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57화 (58/225)

57화 악마 로고스 (2)

-이리······, 허무하게······.

뤼플하임의 얼음 악마, 퓨메론스칸이 단말마를 중얼거렸다. 그의 꼴은 처참했다. 오른팔은 어깨부터 날아가 없고, 머리의 뿔은 모두 부러졌으며 전신에 치명적인 상처가 가득했다.

옆구리를 크게 훑은 다섯 개의 손톱 자국에서 내장이 비어져 나왔고 복부와 가슴에는 성기사의 검이 꽂혀져 있었다. 퓨메론스칸은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털썩, 하고 울카가 주저앉았다. 수인화가 풀린 그녀는 다시 키와 몸이 작아져 있었다. 울카의 상태 또한 좋지만은 않았다.

“하악, 카하악, 카흐으으.”

울카는 덜덜 떨리는 몸을 그러모으며 웅크렸다. 그녀의 오른 손목은 너덜너덜해져 뼈가 드러나 보였고, 복부와 허벅지에 얼음의 대검이 입힌 검흔이 크게 나 있었다.

악마의 마력이 가진 얼음 때문에 동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시퍼렇게 물든 것이, 빨리 조치하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울카님?”

하일른이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왔다. 제스는 근처의 바위에 널브러져 기절해 있었다. 하일른이 제스의 완갑과 장갑을 벗기고 붕대로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해서 꽉 묶은 참이었다. 울카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으극, 너,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하일른은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지 않군요.”

하일른은 이마 한쪽에 크게 상처가 나서 그곳에서 흐른 피가 왼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의 절반을 덮은 피 덕분에 그의 헌양한 외모는 짙은 붉은 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단단했던 성갑은 이곳저곳이 균열이 갔다. 견갑은 부서져서 떨어져 나갔고, 흉갑 중앙에는 악마가 정통으로 내지른 주먹질에 우그러진 흔적이 나 있었다.

이제까지 어떤 괴물의 공격을 막아냈던 방패도 실금이 가 있었다. 그럼에도 양팔이 다 부러진 제스보다는 나았다.

“너무, 너무 추워.”

“악마의 마력 때문입니다. 바로 마력을 없애겠습니다.”

하일른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다리도 정강이뼈가 부러졌지만, 성기사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미약한 신성력이 손바닥에서 새어나와 울카의 재생력을 방해하던 악마의 마력을 걷어냈다. 직접적으로 상처를 치유해줄 수는 없었다.

하일른과 울카는 각자 다른 신을 섬기는 사제이고, 서로의 성력은 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일른도 치유의 빛을 내리기보다는 악마의 마력을 소멸시키는 데만 집중했다.

하일른이 퓨메론스칸의 마력을 모두 없애자 울카의 상처가 꾸물꾸물하며 재생을 시작했다. 강력한 수인의 핏줄과 달의 성력이 조금씩 그녀를 치유시키고 있었다. 온몸을 엄습하던 냉기를 떨쳐낸 울카가 겨우 말했다.

“끅, 고마, 워. 좀 살 것 같네.”

“다행입니다.”

하일른도 울카 옆에 털썩 주저앉고는 자신의 상처를 돌봤다. 더 이상은 그도 서 있을 힘이 없었다. 빙계의 악마는 그만큼 강력했다.

그때, 유일하게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용이 타박타박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용의 크기는 아까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퓨메론스칸에게 벼락의 숨결을 내뿜을 때마다 그랬는데, 지금은 조금 커다란 강아지 정도의 크기였다. 몸보다 훨씬 크고 길었던 날개도 지금은 훨씬 작아졌다.

상처를 수복해 조금 상태가 나아진 울카와, 마찬가지로 성력으로 스스로의 몸을 치료한 하일른은 멍한 눈으로 다가오는 용을 바라봤다.

마치 펭귄을 보는 것 같다. 뒷다리로 이족보행을 하며 뒤로 뻗은 꼬리로 중심을 잡고, 약간 큰 머리통을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

다가오던 흰 비늘의 새끼 용은 조금씩 비틀거리더니 하품을 쩍 했다. 그리고 울카의 커다란 가슴에 폭, 안겼다. 울카는 황당한 눈으로 안긴 새끼 용을 내려다봤다.

“···자는 건가?”

“···그런 것 같군요.”

새끼 용은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며 잠들었다. 작아진 그 모습을 보니 방금 전까지 퓨메론스칸에게 벼락을 내뿜던 그 용이 맞나 싶었다.

“러셀은 어떻게 용의 알을 얻은 걸까?”

“짐작이지만, 칼리스덴이라는 도시에서 용을 해치운 것과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죽어가면서 자신의 자식을 부탁 했다던가······.”

지친 하일른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의외로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네. 일단, 일어나자. 러셀을 도우러 가야지.”

“알겠습니다.”

울카는 왼팔로 용을 안아들며 일어섰다. 이제 막 재생을 마친 다리와 복부의 근육이 덜덜 떨렸다. 오른손은 제대로 쥐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울카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그건 하일른도 마찬가지였다. 갑주가 파손되고, 방패에 실금이 가고, 뼈가 부러져도 그는 태양을 경배하는 성기사였다. 육신의 상처 따위는 홀로 악마에 맞서고 있는 동료를 위해서라면 가뿐히 무시할 수 있었다.

“일단은, 이 새끼 용을 데려갈 순 없으니까. 제스 옆에 두고···.”

울카가 절뚝거리며 다리를 옮겨 새끼 용을 기절한 제스 옆에 두려는 찰나, 엄청난 굉음이 터져나왔다. 헤로케닌과 러셀이 사라졌던 동굴에서였다.

동굴의 입구에 균열이 쩍쩍 일더니, 와르르 무너졌다. 하일른이 입을 벌리고 울카가 비명을 질렀다.

“안돼!”

울카가 막 달려가기 위해 힘을 주자 혹사당한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냈다. 의지와는 다르게 바닥에 넘어진 울카는, 바닥을 타고 흐르는 진동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드드드드드.

동굴이 우르르 떨렸다. 그리고 돌무더기에 의해 막혀버린 동굴의 입구가 폭발했다. 암석과 돌이 공중으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무너지는 동굴에서 시커먼 두 개의 덩어리가 날아올랐다.

***

악마와 러셀은 무섭게 부딪혔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공동이 울리고 바닥과 벽이 무너졌다.

검은 피부의 거인 로고스는 그저 거인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등에서는 검은 뼈의 날개를 꺼내들고, 등허리에서는 네 개의 길쭉한 가시 꼬리를 꺼내들어 러셀에게 날렸다.

러셀은 쉼없이 대검과 도끼를 휘둘러가며 내리꽂히는 날개의 손톱을 막고, 바닥을 쓰는 꼬리를 피하고, 정면에서 찔러오는 대낫의 칼날을 흘려냈다.

쾅!

굉음과 함께 옆구리로 날아온 두 개의 가시 꼬리를 막지 못한 러셀이 공동 바닥을 구르다가 일어섰다.

루드비히가 남겨준 마법 갑옷, 바엘에 작은 흠집이 생겼다. 용, 이스메니오스와 싸울 때 거체에 깔렸을 때도 멀쩡했던 걸 감안하면, 로고스의 육체와 힘은 용을 상회했다.

-고작 인간 주제에 이렇게나 오래 버티다니. 이름이 뭐냐?

“러셀.”

로고스가 입이 없는 얼굴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계속해서 웅웅거리며 허공에서 울리고 있었다.

-꽤 괜찮은 신체로군. 이 비루한 몸뚱이보다는 더.

러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알려주면 충분하다는 듯 했다.

그의 무시에 더 분노를 느낀 것일까. 로고스는 이전과 달리 더 격한 몸놀림으로 거리를 좁히더니 대낫을 휘둘렀다. 러셀의 대검, 나힐니르가 그것을 맞받아치다가 갑자기 칼자루를 놓았다.

힘의 균형을 잃은 로고스가 앞으로 몸이 숙여지는 사이 러셀이 양손으로 잡은 외날 도끼, 마지막 서리가 로고스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뻐엉!

마치 야구 배트에 맞은 야구공 마냥 로고스가 뒤로 튕겨났고, 러셀은 바닥에 떨어진 나힐니르를 발끝으로 차올려 쥔 다음 바닥을 박찼다.

-건방진, 인간!

노호성을 터트린 로고스가 날아가는 도중에 자세를 바꿨다. 뼈로만 이뤄진 날개가 활짝 펴지고, 네 개의 가시 꼬리 중 두 개가 바닥에 박히며 제동을 걸었다. 나머지 두 개의 꼬리는 촉수처럼 일어나더니 마디마다 뾰족한 가시들을 세웠다.

“흡!”

러셀의 기합성과 함께 백색 도끼가 빙글빙글 돌며 엄청난 속도로 로고스에게 날아왔다. 악마가 반사적으로 대낫을 들어 도끼를 막자 도끼에 저장되어 있던 러셀의 마력이 서리와 냉기로 변환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뛰쳐나왔다.

콰아아아-!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며 로고스의 몸통이 꽁꽁 얼어붙었다. 얼음덩이에 갇힌 로고스가 정수리부터 두 쪽 나기 직전, 초록색 불길이 화산처럼 터졌다.

꽈아앙-!

러셀의 나힐니르를 막은 불꽃은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것처럼 굉음을 터트렸다. 아니, 실제로 불꽃은 물리력을 가진 채 넘실거렸다. 바닥이 폭발을 이기지 못하고 반구형으로 움푹 패였다.

찰나지만 죽을 뻔했다는 경각심이 악마로 하여금 남은 마력을 소진해 본신과 같은 화염을 일으켰고, 로고스는 그것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내가, 인간 따위에게!

분노에 몸을 맡긴 악마가 주체하지 않고 마력을 뿜어대자 공동이 흔들렸다. 처음의 성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저 멀리, 동굴의 입구가 진동과 마력의 격류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아!

온몸에 화염을 두른 로고스가 날아와 러셀을 덮쳤다. 악마와 러셀은 한 덩어리가 되어 공동을 가로질러, 동굴 입구가 있는 하나의 길로 나아갔다.

동굴의 천장과 바닥, 벽을 탄력있는 공처럼 이리저리 튕기며 둘은 주먹과 칼질을 이어나갔다. 로고스의 단단한 검은 피부에 상흔이 늘어가는 것만큼이나 러셀의 갑옷도 이곳저곳이 우그러졌다.

그리고 두 존재는 막힌 동굴 입구를 박살내며 바깥으로 나가떨어졌다. 울카와 하일른은 막 러셀과 악마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러셀!”

“러셀님!”

둘의 고함 소리가 멀어져갔다. 로고스는 여전히 날고 있었고, 러셀은 악마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로고스는 삽시간에 뼈 날개를 휘저으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초록 화염이 유성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에 가득했고, 해가 지고 있는 것인지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멀리 그들이 지나왔던 협곡의 구불구불한 길과 검은 나무가 빼곡한 숲, 그리고 로고스 마을이 보였다. 러셀은 나중에 돌아가면 마을 이름을 개명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어느새 발아래로 까마득해진 협곡을 보며, 이대로 더 올라가다간 나중에 몸 어디 하나가 작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러셀은 대검을 휘둘러 로고스의 뼈 날개 한쪽을 잘랐다. 뼈 날개는 은색의 불꽃으로 타오르며 재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카아아악!

날개 하나가 잘려나가자 로고스의 속도가 크게 줄었다. 악마는 붙잡히지 않은 발로 러셀의 얼굴과 몸통을 퍽퍽 찼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갑주를 넘어선 강력한 충격에 피멍이 들고 입 안쪽이 터지며 비릿한 피맛이 났다. 이 개새끼가.

러셀은 거머리마냥 끈질기게 로고스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그러자 네 개의 가시 꼬리가 뱀처럼 머리를 치켜들더니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러셀은 대검으로 두 개의 가시 꼬리를 잘라버림과 동시에 한손을 뻗어 도끼를 소환했다. 그때 악마가 두 눈을 번쩍였다.

-그건 안 되지!

차캉, 하는 소리가 나며 막 형체를 이룬 도끼가 튕겨져 아래로 떨어졌다. 러셀이 다시 도끼를 불러보려 했으나 잡히지 않았다. 시발, 별 재주가 다 있네.

하지만 로고스가 마법을 발하는 바람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러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끄아아아아-!

로고스가 비명을 질렀다. 이번 것은 확실히 고통의 비명이었다. 이전의 분노, 놀람의 것과는 달랐다. 악마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배를 꿰뚫은 대검을 잡았다. 하지만 칼날을 잡는 것만으로 손바닥이 타올랐다.

월광의 룬이 빛나며 로고스의 배를 헤집으며 상처를 벌림과 동시에 재생을 막고 있었다.

몸속에서 퍼지는 달의 성력은 악마의 오랜 기억을 상기시켰다. 수천 년 전의 달의 여신과의 전투.

그로 말미암아 달의 여신은 지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 스스로도 전신이 조각조각나는 피해를 입었다. 수백 년이 흐르고 나서야 티끌같이 모여든 조각들에서 본래의 의식이 정신을 차렸고, 또 거기서 수백 년이 지나서야 인간을 지배할 수 있었다.

악마는 그 처절했던 기억을 상기했다.

-안돼, 두 번은 안돼-!

그러나 비명과 달리 로고스의 거세게 내뿜던 화염은 사그라지고 있었다. 악마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그건 매달려 있던 러셀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떨어지면서도 전투를 이어갔다. 디딜 곳 하나 없는 공중에서, 러셀은 충격파를 일으켜 추진력을 얻어 로고스를 후려쳤다.

왼손으로 로고스의 목줄기를 쥐고 오른 주먹은 쉬지않고 머리통을 가격했다.

로고스는 간신히 두 가시 꼬리를 움직여 배에 박혀있는 나힐니르를 뽑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동시에 하나 남은 뼈 날개의 발톱이 러셀을 가격했다.

불시에 일격을 맞은 러셀이 빙글빙글 돌며 떨어져나갔다가,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 잡고 다시 악마에게 달라붙었다. 그 순간에도 지상은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울카와 하일른은 까마득하게 올라가 있던 두 존재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자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저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악마는 물론이고 러셀도 무사치 못하리란 판단에서였다.

“윽!”

“큭!”

울카와 하일른은 바닥에 손을 짚으며 넘어졌다. 방금 전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는 적지 않았다. 몸을 추스르며 다시 일어나려는 그때, 협곡에 로고스와 러셀이 떨어졌다.

그러나 충돌 음은 생기지 않았다. 악마의 전신이 갑자기 검은 안개로 화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검은 안개는 중력과 가속력을 모두 감소시킴과 동시에 한 곳을 중심으로 뭉쳐들었다. 그 중심은 러셀이었다.

안개는 퍼졌던 것만큼이나 엄청난 속도로 소용돌이치며 뭉치더니, 지름 5미터의 커다란 구체가 되었다.

울카와 하일른은 동그래진 눈으로 검은 구체를 바라봤다.

***

로고스는 굴욕적인 심정을 씹어 삼켰다. 여신과 능히 자웅을 겨루던 대악마인 스스로가 한낱 인간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가히 치욕적이었다.

어리석은 종복 때문에 교회의 시선을 너무 일찍 끌었고, 두 성기사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겨우 종복이 여러 마을에서 회수한 인간의 혼과 감정을 통해 회복했지만, 또 다른 변수가 나타났다.

이 빌어먹을 인간. 이 인간 때문에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협곡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육체를 산산이 분해해 이 검은 공간을 만들어낸 것 또한 그러했다. 그대로 떨어졌다면 검은 머리의 인간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줬을 것이나, 자신 또한 산산조각났을 것이다.

종복의 눈으로 바깥을 봤던 로고스는 아직 달의 늑대와 태양의 성기사가 둘이나 건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 산산조각난 상태였다면 꼼짝없이 신력을 처맞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정말 소멸해버렸을지도 몰랐다. 로고스는 겨우 부활한 주제에 그렇게 빨리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로고스는 남은 마력으로 비물질 공간을 만들었다. 이 공간에서만큼은 어떤 물리적인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그건 이 안에 가둔 검은 머리 인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 잘 되었지. 이제 그 몸뚱아리는 내 차지가 될 테니.

로고스의 의식이 검은 공간 한가운데에 고요히 떠 있는 인간에게 향했다. 종복의 눈으로 보고, 직접 부딪쳐 싸워보기까지 한 이 인간의 육신은 경이로웠다.

체력과 근력, 내재한 마력 모두 이제까지 악마가 세상에서 보지 못한 최상등품이었다.

장착한 갑주나 대검, 도끼도 예사롭지 않은 무구들이었다. 저 몸을 차지하고, 타락시킬 수 있다면 가히 세상을 뒤흔들 악마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형체없는 로고스는 곧 러셀의 얼굴 바로 앞에 뭉쳤다. 어둠 속에서 더 짙게 일렁이는 검은 덩어리. 그가 막 러셀의 눈 코 입을 통해 스며들려는 찰나.

갑자기 러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로고스는 경악했다. 어떻게? 인간은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을 텐데?

그러나 뜨여진 눈에서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는 또다른 심연이 있었다. 별이 빛나는 우주가, 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가 있었다. 바깥이 있었다.

로고스는 없는 눈이 부릅 뜨여지는 심경이었다.

-어찌 네놈이······!

검은 눈이 로고스를 직시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깨져나갔다.

***

울카는 바닥에 떨어진 러셀의 검, 나힐니르를 주워들었다. 대검은 무거웠다. 하지만 검신에 새겨진 월광의 룬이 그녀를 알아보고 힘을 건네주었다.

“비켜봐. 이걸로 내리쳐보게.”

“안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비키기나 해.”

비틀거리며 걸어간 울카가 검은 구체를 겨냥하며 대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입술이 잘근 깨물어졌다. 죽으면 안돼. 죽지 마.

그녀가 막 대검을 내리치려는 찰나.

쩌적, 하는 소리가 나더니 검은 구체가 산산이 깨어졌다. 그 안에서 검은 형체가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바닥을 갈아엎으며 쓰러졌다. 아까보다 훨씬 쪼그라든 모습의 악마, 로고스였다.

그리고 어깨를 빙빙 돌리며 러셀이 바스러지는 검은 구체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눈이 자색으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갑주는 그의 의지에 따라 다시 코트로 변했다.

멀쩡한 러셀을 본 울카와 하일른의 얼굴이 환해졌다.

“러셀!”

러셀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엎어져 있는 로고스에게 향했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죽음의 발소리를 들은 악마가 부들거리며 얼굴을 들었다.

-크, 하아아아.

로고스는 만신창이였다. 뼈로 이뤄진 날개는 모두 뜯겨졌고, 등허리의 가시 꼬리들도 모두 박살나 있었다. 다리 한 쪽은 사라졌고,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던 초록색 불길은 이제 촛불만도 못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악마의 눈이었다. 로고스는 아까 그의 종복, 헤로케닌처럼 눈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로고스가 보이지 않는 바닥을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찌, 어찌. 공허가 네 눈 속에 담겨 있는 것이냐······. 인간이 맞는 것이냐······?

러셀은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있는 악마 바로 앞에 섰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울카. 칼.”

“어? 어, 여기.”

울카가 나힐니르를 건넸다. 러셀은 두 손으로 나힐니르를 쥐고 높이 들어올렸다. 묵색의 검신이 회색의 하늘 아래서 검게 반짝였다. 악마가 처절하게 외쳤다.

-말해라! 왜 너 같은 존재가······!

“몰라 새꺄. 저승 가서 물어봐.”

답해줄 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러셀은 대검을 내리쳤다. 로고스의 목은 소리도 없이 잘려나가 바닥을 굴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아로새겨진 로고스의 머리에, 러셀의 발이 얹어졌다.

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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