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10화 (111/225)

110화 오크

***

제스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러셀에게 걸어왔다.

“콜록, 콜록. 어우. 꽤 독한 걸 피우시나 봅니다.”

“그리 독하진 않아. 한 대 피워보겠나?”

“아닙니다.”

러셀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에란디스 영지에 있을 때 넉넉히 샀던 덕분에, 담배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모두 평범한 담배가 아니라 마력을 먹고 자라난 풀, 마력초를 빻고 다져서 속을 채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에는 푸른 입자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좋으십니까?”

“뭐, 기분 전환은 되지.”

두 사람은 잠깐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춤추는 곰 바깥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저문 밤하늘에는 중천에 달이 떴다. 가늘어졌다가 다시 차오르는 푸른 달. 총총히 박힌 별빛들.

그 아래에는 여전히 자리를 접지 않은 장사치들이 큰 소리로 호객하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있었다.

날씨는 약간 습하고 더웠다. 계절도 계절이지만, 그보다는 도시의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 때문이다.

바닥에 깔끔하게 깔린 판석 위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차들이 좌우로 오갔다. 짐수레를 끌고 다니는 것들도 있고, 사람을 태운 커다란 것들도 보인다.

길거리가 점차 환해졌다. 밤 장사를 시작하는 창관과 여관, 주막, 선술집들이 각자 건물 벽에 달린 등에 불을 붙인 것이다.

벌건 숯이 든 양철통을 기다란 막대기의 좌우에 줄로 매달아 놓고 가는 청년, 머리에 보자기로 싼 짐을 얹은 여인, 하루의 일을 마치고 주막으로 향하는 중년의 남자들.

러셀은 담배의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세계가 달라도, 삶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저들 모두 개개인의 생각과 신념,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예정된 죽음을 향해 착실히 걸어가고 있었다.

길은 모두에게 평등했다. 걸어가는 자든, 뛰어가는 자든, 기어가는 자든. 다만 그 길을 마음대로 끊거나, 가로막거나 하는 자들이 문제였다. 그런 것들은 언제나 골칫거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러셀은 그런 골칫거리들에게는 언제나 주먹과 날이 잘 든 칼이 직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 나온 것 아닌가.”

러셀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제스의 시선이 러셀의 옆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사실은 처음 제스를 만났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정식 성기사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임명된지 1년이 되지도 않았는데 단독 임무라니.

성기사들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2인, 3인 정도의 인원과 함께 움직인다고 알고 있다. 과연, 제스가 말을 시작했다.

“사실 라함 영지에 온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하일른 님에 대한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나?”

“예. 정확히는,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무슨 말이지?”

“하일른 님의 한 달 전 마지막 행선지가 이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감쪽같이 사라지셨죠.”

“하일른 경이 행방불명이라고?”

러셀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하일른. 하일른 그라시아스. 성녀 후보 중 하나인 엘레노아 그라시아스의 하나뿐인 오빠이자 광명교의 성기사인 남자였다.

처음 그를 만난 건 구울과 구울들이 합쳐진 변이체와 싸우고 있을 때. 방패와 검을 잘 다루고, 강력한 신성력을 다룰 줄 알던 성기사였다. 그런 그가 행방불명이라. 러셀이 물었다.

“어떻게?”

“그때 러셀 님의 도움으로 잡았던 헤로케닌의 시체에서 나온 붉은 돌 조각 있잖습니까. 그 돌에 대해 알아보시다가 목적지를 이곳으로 잡으셨는데, 이후 교회로 돌아오는 정기 보고가 끊겼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조금 더 깊게 빨아들였는지, 내쉬는 숨결이 짙었다. 그 속에 담긴 마력의 잔여물이 대기 중의 마나와 맞닿아 푸른 발광을 반짝이다가 사그라졌다.

“그건 생명의 돌이라고 한다.”

“예? 뭐가 말입니까?”

“붉은 돌. 헤로케닌이라는 자의 시체에서 나왔던 것. 그리고 보잘 것없던 마법사를 순식간에 무시 못 할 흑마법사로 만들어준 것.”

“그 돌이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난 그 돌을 만드는 지식을 퍼트리는 악마의 낮짝을 보러 온 참이다.”

제스가 눈을 크게 뜨고 러셀을 쳐다보았다.

“악마의 이름은 겔리오투스. 혹시 아는 이름인가?”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온 악마입니다. 나이는 짐작도 할 수 없고, 토벌을 하려 해도 감쪽같이 몸을 숨겨 그 위치도 찾을 수 없었죠. 그간 별다른 존재감을 내비치지 않았던 악마인데. 러셀 님은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러셀은 발밑의 그림자를 힐끗 보고는 연초를 마저 태웠다.

“여행하면서.”

제스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어떤 여행을 하셨는지 짐작도 되지않는군요.”

잠깐 침묵이 연기처럼 떠돌았다. 밤중에도 활기차게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러셀이 마지막 연기를 내쉬었다.

“두려운가?”

“······불안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제스가 양손을 꾸욱 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떨림을 멈출 수 없다는 것처럼.

“첫 임무입니다. 그리고 제 사수가 위험에 처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드루이드인 사라넨 님이나 러셀 님의 말대로라면 악마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솔직히, 자신이 없군요.”

“세상에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러셀이 남은 꽁초를 손가락 사이로 비볐다. 그가 발출한 마력에 의해 꽁초는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고민만 한다고 일은 해결되지 않아. 직접 움직여야지.”

“···역시, 그래야겠죠.”

“들어가지.”

“예.”

***

러셀은 3인실의 방에 들어서 있었다. 카이가 맞은편 침대에 누워서 코를 골며 자고 있고, 옆 침대에 누웠던 아엘라시스는 어느새 러셀의 옆구리에 붙어서 자고 있다.

아까부터 한숨도 자지 않고 밤을 보내던 러셀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이제 완연한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쪽빛이 점차 하늘을 푸르게 물들였다. 어둠만이 가득했던 방에 빛으로 인해 그림자가 구분되고 있었다. 빛이 환할수록 그림자 또한 짙어진다.

달그락.

러셀이 시선을 조금 내렸다. 언제 온 것인지, 작은 박쥐 한 마리가 창틀에 앉아 있었다. 러셀은 옆구리에 붙은 아엘라시스를 떼어내고는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문을 넘어온 박쥐는 곧 요염한 몸매와 미모를 지닌 여인이 되어 방바닥에 내려섰다.

“러셀.”

낮으면서도 부드럽고, 또한 고혹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있지?”

“오백이 약간 넘는 것 같더구나. 오크들이 단단히 준비를 했어.”

“위치는?”

“바로 코앞이다. 지금쯤이면 경비병들도 눈치채고, 영주에게 기별을 넣었을 것이다.”

“고생했군.”

“뭘. 다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인데.”

칼리아는 씩 웃으며 러셀을 슬쩍슬쩍 밀었다. 원래 아엘라시스가 누웠던 침대까지 러셀을 밀고서는, 그를 눕히고 위에 올라탔다.

러셀은 조용히 칼리아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곧 목에 입술이 닿는가 싶더니, 앙증맞은 두 개의 송곳니가 혈관을 파고 들었다.

꼴깍거리며 목울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3 분 후, 칼리아가 러셀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황홀한 얼굴이다.

“흐아아. 역시 맛있구나. 짜릿해.”

“너무 많이 마신 것 아닌가?”

“이틀 동안 숲을 뒤졌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지.”

그때 러셀은 여관으로 향하는 다급한 기척을 느꼈다. 묵직한 갑주를 입은 기사, 반델이었다.

-여기, 러셀이라는 이름의 투숙객이 있지 않은가?

-어, 반델 기사님? 이렇게 이른 새벽에, 무슨 일로.

-급하네! 몇 층에 있나?

-어, 3층에···.

다급히 종업원을 깨운 뒤 답을 얻은 반델이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러셀은 아직 피에 취한 채 헤롱거리는 칼리아를 내리게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래의 소란 때문인지 투숙객들이 머문 방들에서 잠결에 깬 사람들이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다.

“러셀? 이게 무슨 일이오?”

“후아아암······.”

카이와 아엘라시스도 마찬가지. 전사답게 카이는 곧바로 우둑거리며 목과 어깨의 굳은 근육을 풀고 있다.

“전쟁.”

“러셀 경! 여기 있는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반델이 나타났다. 차려입은 단단한 갑주, 투구와는 다르게 그 안에 들어있는 얼굴에는 끔찍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영주님이 자네를 부르시네.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러셀은 짐작하면서도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괴물들이네. 성벽 바깥으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괴물들이 포진해 있네.”

라함 영지의 외성은 다섯 개의 성탑과 그를 잇는 외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체적인 모양은 위에서 바라볼 때 오각형에 가깝다.

나선 계단을 타고 올라와 성벽 위에 지어진 겔러리에 올랐다. 이미 축축한 공기 속에서 타티아나 영주, 기사들, 병사들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들이 모두 좋지 않았다. 이 와중에 얼굴빛이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숲과 숲, 언덕과 구릉이 이어지는 지형의 높고 낮은 평야 위로 괴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저렇게 나란히 올 수가 없는 족속들이다.

하지만 칼리아가 가르쳐준 것처럼, 괴물들은 강력한 주술의 힘으로 지배당한 채 영지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마수와 괴물들 사이로 커다란 늑대를 타고 있는 오크들이 눈에 띄었다. 놈들의 숫자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러셀의 눈이 빛나며 오크들을 살폈다. 각자 커다란 칼과 도끼를 들고 조악한 가죽 갑옷을 입은 초록 피부의 거인들. 몇몇은 아예 마수에게서 벗겨냈는지 짐승의 머리를 투구처럼 덮어쓰고 있다.

투메룬에게서 들었던 오크 부족은 총 넷.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자리하고 있는 오크 부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지팡이를 들고 있는, 주술사로 짐작되는 적은 수의 오크 무리와 전사들 뿐.

‘부족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린다고 했었지.’

종족의 멸망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이긴 했지만, 그 해결 방안이 악마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망설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와주었군.”

무장을 마친 타티아나 영주가 올라온 러셀을 보며 말했다. 수심이 짙게 어린 얼굴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토벌대 조직은 힘들게 되었네.”

떨리는 영주의 목소리. 아마 죽음을 각오한 것이겠지. 그녀 곁에 자리한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용살자. 그대는 작년 칼리스덴에서 이와 비슷한 격전을 치렀다고 알고 있네. 혹시 조언을 부탁해도 되겠나.”

러셀은 성벽을 짚었다. 오래된 성벽이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단단해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와 보니 낡음이 돋보였다. 보수를 한 흔적이 있긴 했으나, 역부족이었던 듯 이곳저곳 바스러지고 깨진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토벌대는 예정대로 진행하십시오.”

“······뭐?”

영주의 의문성을 들으며 러셀은 성벽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마안으로도 흐릿하게 보이는, 불길한 마력의 소용돌이. 그것이 오크 주술사 무리, 그 중에서도 중심에 선 자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단, 토벌대의 인원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나와 카이입니다.”

그리고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러셀은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뒤에서 비명과 신음이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높다란 성벽에서 뛰어내렸음에도 그는 소리 하나 없이 바닥에 착지했다. 놀라운 균형감각과 신체능력, 마력운용의 조화였다.

뒤이어 쿵, 하고 갈색 피부의 오크가 바닥에 내렸다. 끙, 하고 저린 발목을 툭툭 땅에 문지르며 카이가 걸어왔다.

“계획대로 하는 것이오?”

“그래. 넌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러셀의 마안이 카이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붉은 선을 보았다. 그러자 그 붉은 선 또한 러셀을 쳐다봤다. 그 속에 깃든 미약한 신의 존재를 느끼며 러셀은 코트에서 대검과 도끼를 꺼내 들었다.

“악마를 끄집어 내보자고.”

***

충돌은 켈파그가 예상할 수 없는 때와 장소에서 터져 나왔다.

꽈아앙!

“무슨, 무슨 일이냐!”

“마, 마수 무리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뭐? 아직 침공은 시작하지 말라고······!”

“우리가 먼저 가한 게 아닙니다!”

다시 한번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하늘 높이 흩뿌려지는 육편이 후미에 있는 켈파그의 눈에까지 보였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다급히 지팡이를 휘두르자 허공에서 수분이 응집되며 멀리 있는 장소를 비춰주었다. 그곳에 검은 머리카락과 코트를 입은 사내가 있었다.

갑옷 하나 입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가볍고 유려한 몸놀림을 보이는 남자. 그러나 그의 손에 들린 대검과 도끼는 마치 분쇄기처럼 마수와 고블린, 임프들을 갈아버리고 있었다.

***

외뿔이 달린 거대한 곰이 달려들었다. 눈은 맛이 갔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렀다. 주술에 의해 미쳐버린 짐승들은 그 곰 뿐만이 아니었다.

표범, 늑대, 거대한 구렁이까지 다종다양했다. 러셀은 그 주둥이들에 달린 날카로운 이빨을 향해 자신의 이빨과 발톱을 들이밀었다. 물론 그의 것이 더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체내의 마력이 웅혼하게 용솟음치고, 근육과 신경은 의지에 따라 한 치의 주저없이 확신을 담아 움직였다.

대검이 곰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도끼가 늑대의 머리를 찍었다. 발길질에 배가 터진 표범이 날아가 다른 마수들을 볼링핀처럼 쓰러트리고 구렁이는 주먹질에 몸통 중간이 끊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네 마리의 마수가 명을 달리했지만, 전장에 있는 놈들은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덮쳤다. 그리고 덮치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죽었다.

“불-칸-!”

한쪽에서 고함과 함께 거센 불길이 치솟았다. 카이의 전신에서 붉은 신성럭이 흘러넘쳤다. 카이가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마수들이 우르르 밀려났다. 그리고 성력에 닿자 깽깽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악마의 마력이 성력에 반발하는 것이었다.

마수와 괴물들은 순식간에 해체되어 평야 위에 스러졌다. 정도를 벗어난 힘은 불합리한 폭거를 강요했다.

콰르르르릉!

러셀의 신형이 벼락에 휘감길 때마다 수십 마리의 마수가 잘게 쪼개져 죽었다. 러셀은 달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몸을 빼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그저 우직한 전차처럼 밀고 나갔다. 주술로 인해 흥분한 마수와 괴물들은 전장에 가득 찬 피 냄새에 취한 채 부나방처럼 러셀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예정된 결말을 맞이했다.

횡으로 그어지는 반경에 자리한 모든 마수들의 허리가 양단되고, 그러면 공간이 생겼다. 한발자국 내딛었다.

그 다음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서는 고블린과 임프, 코볼트들이 쏘아내고 내지르는 화살과 여러 날붙이를 상대해야 했다.

왼손에 들린 도끼, 마지막 서리가 냉기를 토하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굉음과 함께 지면이 뒤집어지고, 뒤집어진 지면은 얼어붙은 채 방사형으로 뻗어나갔다. 그 반경에 있던 놈들은 얼음 동상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동족들의 발길질에 쓰러져 부서졌다.

두 발자국을 내딛은 다음, 세발자국 뒤에는 더 많은 마수들이 자리했다. 러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몰려오는 파도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벼락이 맺힌 대검에 의해 파도가 갈가리 찢어졌다.

그 무지막지한 공격들을 뚫고, 기어이 러셀의 신체에 닿은 놈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또한 코트의 방호력을 뚫지 못하고 버르적거리다가 러셀의 팔꿈치에 머리가 터져 죽었다.

막 수십 마리의 마수들을 전격으로 죽였을 때, 공중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울렸다.

“이놈!”

거대한 존재감이 쏘아져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던 러셀이 늦지 않게 대검을 들었다.

콰앙!

그가 서 있던 지반이 움푹 내려앉을 정도의 충격. 러셀은 자신의 대검에 칼을 대고 있는 커다란 오크를 바라보았다. 전신에서 검푸른 흑마력을 뭉클거리며 뿜어내고 있는 초록 피부의 오크.

러셀은 손목을 비틀어 위에서 내리 누르던 칼의 진행방향을 틀었다. 카가가각 하며 칼날 갈리는 소리가 나며 오크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러셀의 도끼가 오크의 측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큭!”

떠엉!

가까스로 칼을 틀어 방어하는 데 성공한 오크가 주루룩 미끄러졌다. 무리하게 움직인 대가로 근육과 뼈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단번에 상하체가 분리됐을 것이다. 윙윙 떨리는 칼을 힘주어 잡은 오크가 러셀을 바라봤다.

타고난 전사이자 모두를 대표하는 족장, 쟈드무는 경악과 불신의 눈으로 눈앞에 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족장의 자리에 선 오크인 그도 감히 실력을 알 수 없는 존재가 앞에 있었다.

쟈드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쟈드무다. 너는 누구냐?”

“러셀.”

“러셀?”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어차피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본능이 소리치고 있다. 악마의 마력으로 이전보다 확연히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승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없었다.

“네가 따르는 악마가 날 알고 있을 것이다.”

“뭐?”

쟈드무가 흠칫 놀라는 사이, 러셀의 마안이 쟈드무를 살폈다. 역시, 몸속에 붉은 수정, 생명의 돌이 있었다.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넋들이 보인다. 적어도 수십, 혹은 수백 이상의 생명이 저 작은 돌 하나를 위해 갈려 사라졌다.

“연결되어 있다면 전해라. 머리통을 떼어주겠다고.”

“······정신이 나간 인간이로구나.”

쟈드무의 칼이 러셀을 겨눴다. 러셀 또한 도끼를 코트에 넣은 다음, 나힐니르 하나만 남긴 채 한 손으로 들었다.

“누가 정신이 나갔는지는 말로 정하는 게 아니다.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지. 와라, 악마의 졸개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