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17화 (118/225)

117화 상흔

그 주문 소리가 낮게 퍼질수록 기묘한 소음이 함께 울렸다. 공간을 잠식하는 소음에 오크 전사와 주술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몇몇 심약한 자는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지만 소음은 계속됐다.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다고 해결되는 종류가 아니다. 공기가 아니라 마력을 매질로 퍼지는 소리.

끼기기기기깅.

공간을 잡아 비트는 듯한 울림 이후, 마법진의 중심에서 균열이 생성되었다. 깨져나간 허공을 세로로 길쭉하게 찢은 균열. 곧 그것의 크기가 커지고 넓어지더니, 둥근 광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균열의 가운데에 위치한 광원. 마치 허공에 열린 눈 같은 모습. 모든 주술사와 전사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족장이나 켈파그에게도 하지 않을 극상의 예. 하지만 저 균열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를 생각하면 당연히 취해야 할 자세이기도 했다.

“주, 주인님.”

켈파그 또한 두 무릎을 꿇고 지팡이를 가로로 뉘인 다음 엎드려 있었다. 오체투지를 한 몸이 부들부들 떨었다.

균열의 광원이 켈파그를 향했다.

-말하라.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

“예,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입니다. 검은 머리에 하얀 도끼와 검은 대검을 다루는 전사, 그놈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졌습니다. 다행히 제가 들어놨던 보험인 라쉐가 놈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가한다면 지금의 균형은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제게, 제게 조금만 더 시간과 힘을 주신다면······.”

-되었다.

“예?”

켈파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균열 속의 광채가 점차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 남자라면 저번에 어렴풋이 본 적이 있지. 그때 봤을 때도 완전히 보지는 못했는데. 설마 라쉐를 이길 정도였나.

“예? 아, 아직 싸움은······.”

켈파그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짓을 받은 오크 주술사 몇몇이 먼 거리를 보여주는 마법의 거울을 띄워 올렸다.

동시에 엄청난 충격과 섬광이 거울 속에서 번쩍였다. 뒤이어 그들이 자리한 곳까지 옅어진 진동이 말려오는 것이 느껴진다.

켈파그와 휘하 주술사들이 마법진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이중, 삼중의 결계를 치고 방어막을 구축했음에도 전해질 정도의 충격.

한없이 굳은 표정의 시선들이 커다란 거울로 쏠리고.

그곳에 거대한 크레이터와 함께, 먼지로 흩날리고 있는 오거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오거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도.

휘몰아치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코트가 정처 없이 흔들릴 때, 남자의 육체는 미동도 없이 가루가 되어가는 오거를 응시한다.

켈파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 이름 모를 자에게서 그의 주인을 봤을 때와 비슷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오시하는 광오하면서도 오만한 자세. 주위의 흐름을 통제하고 짓누르는 기세의 주인.

그때 남자의 시선이 돌려지고, 정확히 마법의 거울이 있는 방향을 본 순간.

파칙!

멀리 보기 마법을 통해 저편의 풍경을 비춰주던 거울이 박살나버렸다.

오크 주술사들이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번쩍이는 자청색의 눈빛 하나뿐이었다.

“······.”

할 말을 잃은 오크 주술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법의 거울을 이용한 멀리 보기 마법이 남자를 관찰하고 있던 장소는 최소 50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에 라쉐와 싸우면서 평지풍파를 일으킨 덕분에 광포한 대기와 마나의 흐름이 휘몰아치고 있을 텐데, 그 먼 거리를 꿰뚫고 멀리 보기 마법을 파괴하다니. 무엇보다 무슨 수로 파괴를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전투가 끝났나 보군. 라쉐의 생명 반응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그, 그런······.”

켈파그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주, 주인님! 도와주십시오! 아직, 아직 저는 싸울 수 있습니다!”

-······.

잠시 침묵하던 균열이 다시 마력을 통한 전성으로 소리를 내 말했다.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겠지?

균열에서 스멀거리며 나오는 끈적한 마력이 바닥에 닿자, 마법진과 석탑들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

평야는 을씨년스런 기색을 풍겼다. 맑았던 하늘도 어디선가 불어온 구름에 의해 점령당해 회색과 흰색, 그 사이의 색깔을 띠었다.

바람 속에 스며든, 촉촉하게 젖은 공기가 느껴진다. 비가 올 것 같았다.

“횃불! 횃불 가져와!”

“여기 부상자가 있습니다! 마법사, 사제님 아무나 없습니까!”

이제 완연한 낮인데도 불구하고 점차 명도가 낮아진다고 느끼는 건 착각일까. 횃불을 든 병사들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어떤 자들은 피를 흘린 채 비명을 지르는 동료를 부여잡았다.

그때 하얀 갑옷에 피칠갑을 하고, 땀에 엉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뒤로 넘긴 남자가 달려왔다.

“부상자라고요? 어디, 한 번 봅시다.”

“기, 기사님?”

“제스입니다. 옆구리가 뚫렸군요. 치료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하십시오.

곧 신성력이 뿜어지며 구멍이 난 옆구리의 살이 매워진다. 다만 그 과정이 고통스러운 건지, 부상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한쪽에서는 드루이드인 사라넨이 녹색 빛을 손바닥에서 내고 있었다. 제스와는 달리 피에 젖거나 더러워지지 않은 모습.

손을 지면에 대며 사라넨은 감은 눈을 찌푸리거나 피기를 반복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

움직이고 있는 건 살아남은 라함 영지군, 용병들, 그리고 전향한 오크들이다. 남은 괴물들은 모두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숲으로 파고들었다.

땅은 축축히 젖었다. 발로 밀면 피에 젖은 진흙이 주욱 밀려나는 것이 느껴졌다. 질척거릴 정도다.

채 빨아먹지 못한 피가 고여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기사와 부관들의 명령에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여 시체를 한데 모아 불을 피웠다.

타티아나 영주는 한 병사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넓은 챙이 달린 투구를 벗겨내자 젊은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입은 살짝 벌려져 있고, 표정은 고통에 살짝 찡그려져 있었다. 무엇을 더 보고 싶은 것인지 눈은 뜨여져 있었고, 더 이상 수축하지 않는 동공에 푸른 하늘이 담겼다.

그녀의 손이 그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쓸자 눈꺼풀이 감겼다. 하지만 아직 눈을 감지 못한 시체는 많았다.

인간 뿐만 아니라 오크의 것도 많다. 헤손과 싸우면서 첸파가 자기 휘하 부족의 전사들을 불러모았기 때문.

인간의 편을 드는 오크들과 악마의 힘을 다루는 오크, 두 집단의 승패에서 패색이 짙은 건 당연히 첸파의 오크들이었다.

기실 흑마력을 다루는 오크들은 그 수가 많지도, 수준이 높은 편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마력을 다룰 수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큰 법이었다. 그것도 선천적으로 강력한 힘에 마력을 더할 수 있다면 더욱.

때맞춰 달려온 카이가 아니었다면 첸파 역시 죽었을 것이다. 지금 카이는 살아남은 소수의 오크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신이 돌아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를 마친 카이와 백발의 소녀 아엘라시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영주님?”

타티아나가 그 오크를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러셀의 동료인가. 이름이 분명, 카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영주님.”

아직 불칸의 성력을 꺼트리지 않았기에 그의 피부에는 옅은 아지랑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이제 막 우룩크의 상태에서 벗어난 오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많이 죽은 것으로 보였지만 그럼에도 적지 않은 수였다.

카이는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첸파를 일별하고는 곧장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영주님. 곧바로 대주술사 무리를 격파해야 합니다. 특히 켈파그를 사로잡거나 죽여야 합니다. 그가 악마와 계약한 당사자이자, 이곳에 오크 부족을 불러 모은 자입니다. 켈파그를 처리하지 않으면 전투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움직여야······.”

드드드드드.

그때, 땅이 흔들렸다. 지면에 손바닥을 대고 있던 사라넨이 벌떡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전장의 대지에 가득 차 있던 핏물들이 중력을 거스르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

오거 라쉐와의 전투를 마친 후. 러셀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관음증 걸린 새끼들.”

어떤 시선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다만 전장에 휘몰아치는 바람과 다른 괴수들, 마나의 흐름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탓에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웠을 뿐.

지금도 라쉐와의 격전의 여파가 여기저기서 돌개바람을 일으키고, 작은 용권풍을 생성하는 중이지만.

잠깐의 여유를 얻은 러셀의 마안은 바로 그 시선의 특이점을 깨닫고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육안으로 마나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감응력과 멀리 있는 관측한 마법을 바로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지배력이 없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

투덜거린 러셀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는 눈을 감은 채 호흡했다.

깊게 파인 크레이터의 중심에서 홀로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일견 편안해 보이기도 하였으나, 실은 방금 전의 충격을 해소하고, 달아오른 마력 회로를 식히면서 체내의 마력을 순환하는 중이었다.

라쉐가 남은 생을 모두 불태워 만든 권격은 아무리 러셀이라도 완전히 흘려버릴 수는 없는 까닭. 그리고 3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싸우면서 혹사 된 마력 회로도 점검해야 했다.

“푸후우.”

그의 입에서 뜨거운 열기가 담긴 숨이 흘러나왔다. 전투를 치르면서 쌓였던 불순물을 내보내는 과정이었다. 모든 피로를 해소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잠깐의 여유가 생겼을 때 내보낼 수 있으면 좋다. 생사의 갈림길은 찰나의 흐트러짐에서 갈리는 법이니.

체내에 남은 마력은 거의 없다. 주변 경관을 대 파괴의 현장으로 만들 정도의 공격을 빗겨내기 위해서는 러셀 역시 그만큼의 마력으로 대응해야 했기에, 지금 그는 가진 마력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다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다시 차오르는 마력의 속도가 이전보다 더 빨라졌기 때문이다.

단단한 강철은 불순물을 얼마나 걸러내고, 적당한 세기의 두드림과 담금질을 반복하느냐에 따라 단조된다.

태어날 때부터 재능 있는 신체를 가졌다고 해도, 제대로 쓰지 않는다면 녹이 슨다. 그런 면에서 러셀은 싸움에 있어 최선을 다하며 자신을 채찍질 했다.

끝없는 전투의 연속에서도 러셀은 물러서지도, 굽히지도 않았다. 휘느니 부러지겠다는 심정으로 맞서왔고,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지만, 마안은 더 없이 선명하게 그의 내부를 관조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이 자리에는 라쉐의 권격이 미친 여파에 의해 마나의 흐름이 날뛰고 있었다.

러셀을 중심으로 구형의 역장이 둘러쳐지고, 점차 그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영역이 넓어질수록 그의 감응력과 조작력도 같이 확장되어 간다.

감응력이 마나의 흐름을 포착하고, 조작력이 그런 흐름을 유도한다. 깔때기처럼 꼬아진 흐름이 러셀과 연결되자 텅 비어있던 그의 몸에 순수한 마나가 쌓여갔다.

마나는 곧 마력이 되었고 사지백해를 순환했다. 하나의 흐름이 러셀의 내부를 질주하며 원을 그렸다. 정수리부터 시작해 척추를 따라 흐른 다음 자시 정수리로 오르는 원.

돌연 러셀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웅, 하고 마력과 그 마력에 실린 의념이 현상을 빚었다. 그러자 나힐니르와 마지막 서리가 날아와 그의 앞에 둥둥 떠 있다가 천천히 그의 손에 안착했다.

오랜 시간 마력을 불어넣고 다루면서 이제는 그의 수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익숙해진 무기들. 그리고 이제 러셀은 마지막 서리와 나힐니르에 자신의 마력이 한줌이라도 남아 있다면 불러들일 수 있을 만큼의 조작력을 터득했다.

시야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지만 않는다면, 그의 마력 감지가 닿는 반경 내에서는 언제든 던져도 다시 손으로 되돌릴 수 있게 된 것.

원래 마지막 서리에 내장되어 있던 주문 또한 거의 수복되어가는 와중이지만, 이런 식으로 주문 없이도 돌아올 수 있게 만들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러셀이 마지막 서리와 나힐니르를 코트 속에 갈무리한 다음 일어섰다.

이제 오크 전쟁의 끝이 멀지 않았다. 일단 이 싸움을 일으킨 악마의 수족들을 족치면 그 뒤에 있는 놈에게 닿을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쿠웅-.

그때, 먼 곳에 울린 진동이 러셀에게 닿았다. 지금 러셀이 있는 곳은 라함 영지로부터 수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었고, 그렇기에 그에게 닿은 진동 또한 먼 거리를 건너오면서 파장이 약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러셀의 눈가가 찌푸려진 이유는, 약해진 파장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사악한 의념과 강대한 마력의 파동을 읽었기 때문.

곧장 안력을 돋운 러셀의 마안이 거리를 초월한다. 초점 바깥의 시야가 줄로 잡아당긴 것처럼 죽 늘어나고, 보고자 하는 광경은 한없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보인 것은 검은 마력으로 인해 덮인 결계. 그의 마안도 꿰뚫어볼 수 없을 만큼 촘촘하고 밀도 높은 마기의 결정체다.

“드디어 엉덩이를 떼고 나왔나.”

중얼거린 러셀이 목과 어깨를 풀었다. 우두둑, 하면서 근육과 관절 풀리는 소리가 났다.

회복된 마력은 절반 아래를 밑도는 수준. 하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전해져 오는 파장의 기세가 점차 강해지고 있는 것을 보아, 시간을 더 들일 여유는 없었다.

사실 이 정도까지 마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영역에 대한 그의 지배권 강화와, 고양된 정신과 영혼이 한 층 더 세계에 호응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이 올랐기에 가능했던 것.

위이이이잉-!

체내에서 활성화된 마력이 의지에 따라 폭발적으로 꿈틀거리고. 러셀의 전신으로 유형화될 정도의 자청색 마력이 아지랑이를 피워올린다.

터벅터벅, 하고 걸어가던 그의 신형이 어느 순간 훅,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녹음이 우거진 숲 사이를 자청색의 신형이 쏜살같은 모습으로 질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