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 속성의 힘 -->
기사들과 비교하면 그 처우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갑기병이라 하면 자비로 말과 장비를 유지할 정도의 엘리트들이다. 그들의 가치는 적을 분쇄하고 전공을 더하는데 있었지 주둔지를 보수하고 정돈하는데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들의 작업 능력은 그다지 기대할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김선혁의 작업 능력은 발군이었다.
“끝났습니다!”
몇 가지 연장을 챙겨 마구간의 지붕에 올라간 뒤로 간간히 자재만을 요구하던 그가 다시 지붕 밖으로 빼곰 머리를 내민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버, 벌써?”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클라크를 비롯한 몇몇 기병대원들이 지붕에 올라가 확인해보니 일부러 책을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일을 끝내 놓았다.
“아까 보니, 벽하고 기둥 좀 보강해야 할 거 같던데...”
“어? 어...”
처음에 보였던 소극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김선혁의 뒤로 왠지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거기 덧댈 판때기하고 못 좀.”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고 활기가 넘치는 모습에 드센 기병대원들이 무심코 뒤를 따라다니며 조수를 자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니, 아니. 이거 말고!”
짜증 가득한 얼굴로 손을 휘젓는 김선혁의 모습에서 베테랑의 위엄이 느껴져 평소 그를 무시하던 기병대원들도 감히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과했다.
“아, 미안.”
“쯧.”
김선혁이 짧게 혀를 찼다.
“미안하면 끝입니까? 미안하면 오던 태풍이 안 온답니까? 왜들 보고만 있어요! 거기 내가 판때기하고 전부 기대어둔 거 보강할 곳들이니까, 빠릿빠릿하게 움직입시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 창병들에게도 거침없이 달려들었던 사내들이 그의 지시에 찔끔한 얼굴로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저 놈 대체 뭐 하던 놈이지?
클라크가 얼빠진 얼굴로 김선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제법 열심히 몸을 쓰나 싶더니 어느 순간이 되자 은근슬쩍 뒤로 빠져서 손가락으로 기병대원들을 부리고 있었다. 말 못 타는 기병이라고 내내 무시하던 신병이 그렇게 자신들을 마소 부리듯 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 클라크 조장은 일 안 거듭니까? 지금 사람 손 모자란 거 안 보여요?”
“가! 지금 간다고!”
심지어 이방인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에 빠져 있던 클라크마저도 그의 채근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댔을 정도였다.
“어휴. 내가 이 어리버리들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구시렁거리던 김선혁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너무 작업에 몰입했던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이병 일병 다루듯 기병대원들을 다루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에 내뱉은 말은 바람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한 듯했다.
“후우.”
김선혁은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기병대원들을 둘러보다 멀찍이 물러났다. 지금에야 정신이 없어 넘어간다지만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방금 전의 일을 꼬투리 잡아 시비를 걸 수도 있었다. 이럴 때는 조금 떨어져서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평지라 그런가. 바람 한 번 더럽게 세네.”
비에 젖어 축축한 몸을 때려대는 바람이 아까보다 한층 더 매서워져 있었다.
“음?”
그런데 뭔가 감각이 묘했다.
처음에는 그저 떨어져 내리는 빗줄기가 맨살에 닿는 느낌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극이 심했다. 도대체 이런 감각을 무시하고 어떻게 그렇게 작업에 몰두했는지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김선혁이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손끝을 칭칭 감아오는 익숙한 감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핑그르르.
마치 유혹하듯 손등 위를 핥고 지나가는 기운이 언젠가 세차게 말 달리던 그날의 감각과 완전히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주먹을 쥐니 평소에는 그렇게 콧대 높던 속성의 기운이 얌전히 손안에 머물렀다.
“아...”
그때서야 깨달았다. 용이 말했던, 지금으로서는 주변의 힘을 빌려야만 속성의 힘을 완전히 쓸 수 있을 거란 말이 무엇인지 퍼뜩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태풍 직전에 몰아치는 이 거센 바람이야말로 그가 그토록이나 오매불망 염원하던 속성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실마리라는 것을.
김선혁은 안달이 났다. 지금 당장 이 힘을 테스트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휴우. 드디어 끝났다.”
때 마침 작업이 끝난 기병대원들이 흠뻑 젖어 들러붙은 옷을 털어내며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김선혁이 그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거세게 부는 바람에 실눈을 뜬 기병대원들은 그의 모습에서 수상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기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사실 지금의 기병대원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눈 아래로 보던 이방인의 지시를 받고 작업을 했고, 그 과정에서 호된 질책을 받기도 하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으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받으니 마치 대단한 인정이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당혹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어, 그래. 이제 돌아가자.”
복잡한 얼굴로 김선혁을 바라보던 클라크가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다른 기병대원들도 묘한 감정이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조장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김선혁은 그들의 속도 모르고 손 끝에 감아쥔 속성의 힘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도의 감정도 잠시, 그는 이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향하는 방향에 연병장이 있었다.
**
연병장에 도착한 김선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거의 근접한 태풍 탓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터라 작업에 한창이던 보병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가 오는 길에 슬쩍 챙겨온 창을 들었다. 창끝을 세우고 양손으로 창대를 꽉 움켜잡으니 손안에 머물던 기운이 자연스럽게 창날에 몰려들었다.
콰아아아아.
창두를 중심으로 사납게 휘몰아치는 속성의 기운이 이제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다. 그 모습이 마치 창끝에 작은 회오리바람을 묶어둔 것 같아 그는 일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이게 속성의 힘?
언뜻 느껴지기에도 휘몰아치는 속성의 기운이 절대로 약하지 않다. 사나운 맹수처럼 낮게 목을 울려대는 기운은 눈앞의 그 어떤 것이라도 찢어발길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감탄에 젖어있던 김선혁이 몸을 낮췄다. 속성의 힘 탓인지 휘몰아치는 강풍 속에서 버티는 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정작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다. 당장에라도 이 기운을 어디론가 쏟아내지 않으면 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왕국 표준 창술.
그가 가장 몰두했던 능력이자 그가 성장시키는데 성공했던 유일한 스킬이다. 자연스럽게 근육이 당겨지고 자세가 잡혔다.
이제는 정말 창을 내지르기만 하면 된다.
대체 어떤 위력이 있을까. 설렘과 기대로 미칠 듯이 뛰어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그는 심호흡을 했다. 미칠 듯이 귀청을 때려대던 바람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창 끝에 매달린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이명처럼 희미해져간다. 그리고 완벽한 고요함이 그의 주변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적막 속에서 그가 창을 내질렀다. 그 순간 고삐 묶여있던 짐승이 세상에 풀려났다.
**
세차게 부는 비바람에 나부끼는 막사의 천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다. 그때 뭔가 바람에 날려온 뭔가가 막사를 툭, 하고 치고 지나갔다.
“뭐, 뭐야! 어디 무너진 거야?”
흔들리는 막사를 불안한 눈으로 살펴보고 있던 기병대원들이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별 일이 없자 이내 다시 주저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구간은 괜찮겠지?”
“설마. 날아갈 거면 막사가 먼저 날아가야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새끼야. 그러다 막사 날아가면 다 뒤지는 거라고.”
다소 히스테리적인 반응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고, 누군가의 말에 기병대원들이 해쓱한 얼굴이 되었다.
“아, 조용히 해. 아까 제대로 보강해놔서 마굿간이 무너질 일은 없을 거야.”
클라크가 나서서 진정을 시키고 나서야 기병대원들이 조용해졌다.
“근데 그 이방인 대체 정체가 뭘까?”
“원래 건축일이나 뭐 그런 거 하던 놈이 아닐까? 아까 보는데 난 진짜 삽질의 신인줄 알았다고. 공병대 놈들 작업하는 것도 많이 봤지만 진짜 맹세코 그런 엄청난 삽질은 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태풍과 굉음에 대해 떠들어대던 기병대원들이 어느 순간이 되자 김선혁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이방인이라는 놈들은 알 수가 없어.”
“그래도 작업 능력 하나는 인정해 줘야지. 사실 훈련도 꽤 열심히 하는 편이고.”
“그래서 성실하고 빠릿빠릿하니까 우리 대원으로 인정해주자고?”
“미쳤냐! 작업이고 성실이고 기병이 말을 잘 타야지. 그런 새끼 옆에서 돌격하다가 진형 꼬여서 죽어자빠지면 개죽음이라고.”
그래도 조금은 그를 인정해주나 싶었던 기병대원들이었지만, 그래도 전장에서 곁을 맡기기는 것은 여전히 꺼림칙한 기색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잡기에 능하고 쓸 만하다고 해도 그건 공병이나 보병들에게나 미덕이었지 기병들이 갖춰야 할 필수 능력은 아니었다.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차라리 어디 다른 병과로 보내버려.”
“말 못 타는 놈 데리고 있어봐야 우리만 고생이지.”
저도 모르게 이방인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자존심이 상한 기병대원들이 이제는 제멋대로 김선혁을 다른 곳으로 보낼 기세였다.
“가만. 근데 이방인 어디 갔어?”
그러고 보니 한참 전부터 김선혁이 보이지를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클라크가 순간 표정을 굳히더니 막사를 걷었다.
“조장! 바람이 저렇게 심한데 어디 가려고!”
“마구간도 좀 보고 이방인도 찾아와야겠다! 따라올 사람?”
당연하게도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클라크가 비바람 몰아치는 막사 밖으로 나섰다.
“아으아.”
거센 바람 때문에 눈조차 뜨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클라크는 굳이 비바람 속으로 꿋꿋이 걸음을 옮겼다. 먼저 들려왔던 굉음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 먼저 마구간을 찾았다. 혹시라도 무너지지 않을까 했던 마구간은 멀쩡했고 말들도 비록 숨죽인 모습이긴 하지만 크게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곳에도 이방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대체.”
몇 번인가 소리 질러 불러보았지만 힘껏 고함쳐보아도 금세 바람소리에 먹히고 마는지라 어쩔 수 없이 직접 두 발로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몸조차 가누기 힘든 바람이 여간 고욕이 아니었지만 이방인의 관리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 아래 있었던 탓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아이씨. 오다가 바람 심해져서 어디 짱 박혔나.”
덩치가 큰 자신도 이렇게 몸을 가누기 힘든데 바람 불면 훅 날아갈 것 같은(?) 몸을 한 이방인은 오죽할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책임도 좋지만 당장 자신이 죽게 생겼다. 기묘한 부유감에 몸이 들썩이는 걸 보면 이대로 밖을 헤매다가는 강풍에 휘말려 어딘가에 처박힐 판국이다.
“멍청해 보이진 않았으니 알아서 돌아오겠지.”
다소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국 그는 탐색을 포기했다. 그런데 그때 거세게 불던 바람이 순간적으로 잦아들었다. 거짓말처럼 태풍이 사라진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이때다 싶어 발걸음을 서두르던 클라크는 귀청을 찢는 굉음에 깜짝 놀라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뭐, 뭐야!”
얼빠진 얼굴로 소리의 방향을 찾으니 연병장이 있는 방향이었다.
설마?
그 순간 말 타고 질주해 찔러 넣던 이방인의 창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아무런 근거도 뭣도 없는 의문이었지만 이내 강한 예감이 되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연병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언제 바람이 멈췄냐는 듯이 더욱 거세진 비바람, 꿋꿋이 걸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병장에 도착한 클라크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게 대체...”
마치 거인이 날 세운 손톱으로 할퀴고 지나가면 이런 모습일까. 온통 헤집어진 연병장의 바닥과 유독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구덩이들의 모습이 끔찍하기만 했다.
“으으...”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광경에 눈만 굴려대던 클라크는 바람소리 속에서 미세하게 들려오는 신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나 죽겠다...”
그리고 뒤늦게 구덩이 속에 처박혀 끙끙대는 이방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가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김선혁?”
“어? 거기 누구 있어요? 있으면 나 좀 꺼내줘요.”
다 죽어가는 음성에 클라크가 구덩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
“진짜 그게 사실이야?”
“진짜라니까요.”
“날도 어둡고 바람도 심해서 좀 헤맸는데 가다보니 연병장이었고 갑자기 광풍이 불더니 연병장이 박살이 났고 정신을 차려보니 구덩이 속이었다고?”
“맞다니까요.”
뭔가 미심쩍은 얼굴로 자꾸만 똑같은 이야기를 물어오는 클라크를 보며 김선혁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이고. 아파라. 죽을 거 같네.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누가 놔주지를 않...”
그대로 두었다가는 똑같은 질답을 또 주고 받아야할 판국이라 김선혁이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죽는 시늉을 했다.
“끄응. 알았어. 일단 나머지 이야기는 치료가 끝이 나면 하지.”
아닌 게 아니라 처음 발견했을 때까지만 해도 기괴하게 찌그러진 모습이 죽은 게 아니었나 싶었을 정도로 상태가 위중했던 김선혁인지라 클라크도 더는 그를 괴롭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의무대에서 계속 쉬고 있도록 해. 그럼 이만.”
질기게도 버티던 클라크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김선혁이 슬쩍 의무대의 막사를 둘러보다가 이내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는 활짝 웃었다.
그런 그의 눈에 하루 전과는 명백하게 달라진 스테이터스 창이 보였다.
========== 작품 후기 ==========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작과 추천 코멘트는 실의에 빠진 글쟁이를 일으켜 세우는 좋은 단백질원입니다. 찡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