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격퇴
다 죽어가던 케트니오라 성당에 한 줄기 빛이 드리웠다. 진짜 빛은 아니었고, 서른이 넘는 알몸의 남녀 전사들이었지만 성당 사람들에게는 태양빛보다도 눈부시고 찬란한 빛이었다.
그리고 죽음에서 되살아난 용아병들은 부활의 자격을 얻기 위해 언데드들을 향해 온몸을 내던졌다.
까앙!
만약 눈이 있었다면 크게 떴을 것이다. 해골 병사는 자신의 창을 막은 것을 보고 움찔했다.
해골 앞에는 갑옷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의 남자가 방패로 창을 막고 있었다. 해골의 턱관절이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생자에 대한 분노보다 당혹과 놀람이 다분히 섞인 딱딱거림이었다.
“딱딱.”
용아병은 그 해골 병사의 턱관절을 흉내내듯이 이빨을 부딪쳤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철퇴로 해골 병사를 내리쳤다.
빠가각!
머리가 박살 난 해골 병사가 무너지자 용아병은 바로 다음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에서 허공을 노니며 수십의 시체들을 통제하던 벤시 한 마리가 그런 용아병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끼아아아아-!
사기가 가득 담긴 귀곡성에 공기가 파르르 떨리며 고리형의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어났다.
하지만 용아병은 그런 귀곡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모든 용아병들은 자격을 얻기 전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와 같았다.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용아병들 중 하나가 시체 더미를 밟고 뛰어올라 벤시를 후려쳤다. 하지만 용아병의 칼은 허무하게 벤시를 가르고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용아병 또한 영체들에게 입힐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것이었다.
용아병들은 몇 번의 허우적거림 끝에 벤시가 자신들에게, 그리고 자신들도 벤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다음 용아병들이 영체들에게 내릴 태도는 한결 같은 무시로 결정되었다. 그들은 완전히 신경을 꺼버렸다.
아무리 벤시나 레이스가 주위를 맴돌며 고함이나 사기를 터트려도 그들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시체들을 무자비하게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망자들의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던 검은 안개가 부서진 뼈 무더기를 일으켜 세우고, 박살 난 시체에 다시 힘을 불어넣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크하아아아!”
기합 소리와 함께 한 용아병이 내리친 전쟁 망치가 좀비와 해골을 박살 내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망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빙글빙글 돌며 추가로 다섯 개의 좀비를 피떡으로 만들더니 창칼 사이로 돌진했다.
푹, 푸푸푹!
맨몸의 용아병에게 칼과 창이 꽂히며 그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용아병은 손을 뻗어 좀비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퍼석!
사방으로 썩은 뇌수와 뼈조각을 휘날리며 좀비의 머리통이 박살나 흩어졌다.
“우워어어어!”
온몸에 창과 칼을 꽂은 용아병은 수십의 시체들을 죽이고 나서야 털썩 쓰러져 눈을 감았다.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그저 용을 잡으러 간다는 허황된 말을 남겼다가 스러진 전사들이 시간을 뛰어넘어 시체들을 부수고 있었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전투에 대한 열망이나 살육-시체들뿐이었지만-에 대한 기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낱알을 추수하는 농부처럼, 가축을 도살하는 도살업자처럼 묵묵하게 팔과 다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저, 저······!”
“사, 사제님······.”
성벽에 모여있던 병사와 성직자들이 신음을 흘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열세는 확실했다. 용아병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가장 두려웠던 죽음의 기사는 한 이름 모를 남자가 대검을 휘두르며 막고 있었다.
성기사와 금발의 여인이 기도문을 외우는 듯 주위에서 신성력을 틔우고 있었지만 협곡의 틈새에 가득한 언데드의 숫자는 여전히 수천, 수만은 넘어 보였다.
그때 성벽 안쪽으로 피신했던 황녀 유리아가 다급한 발놀림으로 흉벽 위에 올랐다.
“저, 전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조금 더 휴식을 취하셔야······.”
“밖이 저 지경인데 내가 어떻게 쉬겠습니까? 몸은 많이 나아졌으니 비켜보십시오.”
“아, 예.”
그녀를 향해 숙여지는 고개와 인사들을 받는 중 마는 둥 하던 유리아는 흉벽에 손을 짚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전황을 훑은 그녀는 오면서 주운 장검을 뽑아들고는 말했다.
“돌격 준비를 하십시오.”
유리아의 말에 성당의 기사들과 사제들이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빠르게 살아남은 말들을 모아들인 다음 그 위에 성당 기사와 유리아의 기사가 올라탔다. 유리아 또한 자신을 태웠던 흑마, 크라이의 안장에 다시 앉았다.
푸르르륵!
괜찮겠냐는 듯 고개를 흔드는 흑마의 갈기를 쓰다듬은 유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네 주인을 도우러 가자.”
그때 성문을 막고 있던 돌덩이와 나무 골조, 우그러진 성문이 병사들에 의해 모두 치워졌다. 치웠다고는 해도 겨우 말 두 마리가 빠져나갈 길밖에 틔우지 못했지만, 유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죽음을 향해!”
짧게 외친 유리아가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형성시키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히히힝!
말의 거친 울음소리가 울리며 유리아는 쏜살같은 속도로 성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큭, 너, 엄청, 잘 달리는구나······!”
대지를 박찰 때마다 전해지는 충격에 선혈을 한줄기 흘리면서도 유리아는 시체들을 향해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따르며 성당 기사와 다른 기사들이 각자의 말 고삐를 틀어쥔 다음 옆구리를 박찼다.
“가자아아-!”
“와아아아-!”
너덜너덜한 갑옷과 깨진 칼, 부서진 투구 반쪽을 걸치다시피 한 병사들과 기사들, 사제들이 기사들의 뒤를 따라 무너진 성문 잔해를 넘어 돌진했다.
천을 겨우 넘을까 말까 할 정도로 적은 병력이었지만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수만이 내는 것처럼 우렁찼다.
협곡과 산의 경사면을 타고 반사되는 인간들의 함성에 우왕좌왕하던 시체들의 고개가 성당이 있는 쪽으로 돌려졌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루테온 만세! 태양 만세-!”
각자 자신이 믿는 주군과 신을 향해 찬미와 경탄의 부르짖음을 동반하며 기사들이 달렸다. 죽음이 창칼을 쥐고 서성이는 전장을 향해.
“밀집!”
유리아의 고함을 들은 기마가 거리를 좁혔다. 유리아를 가장 첨단의 꼭짓점으로 삼은 쐐기꼴 형태의 방진을 만든 그들은 검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이 되어 산개한 시체들을 찔러 들어갔다.
콰과광!
군마와 시체들이 부딪치며 살점들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가죽만 너덜거리는 가벼운 팔이나 뼈만 남은 다리가 공중에서 출렁였다.
기사와 그들이 탄 말이 시체들을 짓밟은 사이 그들의 뒤를 따라 달리던 병사들의 창과 사제들의 기도문이 황금빛을 뿌리며 내리꽂혔다.
“죽어랏-!”
“태양의 기도를 높이 올리며, 그 은총을 이곳에 내리니-!”
전열이 무너진 언데드들이 우후죽순 무너지며 순식간에 기백이 넘는 숫자가 그냥 시체가 되거나 재가 되어 소멸했다.
“흐아아압!”
쥐어 짜낸 마력을 검에 두른 유리아가 두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검술이라기보다는 마구잡이에 가까운 휘두름이었지만, 어차피 사방에 가득한 것은 좀비와 시체들 투성이였다.
마력으로 강화된 검은 겉에 마력으로 만들어진 검기를 두르고 해골과 시체를 박살 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사기의 힘을 빌어 일어난 시체와 좀비들은 허수아비처럼 무너져 박살나거나 핵을 잃고 한낱 시체로 돌아가 짓뭉개졌다.
성당 기사들의 신성력이 가득 담긴 갑옷과 검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언데드를 위축시켰다.
휘날리는 눈보라와 탁한 흙먼지, 숨쉬는 것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검은 안개, 그리고 그 속에서 번득이는 창칼과 의미없는 괴성들.
갑옷 틈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손가락 끝에서는 더 이상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는 자신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몸이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에 다다랐을 때 유리아는 옆구리를 향해 찔러오는 창을 황급히 쳐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노린 창과 칼, 도끼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크라이가 거친 울음을 토하며 앞다리를 들었을 때 유리아는 고삐를 놓치고 낙마하고 말았다.
콰당탕!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찾아온 충격은 엄청났고, 고통은 끔찍했다. 유리아는 말에서 떨어지고 나서도 몇 번을 더 굴렀다.
안면 가리개 넘어 차가운 빙토의 촉감과 흙냄새를 맡은 유리아가 벌떡 일어섰다.
콰각!
한 발 차이로 시체가 쥔 창이 유리아가 엎어져 있던 땅을 후려쳤다. 그리 좋지 못한 품질의 창이었던지 그대로 창대가 부러져 나갔고, 유리아는 검을 휘둘러 시체의 허리를 끊어 놓았다.
아직 어지러운 시야를 추스른 유리아는 바로 검을 세우며 이어질 후속 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공격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어리둥절해진 유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비와 시체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갑자기 마에스트로가 갑자기 지휘를 멈추자 당황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시체들은 갈피를 못 잡고 서 있다가 서로를 깨물거나 의미없이 바닥에 허물어져 퍼드덕거리기도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현상인가 싶었던 유리아는 문득 자신의 피부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선 듯한 느낌과 뭔가가 타는 냄새가 코에서 느껴졌다.
쿠르르르릉······!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웠던 협곡 위의 낮은 구름들에서 푸른 섬광과 함께 천둥이 요동쳤다.
전장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마치 용의 형상을 닯은 그림자에 의해 생자든 사자든 구분을 가리지 않고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하얀 점으로 보이는 뭔가가 높은 하늘에 아무런 장치도 없이 떠 있었다. 동시에 푸른 전격이 가공할 속도로 대지에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전격과 함께 휘날리는 눈보라가 하늘 곳곳에서 하얀 기류와 함께 새하얗게 뭉치더니 거대한 얼음송곳이 되어 떨어졌다.
그 소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유리아는 근처에서 들린 굉음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붉은 피로 이뤄진 날개를 어깨 죽지에 단 여인이 혈창을 내질러 시체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가공할 속도의 찌르기와 장대한 길이 때문에 좀비들은 감히 그녀에게 접근하지도 못한 채 죽어 나갔다.
오른손에 든 붉은 창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왼손을 갈고리처럼 굽혀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자 다섯 개의 붉은 선이 그어지며 땅을 갈아엎었다.
푸화확!
검붉은 핏물로 시체들을 휩쓸어버린 여인과 달리, 두 자루의 곡도만으로 죽을 뻔한 병사와 사제들을 살려낸 한 흑요정도 있었다.
유리아는 그 분홍빛이 맴도는 피부와 길쭉한 귀, 표범처럼 탄탄하면서도 날렵한 몸매를 발견하고 그녀가 렉시임을 알아보았다.
“저 여자까지?”
두 자루의 곡도를 신들린 것처럼 휘두르며 흑요정이 대지를 질주했다. 곡도가 한 번 수평으로 횡을 그을 때마다 시체들의 머리통 수십 개가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살아남은 병사와 사제들이 그런 흑요정과 붉은 날개를 두른 여인, 하늘에 떠서 손짓으로 벼락과 얼음 송곳을 날리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새 주변을 모두 정리한 흑요정, 렉시가 유리아에게 다가와 손을 들었다.
“오랜만이야, 황녀 전하. 얼굴이 다 죽어가는 것 같네?”
“······당신은 여전하군요.”
고개를 내저은 그녀의 곁에 어느새 크라이가 다가와 코로 유리아를 툭 밀었다. 아무래도 떨어지게 해서 미안하단 뜻으로 보였기에, 유리아는 흑마의 콧잔등을 쓸어내렸다.
“미안할 것 없다. 내가 방심해서 떨어진 거니까.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아, 이제야 다 끝났나보네. 조금 물러나자고.”
“예? 어, 어?”
뒤를 살피고 있던 렉시가 유리아와 크라이의 고삐를 붙잡은 채 뒷걸음질쳤다. 영문도 모른 채 그녀의 손에 이끌려 물러나던 유리아는 어느새 하늘에 떠 있던 하얀 소녀와 붉은 날개를 두르고 움직이던 여인 또한 전장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고, 자신의 앞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였다.
뒤를 돌아본 유리아는 그곳에서 금발의 여인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는 걸 목격했다.
“······태양이 이곳에 임하니, 그림자는 모두 걷히고 사악한 것은 무너지리라.”
유리아의 귓가에 간질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기도문의 마지막을 장식한 여인의 말이 들렸다.
동시에 눈부신 황금빛의 섬광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끝을 모르고 올라가던 광선은 그대로 먹구름을 관통했다.
파아아앗!
그리고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세차게 휘날리던 눈보라는 차츰 사그라들더니 완전히 멈췄다.
바람조차도 더 이상 불지 않았다. 쓰러져 있던 병사들이나 사제들이 멍한 얼굴로 일어났다.
하늘에서 눈부시게 떨어지는 황금빛의 가루가 스며들자 피 흘리던 상처가 아물고 부러졌던 뼈가 저절로 붙었다.
피와 땀, 먼지로 범벅이 된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걷힌 구름에서 오후의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며 그들에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언데드들은 그 눈부신 태양빛에 닿자마자 녹아내리고 있었다.
힘없는 비명을 지르며 벤시와 레이스가 발버둥치다가 투명해졌고, 좀비와 해골, 시체들은 그 자리에서 하얗게 불타오르다가 하얀 재만 남긴 채 소멸했다.
수천의 언데드들이 성당의 위쪽에서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 물러가는 모습에 수많은 사람들이 넋을 잃고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