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이스칼리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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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앞서 가버린 아엘라시스를 따라잡기 위해 이블린과 지라크는 헐떡이며 달려야 했다.
그들도 말을 타고 있었는데, 영지 곳곳에서 일어난 난리와 소동, 비명에 놀라 마구간에서 뛰쳐나온 말들이었다. 모두 좋은 품종의 말이었고, 기동력을 얻은 덕분에 영지 곳곳의 흡혈귀들과 괴물들을 처치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아엘라시스가 타고 있는 말은 두 사람(하나는 흡혈귀이긴 했지만, 어쨌든)도 겨우겨우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속도가 대단했다.
추격전은 빠르게 끝났다. 이블린과 지라크는 지대가 높은 곳에서 아엘라시스가 타고 있던 거대하고 잘생긴 흑마와, 그런 흑마 위에서 안장도 없이 서 있는 아엘라시스를 발견했다.
이제까지 안장 없이도 놀라운 승마 실력을 보여준 아엘라시스였지만, 그럼에도 말의 등 위에 서는 건 무척이나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물론 아엘라시스는 용이고, 지금의 모습은 인간의 형태로 의태한 것이다. 의태라고는 해도 그녀가 설정한 또 다른 본 모습인 만큼 평범한 인간의 신체 능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은 몰랐고, 그래서 깜짝 놀란 이블린이 외쳤다.
“아엘라! 위험해!”
아엘라시스는 이블린을 돌아보았다. 깜찍한 소녀의 얼굴이 아니라 성숙해진 여인의 것에는 차가운 무 표정만이 담겨 있었다.
“날 아엘라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야. 아엘라시스라고 불러.”
그 서늘한 음성에는 거역하기 힘든 힘이 담겨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이블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엘라시스. 어딜 보고 있던 거야?”
아엘라시스는 말없이 한 쪽을 가리켰다. 이블린과 지라크는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누구라 할 것 없이 놀란 신음을 내었다.
“저건.”
쉬지 않고 표면이 일렁이고 있는 둥근 구체. 색은 핏빛이고, 때때로 검붉은 흑점 같은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불길한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몰려들었다. 마력은 바람을 불렀다. 영지의 바람이 한 곳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그 흐름에 맞춰 하늘의 구름도 이상한 그림을 그렸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이 영지에 돌이킬 수 없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부르겠다는 출사표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블린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피를 느끼는 지라크는 영지에 흘려진 피가 저 구체로 빨려가는 것이 보였다.
지라크가 말했다.
“······제 원류의 피를 지배하는 강력한 존재가 깨어났습니다.”
“뭐? 네 피를 지배해?”
“···네. 느껴집니다. 저 속에서 제 피를 맹렬하게 부르는······, 강력한 부름이.”
지라크의 붉은 눈동자가 요동쳤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잇몸의 송곳니가 자라나 입술에서 비져 나왔다. 지라크는 금방이라도 그들이 쳐죽이고 얼리고 박살내고 온 괴물들과 같아지려는 듯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 모습에 이블린이 뒷걸음질을 치며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여차하면 바로 주문을 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럴 일은 생기지 않았다. 지라크가 자신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없이 줄어들던 동공이 다시 커지고 송곳니는 작아졌다. 본능과 이성의 줄다리기에서 지라크는 본능을 이겼다.
그 이유에는 지라크의 생을 죽음에서 되돌린 몇 방울의 피가 있었다. 러셀의 피가 그의 심장 깊은 곳에 녹아있었고, 되살아나자마자 마주친 자청빛의 눈이 지라크의 심령을 틀어쥐었었다.
그것은 피에서 태어나 피만을 탐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흡혈귀의 숙명과 어우러진, 아주 특수한 경우였다.
다른 종족에게 똑같은 과정이 일어난다고 해도 흡혈귀가 아닌 이상 대단한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블린은 정상으로 돌아온 듯한 지라크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며 말했다.
“괜찮은 건가?”
“네. 죄송합니다, 심려를 끼쳐드렸군요.”
“멀쩡해진 거면 됐어. 그럼 이제 저 이상한 거나 해결할 방법을 세워보자고.”
이블린은 빠르게 의혹을 떨치고 눈앞의 문제를 직시하기로 했다. 마법사의 시선으로 보아도 저 붉은 구체의 용도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때, 일련의 주문들이 붉은 구체로 쏘아지는 것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 이블린은 그 주문들의 익숙한 마력 흐름에서 같은 마탑에서 온 마법사들의 것임을 짐작했다.
짐작한 것과 별개로 마법사들의 주문들은 붉은 구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아엘라시스는 두 번째, 이블린과 지라크는 첫 번째로 보는 광경이다.
“소용이 없네.”
“그렇습니다. 단지 소용이 없는 것을 넘어 배를 불려주는 꼴인 것 같습니다.”
이블린은 저 붉은 구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저 가까이서 구체에게 가하는 공격은 모두 무용지물로 보였다.
기사들이 던진 투창이나 병사들의 화살들은 주문들이 빨려 들어간 것처럼 구체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되돌아온다.
아스라한 비명소리가 울리고, 사람의 육편 조각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치솟은 육편과 피가 다시 땅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붉은 구체가 하나도 남김없이 빨아먹은 것이다. 마치 강력한 자석에 의해 끌어당겨지는 철가루 같다.
그 기괴한 현상들을 보며 영주의 기사들과 병사, 마법사들, 뒤늦게 뛰쳐나와 한 손 거들고 있던 용병과 모험가들이 물러서는 게 아엘라시스에게 보였다. 허둥지둥대는 꼴이 그 표정도 짐작하게 만든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 커진 구체를 보고 결심을 굳혔다. 어린 용은 아직 보호자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보호자가 어린 용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엘라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블린. 지라크.”
“어?”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이블린과 아엘라시스의 눈이 지라크에게 닿았다. 지라크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주인님에게 소중한 분인 것 같아서 그렇게 불렀습니다만······.”
아엘라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져 있다.
“괜찮아. 너희들 도움이 필요해.”
***
러셀은 이스칼리아를 보았다. 너무 많이 보였다. 마력이 불어넣어진 눈은 그녀의 육체와 그 안의 흐름을 반투명하게 겹쳐보았다.
그녀의 마력 회로는 공간과 연결되어 있었다. 땅과 하늘로부터 이뤄지는 마력의 격류.
평범한 자들의 눈으로는 꿈에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빛의 줄기들이다.
그 시각적 과포화로 인해 러셀은 뇌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마저 들었다.
여기서 그녀의 공격은 무한히 순환한다. 이스칼리아가 날린 사복검, 땅에서 솟아오르는 피의 가시들, 하늘에서 내리는 혈우血雨.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이 붉다. 붉음 속에서 그녀의 마력은 소모되는 일 없이 순환했다. 도리어 계속 보충되고, 더 강해지기까지 했다.
반면 그의 것은 소모되기만 할 뿐 보충되지 않았다.
러셀은 몸이 무거워진 것이 느껴졌다. 초저녁부터 지금까지 그는 쉬지 않고 싸웠다. 거진 열 시간 이상의 전투다.
검은 보리 향 여관을 덮친 지라크와 뱀피르들의 전투로부터 라몬 에란디스 영주의 아들, 에드몬드와 그 휘하의 괴물들과의 전투.
던전 내부에서도 각종 지하의 괴물들과 길을 잃고 몸과 생명을 빼앗긴 용병들, 모험가들, 유적 발굴자들과도 싸웠다. 거기에 깊숙한 지하 내부의 호수에서 정체모를 회색 갑주의 사내와도 싸웠다.
아무리 강철보다 질기고 단단한 그의 신체라도 피로를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는 싸울 수 있었다.
전생의 나약했던 몸뚱이와는 다르다. 감기 하나에도 골골대고, 부러진 뼈가 다 낫는데도 몇 개월 이상이 걸리던 약골과는 다른 몸이다. 싸우지도 못하고 져버린 그때와도 다르다.
아직 싸울 수 있다.
폐에 달궈진 쇳물이 차오른 듯 했고, 중력이 그에게만 이상하게 작용하는 듯 사지가 무거웠다. 팔은 누가 계속 잡아당기는 것 같고 다리는 늪에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이스칼리아의 손에는 이제까지 그를 성가시게 만들었던 검, 사복검이 들려 있었다.
유연한 축을 중심으로 조각나 있는 검편들이 허공을 유영하며 뱀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러나 마력을 불어넣자 언제 흐느적거렸냐는 듯이 빳빳이 세워진다. 그녀가 땅에 사복검을 찔러넣었다. 촤르르륵 하는 소리가 나며 땅이 진동했다.
러셀은 앞뒤 재지 않고 바닥을 박차 높이 뛰어올랐다. 그가 공중에 뜨자마자 거대해진 사복검의 칼날들이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치솟아 올랐다.
그런데 아까보다 사복검의 핏빛 칼날들의 기세가 흉험했다. 러셀은 알지 못했지만, 바깥의 마법사들이 날린 마법들의 마력을 흡수한 붉은 구체가 이스칼리아에게 힘을 더 해준 것이었다.
“허허.”
헛웃음을 지은 러셀은 공중에서 나힐니르를 휘둘렀다. 전방만이 아니라 모든 공간을 점유하는 검은 선과 선의 집합이 만들어진다. 선은 면이 되었고, 곧 입체가 되었다.
그의 몸을 둥글게 감싼 묵색의 검막이 사복검들을 튕겨냈다. 튕겨냄에서 그치지 않고, 빠직거리며 허공을 내달리는 벼락 줄기가 칼날들을 바스라트렸다.
있는 마력 없는 마력 다 끌어모아 만든 벼락이었다. 거센 벼락의 폭격에 이스칼리아가 일으킨 피의 장막도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타 들어갔다. 결국 피의 장막이 꺾이고 벼락이 이스칼리아를 강타해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사복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차원과 공간을 유리시켜 자신의 근본심상을 투영할 수 있을 정도의 술사인 이스칼리아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검술, 그리고 마력의 활용이었다.
검을 모두 부순 러셀은 발에 추라도 단 것처럼 공중에서 뚝 떨어졌다.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쏜살같이 몸을 날려 나힐니르를 휘둘렀다.
묵색 대검의 검신에 새겨진 월광의 룬은 빛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한 것에 가깝다.
황혼의 하늘이 드리워진, 들판 곳곳에 시체가 꽂힌 말뚝이 수북한 이 세계는 본래의 차원과 약간 비껴서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칼리아의 심상에 깊숙이 각인된 세계가 이 공간의 정체다. 아마 그녀가 죽었던 전장일 것이다. 전장 곳곳에 그녀의 백魄이 보였다.
이스칼리아는 사복검을 회수해 세웠다. 바로 나힐니르가 부딪쳤다. 꿍- 하고 묵직하면서도 음산한, 낮은 진동이 퍼졌다. 충격이 일었다.
칼과 칼을 맞대고 서 있는 두 사람의 아래로 충격을 이기지 못한 땅이 반구형으로 움푹 패였다. 나힐니르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하늘에서 땅에 내리꽂혔다.
이스칼리아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회피했다. 대검의 그림자에 스며버린 것이다.
애꿎은 지면이 폭발하며 토사를 뿌렸다. 수없이 드리운 토사의 그림자 속에서 수백 개의 사복검이 번뜩였다.
러셀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따다다다당, 하고 철판에 콩 볶는 소리가 났다. 사각에서 들어온 공격은 그냥 갑주로 때웠다.
갑옷을 두드리는 충격 속에서도 러셀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공세를 견뎌냈다. 땀에 흠뻑 젖었지만 그마저 기껍다.
이스칼리아와의 전투는 이렇게 모든 순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연속이었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와 공격을 날린다는 것. 자주 쓰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러셀은 그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목이 날아가고 심장이 터트릴 상황에서, 도리어 생의 실감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심정은 이스칼리아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다.
이미 수십 번을 넘게 몸을 재생시켰다. 죽음을 겪어본 그녀라도 버티기 어려운 충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저 거대한 대검이 송곳보다도 가느다랗고 채찍보다도 유연하며 둔기보다 강력한 파괴력을 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몸으로 직접 겪지 않았다면 보고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이스칼리아는 충족감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어떤 경지의 반열에 오른 자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미친 자들만의 공감대와 같았다.
아래에 도산검림이 자리한 곳 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즐기는, 목숨의 위협에서 도리어 사는 기분을 느끼는 자들.
미친놈과 미친년은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공감대가 형성되었지만, 그를 알아볼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스칼리아는 다음에는 또 어떤 검로로 대검이 짓쳐 들어올지 기대했고, 러셀은 매번 그 기대 이상을 충족시켰다.
충족을 넘어서 그녀의 몸을 부수고 잘게 조각 내버리니 그 이상을 느끼기도 어려웠다.
거듭되는 죽음 속에서 이스칼리아는 심장에서 전해져 오는 충동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집어넣은 수정들. 자신에게 마력을 공급하지만, 동시에 이성을 조금씩 갉아먹는 기물이었다. 기물의 요구는 간단했다.
살아있는 것들의 굴복. 그것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스칼리아는, 자신의 자아가 완전히 파괴되어가는 상황에서도 저 남자와 검을 맞대고 싸우길 원했다.
800년 전의 군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 계약해 힘을 받은 여인, 이스칼리아는 고소를 머금었다.
대단한 인간이자 남자다. 커다란 키나 장대한 어깨, 발과 허리, 틀어진 상체의 각도와 자신을 불태울 듯 노려보는 눈까지. 어느 것 하나 무인의 것이 아닌 게 없다.
무기술만이 뛰어난 게 아니라 신체를 어떻게 쓸지 아는 자였다. 검이 안되면 주먹이, 다시 발차기가, 때로는 어깨와 무릎, 팔꿈치까지. 전신을 흉기로 만들 수 있는 남자가 눈앞의 인간이었다.
물론 잘생긴 얼굴 또한 마음에 드는 요소였다. 검은 머리카락, 쭉 뻗은 짙은 검은 색 눈썹, 아래로 우뚝하게 선 콧대. 피부는 구릿빛으로 약간 그을렸지만, 그것이 도리어 더 건강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형형하게 빛나는 저 자청색 눈이다. 눈을 뗄 수 없다. 가지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 남자가 그때 당시의 자신에게 있었다면, 자신의 왕국은 연합왕국의 공세에 멸망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작은 국토였지만 풍요로웠고, 현명한 치세 아래 강력한 국방을 자랑하던 그녀의 나라, 이스갈드. 하지만 그녀의 총명함과 강력함, 아름다움은 근처 왕국들의 국왕들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게다가 그녀의 나라에서 나는 각종 기화이초나 풍부한 금속들의 매장량도 왕들의 탐욕에 부채질했다.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왕국을 지키기 위해 계약에 응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왕국은 멸망했다. 악마와의 약속과 계약이 맞이하는 예정된 결과였다.
그를 알면서도 인간은 한 줌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희망을 품은 것만큼이나 거대한 절망을 맛보고 무너진다.
거대한 충격이 다시 한 번 들판과 하늘을 진동시켰다. 그러나 다시 원래대로, 고정된 황혼과 말뚝에 박힌 시체들의 들판으로 복원되었다.
둘의 신형은 동시에 떨어졌다. 서로의 거리는 사, 오십미터 남짓이지만 그 정도 거리는 둘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친 기색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러셀과 달리, 공간의 주인으로서 신체의 재생과 마력의 회복이 더 할 수 없이 빠른 이스칼리아는 평온했다.
평온한 겉모습과는 달리, 심장에 달라붙어있는 수정은 그녀에게 더 없는 욕망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이기고 나면, 저 땀에 번들거리는 목덜미에 이빨을 박으리라. 그리고 자신의 반려로 만들어 세상을 정복할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자들은 그들의 앞에 굴복할 것이다.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던 이스칼리아가 막 마력과 검을 갈무리해 자세를 잡았다. 광포한 마력이 휘몰아치고, 사복검의 칼날들이 제멋대로 유영하며 허공을 찢어발겼다.
러셀도 숨을 한 번 내쉬고 나힐니르를 양손으로 쥐고 오른팔을 위로 올렸다. 왼발을 앞으로, 오른 발을 뒤로 한 단단한 자세에서 검극을 그녀에게 겨눈 자세였다. 날카로운 검극과 빛나는 두 눈을 보며, 이스칼리아는 마치 세 개의 칼날에 겨눠진 듯한 착각을 받았다.
그때였다.
감각에 뭔가가 잡혔다.
그건 이제까지 바깥에서 그녀의 공간을 두드리던 마법들과는 다른 마력이었다. 그리고 그 마력이 뭔지 짐작하기도 전에, 그것이 공간을 꿰뚫고 들어왔다.
“컥!”
이스칼리아가 처음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던 심상공간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지름이 10센티 남짓할까, 싶을 정도로 작은 구멍이었다. 그 구멍을 뚫은 하얀 선은 이스칼리아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러셀의 눈이 커졌다. 그는 한눈에 그 하얀 선을 알아봤다.
용의 숨결.
보통의 것과는 달랐다. 극도로 응축되어있는, 가늘다고해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용의 마력이 담긴 공격이었다.
그것이 이스칼리아의 공간에 틈을 만들고 그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던 붉은 수정들의 연계에, 지금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겨났다.
공간이 흔들렸다.
***
이블린과 지라크는 아직도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들이 이룬 위업과, 한 여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떤 주문과 물리적인 공격도 흡수하거나 도로 쏘아냈던 붉은 구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 균열을 만든 존재는 바로 그들 옆에 서 있었다.
백발의 머리에서 돋아난 단단한 두 개의 뿔. 세로로 날카롭게 갈라진 동공. 회청색의 눈에 흐르는 푸른 전류. 크게 벌렸던 입에서는 방금 쏘아냈던 광선의 잔재가 빛의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용인龍人의 형태로 변해있던 아엘라시스가 입을 다물고 씩 웃었다.
“어디 가서 떠들면 똑같이 될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