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16화 (117/225)

116화 오거 (2)

크레이터 속에서 두 개의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비쳤다. 그 정체는 서로 주먹과 손을 맞잡고 있는 러셀과 오거 라쉐였다.

러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줄어들었다. 오거, 라쉐의 커다랗던 키와 덩치가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것이었다.

그렇다고 러셀보다 작아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6미터에서 3미터 정도로 절반가량 줄어들었을 뿐, 여전히 러셀보다 1미터는 더 큰 키와 덩치였다. 다만 처음 나타났을 때가 워낙 커다랬다보니 지금의 줄어든 모습이 더 이질적으로 느껴질 뿐.

꾸드드드득.

현재 러셀의 오른 주먹은 라쉐의 왼손에, 라쉐의 오른주먹은 러셀의 왼손에 막혀 있는 상태. 그 상태로 힘겨루기를 이어가자.

콰드드드드드드드-!

대지가 밀려나기 시작한다. 두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가 내뿜는 마력파에 이미 깊게 파인 크레이터가 더 넓어지고, 모래가 튀며, 나무뿌리가 드러났다가 곧바로 바스러졌다.

“이제 정신 좀 차렸나?”

러셀이 말했다. 땅이 부서지고 공기가 왕왕 울리는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음. 그러나 이유는 있었다.

러셀을 보고 있는 오거의 눈에 아까처럼의 흉흉한 살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신은 아까부터 차리고 있었지. 그렇지 않다면 통성명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

“입과 성대만 유일하게 뜻대로 움직일 수 있던 것 같았는데.”

라쉐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눈썰미가 좋군.”

“그런 말 많이 듣지.”

“눈썰미가 좋은 것만으로는, 그 악마에게서 살아남을 수 없다.”

“누가 죽어?”

순간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서로 밀기만 하던 상황에서 러셀이 왼쪽 팔에 힘을 빼버리자 라쉐의 우반신이 딸려왔다.

러셀의 무릎이 커다란 오거의 복부를 올려 차자 그 거구가 공중으로 훙- 떠올랐다.

떠오른 라쉐를 놓치지 않고 바닥을 박차 오른 러셀이 주먹을 쏘아내고. 라쉐 또한 불안정한 자세에서 용케 주먹을 뻗었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자 고리형의 충격파가 울리며 나뭇잎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쿵, 하는 소리가 시간차를 두고 두 번 울렸다. 허공에서 한 번, 그리고 라쉐가 바닥에 처박히면서 한 번.

“쿨럭, 쿨럭.”

구덩이 속에서 라쉐가 피를 토해냈다. 끈적한 검은 피와 내장 조각이 축축한 숲의 땅 위에 떨어졌다.

“그래······. 확실히 여기서 죽는 건 그대가 아닌 것 같군. 켈파그가 길길이 날뛸 게 여기서도 훤히 보이는 듯해.”

“켈파그가 그 대주술사인가? 겔리오투스와 거래, 혹은 계약한?”

“꽤 많은 걸 알고 있군. 쿨럭, 쿨럭!”

러셀의 마안이 오거의 신체를 훑었다. 라쉐의 체내에 비정상적으로 모여있던 생명력이 차츰 흩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 마지막 서리를 던진 다음 지근거리로 붙어서 내부에 충격을 줬을 때부터 라쉐의 내부는 엉망이었다. 라쉐의 체내에도 생명의 돌이 있었지만, 러셀에게는 그 돌을 상대하며 얻은 경험이 적지 않았다.

광야에서 만났던 마적 떼들, 마을에서 싸웠던 흑마법사, 그리고 이곳에서 오크 쟈드무를 죽인 것까지. 그 모든 경험은 러셀의 머리와 신체에 차곡차곡 정리되었고, 이제는 가장 효율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법까지 깨우친 후였다.

지금 라쉐의 몸속에 들어있는 생명의 돌은 러셀의 내가중수를 이용한 권격에 타격을 입고 자체적인 회복 상태에 들어가 있는 중이다.

돌 자체의 용기가 깨져서 그 힘이 줄줄 새고 있었고, 제대로 응집되지 못한 마나와 마력은 그저 전신에서 흘러나와 퍼지기만 할 뿐 쓸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했다.

라쉐의 키와 덩치, 근육이 줄어들고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오는 것 또한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에 원 상태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문득 라쉐가 말했다.

“우리 종족을 아는가?”

“오거?”

“그래.”

러셀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남들이 아는 만큼은.”

“잘 모른다는 말을 고상하게 하는군.”

라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용이 사라지고, 거인이 쇠락한 지 수천 년. 용의 후손들, 용족은 대륙의 구석구석에서 피의 끌림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 그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야. 태생부터 강력한 마법의 재능을 타고나니까. 하지만 거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지. 마법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가졌을 뿐. 남은 종족들은 번성하지 못하고 하나 둘 씩 시선에 들지도 못한 채 멸종하다가, 오거만이 희미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너도 조상을 찾고 싶은 건가?”

라쉐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것을 찾는데는 관심없다. 다만 나는 더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숲이나 산에서 짐승들을, 떼로는 인간을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의미 있는 일을. 삶을 살면서 하나라도, 세상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러셀은 오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옅은 회색의 피부와 우둘투둘한 피부. 험상궂은 얼굴과 뭉툭한 눈, 코, 입. 약간 뾰족한 귀.

“그리고 지금 그걸 찾은 듯하군.”

“그게 뭐지?”

“러셀, 너와 싸워서 이기는 것. 지금의 내가 찾은 삶의 의미다. 이기지 못한다면 이후의 삶은 이어지지 못할 테니.”

라쉐가 우뚝 서자 그의 몸을 중심으로 강렬한 마력파가 휘몰아쳤다. 러셀은 그것이 자신의 남은 생명력을 모두 불태워서 만들어낸 마력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라쉐의 손이 천천히 쥐어지며 굳고 커다란 주먹을 만들었다. 휘몰아치는 마력파는 그 주먹에 집중되며 웅웅- 떨리는 소리를 냈다.

오거의 주변으로 흙이 파바박- 파헤쳐지며 알갱이를 사방에 흩뿌렸다. 나무들이 휘청거리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나뭇가지에서는 나뭇잎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다가 마력파의 와류를 따라 소용돌이를 그렸다.

러셀은 전신에 와닿는 찌릿찌릿한 마력을 느켰다. 피부가 저릿저릿했다. 죽음을 결심하고 남은 생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의지는 이렇게 강력한 것이었다.

“의미는 어디서도 찾을 수 있지. 내 의미는 별거 아니야.”

그저 드넓은 하늘 아래서, 굴곡진 땅을 걸으며. 예상치 못한 일을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또 예상하지 못한 인연들을 만나고.

그것이 현재 그의 의미 전부였다. 그리고 그 전부는 예전에는 이루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윽고 러셀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파가 라쉐의 것과 충돌을 시작했다. 서로의 빈틈을 찾는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한 번의 공격을 위한 인내의 시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허공에서는 파직, 파직하고 불티 튀는 소리가 울렸다. 불티는 차츰 퍼벅, 퍽 하면서 가죽을 때리는 소리로 커져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공수를 교환하듯이 격렬했다.

사라졌던 바람의 정령들이 새로운 흐름을 읽고는 다시 돌아와 광란의 춤을 추었다.

라쉐의 마력은 대기와 대지를 짓누르고, 서 있는 모든 것을 주저앉히려는 듯했다. 오거의 주변으로는 바람조차도 불지 못하고, 정령들은 일정한 경계 바깥에서만 얼쩡거릴 뿐 안으로는 침투하지 못했다.

러셀의 기파는 짙은 어둠처럼 끈끈하면서도 밀도 있게 주변의 공간을 잠식해나갔다. 이질적인 근원에 놀란 듯이 풀과 들꽃이 흔들림을 멈췄고, 고요해졌다.

서로 다른 조용함을 내포하고 있는 폭풍 속의 눈과 달리 그 주변은 완전히 황폐화되어가고 있었다.

라쉐의 눈이 마력에 힘입어 붉게 타오르고, 러셀의 눈은 자색으로 고요하게 빛났다.

“크, 흐으윽······.”

오거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분명 그의 힘이 더 강하게 러셀을 압박하고 있어야 하는데. 러셀은 아까와 별달리 다를 것 없는 자세로 서서 라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짓을 먼저 하지 않음에도 라쉐는 압박감을 느꼈다. 대기는 여전히 광포한 울음을 내지르며 부딪치고, 마찰하며, 충돌하고 있었다.

압도당했다는 것을 떨쳐내기 위해, 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크아아압!”

바닥이 펑 하고 터지고 거구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력을 내포한 채 거리를 좁혔다. 왼다리를 내딛고, 오른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허리를 비튼 다음 어깨와 팔꿈치를 한 껏 뒤로 보낸 자세.

왼주먹은 러셀에 의해 너덜너덜해져 있으니, 지금 발리스타에 걸린 화살처럼 장전된 주먹은 오른팔의 것이었다.

오른 어깨와 그 아래로 이어져 있는 상박, 전완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모든 생명력과 마력을 집약시킨 라쉐의 오른 주먹은, 그 공간마저 휘게 만들 정도였다.

러셀은 가만히 서 있었다. 두 다리를 적당히 넓게 잡고, 양팔을 늘어트린 평범하면서도 편안한 자세. 어디서도 지금 날아오는 공격을 붙잡기에 적합하지 않은 태도였다.

라쉐는 그런 자세에 의문을 품지도, 현혹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삶을 담은 주먹을 내질렀을 뿐이었다.

오거의 뒤쪽으로 세 겹의 충격파가 터지며 지나온 길을 박살냈다.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주먹이 러셀에게 작렬한 것은 바닥이 터지고, 비산한 흙덩이가 채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그야말로 찰나에 찰나를 인식하지 않으면 성립조차 되지 않는 싸움.

-!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거대한 굉음.

소리를 뛰어넘은 무언가가 숲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졌다. 번쩍이는 섬광이 사방을 물들이며 완벽한 구형의 폭발로 급속도로 확장해나갔다.

주체할 수 없는 속력을 부여받은 공기가 부여받지 못한 바깥의 공기와 만나 하얀 벽을 층층이 만들며 울부짖었다.

공간을 관통하는 충격파에 의해 생물과 무생물 할 것없이 모든 것이 으깨졌다.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공격의 여파는 수백 미터 바깥까지 그 소리와 진동을 퍼지게 만들 정도로 아득했다.

다행히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기에 전장까지는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이의 크레이터 위에서 라쉐는 주먹을 내뻗은 자세로 굳어 있었다. 러셀은 그 주먹을 흘려내고, 자신의 공격을 라쉐의 가슴팍에 명중시킨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신체 내부는 거대한 힘을 흘려낸 여파로 흔들렸다. 위험할 정도로 달아오른 마력 회로가 여기저기서 균열을 호소하고, 마력은 텅 비어버렸다.

방금의 공격은 러셀조차 정통으로 맞으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영역의 발동과 마안의 흐름을 읽는 눈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육체가 따라주지 못했다면 죽었을 것이었다.

“그대는 인간이 아니다. 알 수 있어. 그대의 몸속에는 이형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

“악마가 말해줬나?”

“그래.”

라쉐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무릎이 꺾이고, 완전히 부러져 나간 관절과 근육, 뼈가 축 늘어진다. 그에 그치지 않고, 신체의 말단이 바스라지더니 가루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허락되지 않은 공격을 펼치려 한 대가였다.

“나는 인간이다.”

“왜? 넌 우리와 같다. 외견은 그들과 비슷할지 몰라도, 그 본질은 용과 거인, 신과 악마, 괴수와 괴물. 이형의 것이다. 이 차원의 것이 아니야······.”

러셀은 말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남들의 시선과 입방아로 내 본질을 정의할 수는 없어. 날 정하는 건 나 자신이다. 남이 아니라.”

“그런······ 가.”

곧 완전히 가루가 된 라쉐의 시체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그리고 러셀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감히 햇살을 허락하지 않는, 드넓고 촘촘하게 가리워진 나뭇가지. 그 아래 큼직한 공터와 함께 오크들이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그 안쪽으로는 바깥의 상황을 살피는 주술사들이 있었다.

주술사들의 얼굴은 그 피부색에 어울리지 않게 검고 어두웠다. 이전까지의 희망과 낙관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앞에는 먼 거리도 무리 없이 보여줄 수 있는 마법의 거울이 떠올라 있었고, 그곳에 오거 라쉐와 한 인간 전사의 싸움이 비쳤다.

굉음과 함께 연신 터지는 충격파. 6미터의 거인이 시종일관 작은 인간을 압도하는 듯하지만. 인간은 거대한 검으로 주먹을 막아내고, 때로는 빗겨내면서 유효타를 날리고 있었다.

두 배 이상 큰 상대와 접전을 벌인다는 것만으로 대주술사 켈파그의 계획은 어그러진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애초에 라쉐의 투입은 전혀 예정에 있지 않았다. 라함 영지의 점령은 온전히 네 개의 오크 부족과 우룩크들, 그리고 주술과 마기로 강화된 변종 짐승들과 괴물들을 통해서만 이뤄져야 했다.

그 정도만 해도 일개 영지를 차지하는 데에는 차고 넘치는 준비라고 보았던 생각은, 단 한 명의 남자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

사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의 공기. 불안과 두려움의 불씨가 피부를 콕콕 찌르는 것을 느끼며 오크 주술사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섯 개의 꼭짓점에 돌로 정교하게 쌓여진 석탑. 그리고 그 아래 바닥에 그려진 다양한 룬어들.

주술진의 중심에는 무릎을 꿇은 채 지팡이를 부여잡은 켈파그가 있었다. 눈은 허옇게 돌아가 있으며 입에서는 끊임없이 음산하고 낮은 주문 소리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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