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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97화 (98/225)

97화 그린 스킨들

부서진 목책 너머의 마을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성한 집들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 같이 무너졌거나 화재에 삼켜진 흔적.

집들의 수를 세보던 파렐스가 말했다.

“사람이 많이 살던 마을은 아닌 듯합니다. 많아 봐야 백 명 조금 넘겠어요. 흑마법사가 들이닥쳤다면 그리 큰 저항은 못 했겠군요······.”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검게 굳은 땅바닥을 쳐다봤다. 아마 핏자국일 것이다.

이루실과 파렐스는 마을의 길을 따라 걸으며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고, 그렇기에 마을의 고요는 더 부각되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이대로라면 몇 시간이고 조용할 것을 할기에 파렐스는 겨우 말을 꺼냈다.

“뭔가······ 조용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응.”

그녀의 단답에 파렐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루실은 지금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마력의 잔재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많은 걸 알지는 못했지만, 몇 개는 단서를 얻었다. 바닥에 남아있는 낮고 음습한 기운. 천리를 거스르고 성질을 뒤바꿔버리는 어두운 힘. 흑마력이다.

“흑마법사.”

“예?”

“흑마법사가 이 마을에 왔어. 이자의 소행인 것 같은데.”

“흑마법사라면······, 악마 숭배자잖습니까.”

“응.”

“왜 흑마법사가 이런 작은 마을에 온 걸까요?”

“다양하겠지. 시체를 수급하려 했거나, 주문, 마법력 향상을 위한 제물을 보충하러 왔다거나.”

마법의 원류가 용이라면, 흑마법의 원류는 악마. 그게 통념상 굳어진 상식 중 하나였다. 그리고 흑마법은 흑마력으로 빚어지는 경우가 많다.

흑마력, 혹은 음의 마력라고도 불리는 이 힘은 인간의 감정 중 부정적인 것을 골라 먹는 종류의 것이다.

통상의 원소 마법에 쓰이기에는 효율이 좋지 않지만 반대로 사령술과 강령술, 여타 흑마법에는 압도적인 효율을 보인다.

파렐스는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시체가 보이진 않는군요. 흑마법이라면 시체를 갖고 장난치는 게 보통이잖습니까.”

“계속 가보지.”

두 사람은 곧 마을의 중앙에 다다랐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었기에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세상에.”

파렐스의 감탄. 마치 두 명의 거인이 날뛴 것 같다. 거기에 깊이가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무너진 지형과 그 주위로 원형으로 박살 나 있는 건물들.

그리고 본래 형태가 어땠는지 짐작도 안 가는 거대한 고깃덩이. 새까맣게 타버려 마치 석탄 같았다.

“어, 이거 혹시.”

“짐작이 맞을 거야.”

이 작은 마을에서 이만한 전투가 일어났다고는 믿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루실은 다 무너진 검은 잔해를 바라보았다. 토대와 주춧돌, 그리고 정오의 태양이 바로 위에 서는 자리. 광명교의 교회였을 것이다.

“파렐스.”

“아, 옙.”

그가 다가와 교회의 잔해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른 집에는 없는데, 여기에 온전한 시체가 많군요. 누군가 조종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 누군가 이 교회에 시체를 안치시키고 불을 놓았어.”

“꽤 배려심 있는 사람인데요.”

“그리고 그건 아마 내 동생인 것 같아. 저 뒤의 흔적은 동생이 흑마법사와 싸운 흔적이야.”

파렐스가 고개를 돌려 이루실을 쳐다봤다. 이루실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동생? 러셀이라는 그분이요?”

“응.”

“어떻게 아시는데요?”

“익숙한 마력의 잔재, 향.”

“······고작 그걸로요?”

이루실은 파렐스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 남동생과 관련된 주제에서 의심어린 말을 하면 꼭 이렇게 노려보고는 했다.

아무래도 그 동생에 대해 갖고 있는 확신이 의심받는 것이 불쾌한 모양.

파렐스는 새삼 주변을 돌아보았다. 완전히 파괴된 현장. 고작 이런 현장이 두 존재의 싸움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두 마리의 오거가 서로 싸웠다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 지경.

강대한 힘들이 부딪친 자리는 필히 마력의 잔재를 남긴다고 하니, 이루실이 그런 흔적을 느꼈다면 그런 것 일테다.

“어쨌든, 방향은 맞게 찾아온 것 같네요. 그 흑맥주 잘하는 집에서도 동생이라는 분에 대해 잘 말해줬잖습니까.”

그들은 며칠 전 에란디스 영지를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다. 던전과 유적이 이미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파렐스는 실망했지만, 그곳에서 뛰쳐나왔다는 흡혈귀 괴물들과 그로 인해 벌어진 소동은 충분히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수백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붉은 달밤의 이야기. 그 와중에 영지민들을 대피시키던 영주의 아들이 죽었다.

흡혈귀들의 습격은 마침 유적을 연구하려 왔던 마탑의 마법사들에 의해 처리되었다.

그러나 이루실과 파렐스는 그 뒷이야기를 검은 보리 향 여관에서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난쟁이와 남매가 운영하는 여관은 특이하게 고양이와 쥐 수인을 종업원으로 두고 있었다. 수인을 종업원으로 쓰는 것도 놀라웠지만, 사실 파렐스는 그 흑맥주 맛이 더 놀라웠다.

괜스레 그 맥주 맛을 떠올린 파렐스가 입을 다셨다.

“거기 참 맛 좋았는데.”

그건 이루실도 인정하는 바였다. 동생을 찾기 위해 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그런 맥주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야겠죠?”

“그래. 그나마 멀쩡한 집 좀 찾아봐. 난 조금 더 보고 있을 테니까.”

“예이.”

파렐스가 집을 찾아보러 간 사이, 이루실은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직 남아있을 리 없지만, 동생의 채취 한 가닥이라도 맡을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그런 건 없었고, 흙과 풀, 그리고 바스라진 교회에서 나는 탄내만이 맡아질 뿐이었다.

아쉽지만, 괜찮다. 이제 정말 그를 찾을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했으니까.

***

“코헨, 정신 차려! 정신줄 놓으면 그대로 죽는 거야!”

“으으, 으으윽. 브리, 브리타. 나 놓고 가······.”

“등신아, 정신 차리기나 해!”

브리타는 코헨을 부축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숲의 흙바닥을 무수히 덮고 있는 것은 굵고 얇은 나무의 뿌리들이었고, 그렇기에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아차 하는 순간 그대로 발목이 걸려 넘어질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해는 이미 저문 후. 숲의 밤은 이르다. 벌써 어둠이 코앞까지 닥쳐온 상황에서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케륵! 케르륵!

브리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의 뒤로 들리는 악귀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이익!”

브리타는 숲 안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보다 큰 코헨을 부축하면서 동시에 발밑을 살펴 평탄한 길을 골라 뛰고 있는 중이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인 주제에 힘은 더럽게 세다며 놀림 받았던 것이 지금은 두 용병의 목숨을 구해주고 있었다. 브리타가 이를 갈았다.

“개 같은 놈들, 그린스킨이 저렇게, 많을 거라고는, 말 안 했잖아! 돌아가면, 시바, 다 죽여버리겠어!”

다리를 놀리느라 부축하랴 숨이 가빠오고 내뱉는 말은 끊어졌다. 또 말은 그렇게 해도, 브리타는 그게 불가능한 소망임을 알고 있었다.

둘을 제외한 용병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예상치 못하게 괴물들의 수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괜찮으리라 여겼던 전선은 괴물들의 수가 줄지 않고 늘어가기만 하자 빠르게 붕괴했다.

돈과 신뢰, 계약 의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한 건 목숨인 법. 정신을 차렸을 때는 브리타와 코헨 말고는 모두가 도망친 후였다. 그러다 코헨이 화살을 맞았고, 지금 이렇게 쫓기고 있는 처지다.

어두운 숲속은 미로 같았다. 중구난방으로 자라난 나무들은 계속해서 방향감각을 어그러트리고, 드리운 나뭇가지는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무성한 수풀들은 어느 낭떠러지와 비탈길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으면 십중팔구는 목숨을 잃는다. 썩은 나무 정령, 늪의 괴물, 고블린, 코볼드, 하피 등 다종다양한 괴물들이 살고 있기 때문.

물론 놈들의 서식지는 겹치는 경우보다 그렇지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에 그 사잇길만 잘 아는 베테랑 용병, 모험가라면 사지 하나 떨어지지 않고 살아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브리타와 코헨에게 그런 지식은 개뿔도 없었고, 그들을 쫓는 악귀들은 훤히 알고 있었다.

케르르르르!

쉬익!

“우악!”

뒷편에서 들린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브리타는 냅다 앞으로 굴렀다.

부축하고 있던 코헨이 덩달아 구른다. 한 바퀴를 도는 브리타의 눈에 검은 선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코헨의 옆구리에 꽂혔고, 아직 꽂혀있는 그 화살이다. 혹시 몰라 뽑지도 못한 상태로 두고 있었다.

화살은 짤막한 고블린의 팔다리에 맞게 자그맣다. 하지만 화살촉에 독이라도 발라져 있던 것인지, 코헨는 팔다리를 잘 못 가누고 눈앞이 뱅글뱅글 돈다는 둥 정신을 못 차렸다.

찰나의 상념 이후, 브리타는 어쩐지 한 바퀴를 구르는 과정이 생각한 것보다 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브리타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비탈길 위에서 몸을 날린 것이었다.

아찔한 추락감 이후, 등짝에 매운 고통이 닥쳤다.

“시, 켁, 바, 욱, 악, 악, 악!”

한 음절씩 끊어지는 비명. 그 와중에도 브리타는 용케 코헨을 껴안으며 굴렀다.

따돌림을 당했을 때도, 괴물에 의해 부모님이 죽었을 때도 자신을 챙겨주었던 친구다.

용병이 되어 돈을 벌고 끗발 좀 날리면서 마을로 금의환향하겠다는 자신의 무모한 계획에도 동참해준 친구를 여기서 잃을 순 없었다.

털썩!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비탈길이 끝나고, 브리타는 다시 단단한 바닥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우우우······.”

전신 이곳저곳 안 아픈 데가 없다. 그나마 어디 부러진 곳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으으으······.”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든 브리타는 문득 주위가 밝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슬며시 눈을 떴다. 광원의 정체는 찔끔 눈물이 날 정도로 밝은 모닥불이었다.

그 주위에 누워있거나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눈에 이해하기 힘든 모습의 일행이었다.

인원은 총 셋이었다. 오크 하나, 소녀 하나, 남자 하나. 그들이 타고 다니는 것인지 덩치 큰 말도 두 마리가 저편의 나무 아래 서 있었다.

오크는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었고, 소녀도 남자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소녀가 베고 있지 않은 다른 무릎을 세운 채 앉아서 브리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브리타는 잠시 말을 잊었다. 모닥불의 일렁이는 불길 너머로 보이는 남자는 검은 머리카락과 신비하게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쪽이 아까부터 숲을 소란스럽게 달리던 사람이군.”

“어? 어, 그래. 그런데······.”

촤르르르! 투두둑, 투둑!

그때 비탈길 위를 구르는 돌과 흙덩이 소리가 대화를 끊었다.

“아! 이, 이럴 때가 아냐! 괴물들이 온다고!”

브리타는 금세 그들을 쫓고 있던 고블린들을 떠올리고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수십 마리의 녹색 덩어리들이 제각기 지닌 무기를 들고 비탈길의 경사진 면에서 뛰어오른 것이다.

브리타는 이를 악물며 오른손을 어깨 뒤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칼을 뽑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모닥불 주위의 여행자들과 브리타를 덮치려던 고블린들이 공중에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다.

“······허?”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같은 풍경에 브리타가 숨을 토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데굴데굴 구르는 고블린들의 눈알에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이 숲에는 유난히 그린 스킨들이 많군. 아까 낮에도 그렇더니.”

그런 상황 속에서 남자의 태연한 목소리와 말은 두려움을 자아내기 충분한 것이었다. 남자는 무릎을 벤 소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누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왜 이렇게 많은지 궁금하던 차였는데. 잘 됐어.”

남자의 손에는 어느새 하얀 도끼가 들려있었다.

“그쪽이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군.”

***

”마, 마법사셨어요?“

브리타는 아까 반말을 했던 자신을 때려주고 싶었다. 고블린 수십 마리를 공중에 띄우고 고정시키는 기예를 보여준 남자는, 그 서슬 퍼런 도끼로 순식간에 괴물들을 학살해버렸다.

그렇다, 학살. 그 사납게 달려들었던 괴물들이 옴짝달싹도 못하고 가만히 목이 성둥성둥 잘리는 광경이란.

공중에 박제된 고블린들은 곧 둥둥 날아가더니 숲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야영장에는 어떤 피나 살점도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다른 짐승들이 꼬일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마법사인지, 아니면 기사일지 모르는 남자는 이제 코헨의 상처까지 봐주고 있었다.

”아니.“

화살을 뽑은 그는 울컥 검은 피가 솟구치는 상처에 손바닥을 댔다. 하얀빛이 반짝이고, 남자가 손바닥을 떼자 상처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나 코헨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피부는 푸르딩딩했다.

소란에 깬 오크가 상처를 보며 말했다.

“독이로군. 고블린 독이라면 아마 마비 쪽이겠군. 따로 약초를 찾아서 먹이거나, 아니면 혼자서 이겨내게 하는 수밖에 없다.”

브리타는 오크에게 감사인사를 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예. 감사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이제 설명을 좀 들을 수 있을까.”

브리타와 코헨은 라함 영지가 대대적인 괴물 토벌을 알리며 용병들을 모집했을 때 응했던 자들이었다.

근처의 해빌턴 산장에서 1차적으로 용병단과 용병으로 조직된 자들을 모은 다음 라함 영지로 출발하려던 참이었는다.

그때 근방에 그린 스킨들의 소규모 부락이 있다면서 그를 먼저 처리하고 가는 게 어떻냐는, 영지 모집관의 의견이 나왔다.

영지에 입성하기 전 전공을 하나 쌓고 덜 쌓고의 차이가 돈주머니 무게의 차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은 자진해서 그 임무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부락은 결코 소규모가 아니었다. 군대가 아닌 용병들의 무리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그린 스킨 괴물들의 습격에 순식간에 와해됐다.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도망치게 된 겁니다.”

“괴물 토벌이라. 주로 그린 스킨들인가?”

“네. 그것도, 어. 오크들이 그 대상입니다.”

브리타가 자리한 유일한 오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오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눈치 볼 것 없다. 야만적인 놈들. 내 손에 보이면 다 죽을 놈들이지.”

“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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