게지. 그러니 그 모든 영광은 자네가 취하도록 하게.”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실리적인 것들 뿐입니다.”

중대장과 이미 그렇게 계약을 했다. 모든 승리의 영광을 중대장 이름으로 달아두는 대신, 전리품과 그로 인해 생겨난 이익은 자신이 취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빚의 청산과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한 두둑한 자금 정도였다.

그런데 사령관은 그로서는 께름칙하기만 한 영광마저 가져가라 한다. 그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저 친구에게 얘기를 들었지만,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건 진정한 군인의 자세가 아니야. 내가 몰랐으면 모르되, 알게 된 이상 그런 꼴은 죽어도 못 보네.”

하지만 사령관은 처음의 만남과는 달리 꽤나 강직한 사내였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는 중대장을 보고 있자니 사령관이 말했다.

“어차피 저 친구에게 필요한 건 승급에 필요한 약간의 공과 명성이지. 그런 정도라면 내 선에서 처리할 수도 있는 문제들이라네. 게다가 나는 내가 아끼는 친구가 부하의 전공을 가로채고 부정하게 상급 기사에 오르기를 바라는 걸 바라지 않아.”

그야말로 흠 잡을 데 없는 정론, 그 속에 프레드릭을 향한 따끔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자네의 전공을 있는 그대로 보고할 생각이네. 사스테인 놈들의 후미를 무너뜨리고 십 수 명의 적을 도살했다지? 아주 보기 드문 활약이었네. 그 정도면 능히 훈작사의 작위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왕실에서...”

왕실의 관심은 피해야 했다. 현대인으로 나고 자란 그에게 충성이란 그다지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이기도 했고, 하물며 자신의 세계도 아닌 이 생소한 왕국의 왕실에 대한 봉사와 헌신이라니 더더욱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이 전쟁이 끝났을 때 즈음이면 자네는 자네가 왕실에게 진 빚을 모두 탕감할 수 있을 거야. 사스테인의 이름값이면 오히려 차고도 남을 걸세. 만약 원한다면 왕실에 대한 빚 없이 온전하게 장교의 길을 시작할 수도 있겠지. 어떤 쪽이든 지금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를 걸세.”

김선혁은 다시 한 번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사령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던 탓이다.

사리사욕이 없다 하여 다른 욕심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령관은 왕국의 국경을 받쳐줄 유능한 군인을 잃고 싶지 않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를 탐내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자네가 내 제안대로 사스테인의 이름을 완벽하게 지워버렸을 때나 가능한 것이지. 하지만 나는 자네가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네. 그 정도의 능력이 있으니, 저 까탈스러운 친구가 되도 않을 거래라는 이름으로 자네를 휘하에 두려고 하지 않았겠나.”

저런 감언이설을 곧이곧대로 들었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령관의 계획에 휘말려들고 만다. 그 사실을 알기에 그는 귀를 딱 닫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챙기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얻는 것은 뭡니까?”

**

사령관은 먼저 자리를 떴다. 자신이 있어서야 병사들이 제대로 놀지 못할 게 뻔하다며 먼저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상관의 모습, 김선혁은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진정으로 사령관을 따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저쪽 세상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이방인이었고, 그런 그에게 저 군인의 귀감과도 같은 사내는 영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였을 뿐이다.

“그래도 얻을 건 다 얻었으니...”

거래의 주체가 중대장보다 몇 끗발은 높은 사령관으로 바뀌니 그가 얻을 수 있는 것도 무진장 많아졌다. 그 과정에 명예라는 그다지 바라지 않는 것이 달려오게 되었지만, 어차피 일이 그렇게 흘러갈 거라면 억지로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말단 기병으로 전역을 하든, 훈작사로 전역을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너 사령관님이랑 엄청 오래 대화하더라?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

자리로 돌아온 그에게 기병대원들이 달려와 물었다. 벌써부터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꽤나 술을 들이 부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 사람들도 보통은 아니야.

저쪽 세상으로 치자면 사단장이 주최한 술자리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랬다고 정말로 술을 벌컥 벌컥 마신 꼴이니 그 패기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냥 이번 공으로 위에서 훈작사라는 작위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네요. 그렇게 되면 내가 조장보다 높아질 텐데. 이걸 어쩌나.”

그 분위기에 금세 흠뻑 젖어 되도 않을 농담을 하니, 기병들이 피식 웃었다.

“그럴 일 없단다. 이 세상물정 모르는 꼬맹아.”

확신에 찬 대답에 그가 이유를 물으니, 요나슨이 대답했다.

“너 일반 평민이 저 비싼 전마를 자비로 구입하고 유지한다는 게 가능할 거 같아?”

“그, 그럼...”

“훈작사 작위라면 진즉부터 있었단다. 이 멍청한 놈아.”

뜨악한 얼굴을 한 그에게 기병들이 낄낄댔다. 자신들은 전부 말단이라고는 하지만 귀족가의 자제들이고 작위 계승권이 없다 뿐이라 말했다.

“말도 안 돼!”

고상하고 뭔가 기품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귀족에 대한 환상이 완벽하게 무너진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니, 기병대원들이 뒤통수며 등판이며를 마구 후려쳐댔다.

“우리가 귀족가 출신인 게 뭐가 이상해!”

앞니가 텅 비어버린 한센이 그렇게 묻는 것을 보며 김선혁이 저도 모르게 항의했다.

“한센이 제일 이상하다고!”

**

술자리는 금세 끝이 났다. 꽤나 술을 퍼마시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최전방의 요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는지 대원들 중 만취한 이는 없었다.

그중에서도 전에 주사를 부린 탓에 눈을 부라리는 기병들의 감시 속에서 단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한 김선혁의 정신은 더없이 명료하기만 했다.

“아오. 한 모금도 못 먹게 하냐.”

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스스로도 할 말이 없었다.

“저 양반들은 벌써 잠들었네.”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며 금세 잠이 든 사내들을 본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본인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첫날은 힘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지만, 오늘도 그런 행운을 바랄 수는 없었다.

“으으...”

그는 눈을 감기가 무섭게 선명하게 떠오르는 전장의 기억에 신음했다. 악귀처럼 들러붙는 사자의 원망 속에서 그는 그렇게 시달리고 또 시달렸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게 이 세상의 법칙이라네요.

죄책감에 사과를 해보았지만, 이미 죽어 흩어진 자들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그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고 침범해오는 악몽에 저항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기로 작정한 이상, 어차피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렇게 밤을 버텨냈다.

**

날이 밝기가 무섭게 기병대원들은 제 말을 챙긴답시고 부산을 떨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김선혁 역시 그들을 따라 요새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속성의 힘을 통해 억지로 활력을 불어넣은 부작용인지 말들 역시 한동안 축 쳐져 있었는데, 오늘은 또 활기가 넘치는 것을 보니 말이나 사람이나 이제야 겨우 피로를 털어낸 모양이다.

“스노우 화이트. 잘 잤어?”

“미친놈. 과부 제조기는 그게 지 이름인지도 모를 거다.”

새하얀 백마를 어루만지는 그를 보며 기병대원들이 이죽거렸다. 그들의 말마따나 스텔라는 스노우 화이트라는 이름을 영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부를 때면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지라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스텔라라고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역시 맹스크 애들이 빠릿빠릿해. 편자랑 전부 손 보고, 그새 애들 싹 손 봐뒀네.”

애마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들은 이내 마구간을 나섰다.

“어디 가게요?”

“형만 믿고 따라 와봐. 자식아.”

한센의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잠자코 있으면 좋은데 데려가 줄 테니까.”

마치 그 모습이 외박 첫날 유달리 음흉하게 웃어대던 선임의 모습과 겹쳐 보여 김선혁은 설마 했다. 그런데 그 설마가 정말로 맞아버렸다.

“이게 대낮부터 무슨!”

“새끼야! 군바리한테 대낮이 어디 있어! 깨어 있으면 대낮이지!”

삭막하기만 한 24연대의 주둔지와는 달리, 요새에는 술집을 비롯해 별 게 다 있었고 그중에는 수상한 술집도 있었다.

“이번에 아주 크게 한 건 하셨던데?”

그다지 애교스럽다고도 할 수 없는 퉁명한 음성,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걸까.

“이야. 오랜만에 봤더니. 더 이뻐졌네. 우리 엠마.”

“한센은 그새 더 못생겨졌네요. 어디서 이빨까지 흘리고 아주 팔푼이가 다 돼서 왔네.”

갈색의 긴 생머리를 적당히 묶어 올린 여인, 엠마가 한센의 능글맞은 말에 사납게 쏘아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김선혁은 갑자기 자신을 향한 눈빛에 쑥맥처럼 눈을 피하고 말았다.

“못 보던 얼굴이네?”

아무래도 금녀의 구역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버텨왔던 모양이다. 로브로 꽁꽁 제 몸을 감싸고 있었던 이은서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자극이 그를 두들겨댔다.

“우리 막내야. 잘 챙겨줘. 여기 오기 전에도 여자 구경하기 힘든 곳에 있었다니까. 가능하면 우리 엠마가 좀 품어주기도... 끄악!”

선을 넘은 농담에 곧장 응징이 따랐다. 무거운 나무 쟁반으로 뒤통수를 강타당한 한센이 잠잠해진 사이, 엠마라 불린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검은 머리면... 이방인?”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벤트는 25화의 댓글까지 포함됩니다. 쭉 이어갑니다앙!

*혹시 기병대원들과 병사들의 애먼 농담이 불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금녀의 구역에서 오래동안 생활하는 병사들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였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사랑입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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