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용이 남긴 것
인간이고 괴물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입을 쩍 벌렸다. 밤하늘로 떠오른 커다라면서도 아름다운 몸체. 하얗고 푸른 달빛을 받아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금빛 비늘. 그것은 용이었다. 괴물들은 본능의 영역에서 괴성을 질렀다.
작은 악귀고 커다란 괴물이고 상관없이, 두 발로 서 있든 네 발로 서 있든 상관없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에 맞춰 용도 포효성을 토해냈다.
성벽에서 갑옷과 투구를 쓴 완전무장한 상태의 프레드릭 성주가 그 괴성들을 들으며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봤다,
“저거 용인가?”
“···예. 그래 보입니다.”
요정 마법사 알베르트마저도 멍하니 용을 쳐다봤다. 오랜 시간을 산 요정도 용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메이스를 휘두르며 괴물을 때려죽이는 동시에 성력으로 병사들의 치유를 돕던 엘레노아가 밤하늘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용의 등에 올라타 있는 두 인영을.
“황녀님과 러셀입니다.”
“뭐? 어디?”
“용의 등, 꼬리 쪽을 보십시오.”
성주와 알베르트가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보자 정말로 거기에 두 사람이 있었다.
요정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젓자 수분이 응축되어 돋보기처럼 변했다. 그 안에 황녀 유리아와 러셀이 등에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도 안 가는군.”
“제 추측으로는 저 용이 황녀 전하의 조상과 싸웠다는 그 광룡 같습니다. 칼리스덴 지하에 잠들어 있었나 봅니다.”
“저런 게 내 침대 아래에 있었다고···?”
성주가 멍청하니 중얼거리는 것을 듣던 알베르트가 한 마디 하려는 찰나, 그의 귀에 마력으로 이뤄진 음성이 파고들었다.
-나 러셀입니다. 들립니까?
눈을 크게 떴던 알베르트는, 곧 자신도 음성을 실어 보냈다.
-들리네. 도대체 아래에서 무슨···.
-설명은 나중에 하죠. 당장 마법이든 뭐든 다 동원해서 이 용을 떨어트리십시오.
-···그게 진짜 용이라면 우리의 주문 같은 건 통하지도 않을 텐데. 마법의 시조는 용이야. 제자가 어떻게 까마득한 사조를 거꾸러트린단 말인가?
-지금 이 용은 주문은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날개 달린 도마뱀에 불과합니다. 신경 쓰지 말고 하십시오.
-알겠네.
알베르트는 무슨 연유인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는 일의 순서를 정확하게 가릴 수 있을 만큼의 분별력을 가진 요정이었으니까.
곧바로 알베르트는 성벽 위의 마법사들을 집결시켰다. 도시에 소속된 마법사든 용병이든 가리지 않았다.
“중력 계열 주문 알고 있는 마법사들 있나? 젠장, 나밖에 없군. 그럼 염동 주문은? 설마 바람의 속박 주문을 모르는 놈들은 없겠지? 됐어, 시작한다!”
마법사들 모두가 제각기 지팡이를 쥐거나 수인을 맺으며 영창을 시작했다. 수십의 마법사가 동시에 일으킨 거대한 마력의 파동에 괴물들이 흠칫 놀랐다.
마법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중력 강화!”
“의지는 곧, 힘이 되리라!”
“자유를 구속하는 날개!”
하늘에 떠서 자유를 만끽하던 용은 갑자기 뒤바뀐 중력, 보이지 않는 힘, 날개를 끌어당기는 바람의 힘에 지상으로 끌려갔다. 마치 여러 개의 거대한 갈고리에 휘감겨 떨어지는 듯했다.
카아아아아!
하늘에서 용이 추락했다. 사지를 발버둥치고 날개를 허우적거리며 활강하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떨어지는 용에서 두 개의 점이 훌쩍 뛰어올랐다. 두 개의 점은 곧 유리아를 품에 안은 러셀의 모습으로 커져갔다.
콰아아아앙!
러셀과 유리아가 성벽 겔러리에 내려섬과 동시에 용이 평원에 굉음을 내며 충돌했다. 그 충격에 땅이 뒤흔들리고 괴물들이 넘어졌다. 엄청난 흙먼지가 일었다.
성벽에 서 있던 사람들도 충격을 안 받을 수는 없어 엉덩방아를 찧거나 넘어진 자들이 속출했다. 그나마 균형을 잡고 선 자들은 주문으로 허공에 떠오른 마법사들이나 황녀의 기사들, 그리고 한 흑요정 검사에 불과했다.
“루시!”
“러셀이다.”
러셀은 유리아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렉시는 그를 다시 만난 게 마냥 좋은 지 실없는 웃음만 흘렸다.
“전하!”
“황녀 전하!”
각기 떨어져서 전투를 벌이던 황녀의 기사들이 달려와 유리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유리아는 아주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호칭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시 타인에게 이름으로 불리려면 얼마나의 시간이 걸릴지.
유리아와 기사들에게서 눈을 돌린 러셀은 그에게 다가온 성주와 알베르트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성주님.”
“자네가 나타난 게 길인지 흉일지 모르겠군. 부디 길이라고 답해주게나.”
“용은 제가 맡겠습니다. 성주님과 병사들은 괴물들만 막아주십시오.”
“아니, 어떻게? 자넨 지금 무기도 없지 않은가?”
러셀은 코트 안쪽에서 커다란 외날 도끼를 꺼내 보였다. 가만히 있어도 시린 냉기를 뿜고 있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외견의 도끼에 성주가 눈을 깜박이고 알베르트는 아공간이 달려있는 코트에 입을 벌렸다.
“그 도끼는 무슨···.”
성주의 물음을 알베르트가 끊고 들어왔다.
“그, 그 코트. 설마 안쪽에 아공간이 있는 건가? 어디서 얻은 건가? 설마 여기 오기 전에 용의 레어를 먼저 털은 건가?”
“루드비히가 줬습니다.”
“···황녀 전하가 찾던 조상 말인가? 그가 살아 있었어?”
“나중에 황녀님에게 들으십시오. 저는 저 용 좀 죽이고 오겠습니다.”
“지, 지원은?!”
“거슬립니다.”
성주와 알베르트는 성벽 밖으로 몸을 날리는 그를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러셀!”
이블린이 다급히 달려왔으나 그는 이미 멀어진 후였다. 그녀는 손을 확성기 모양으로 만들며 크게 외쳤다.
“비늘 한 조각은 남겨 줘어!”
***
러셀은 피식 웃으며 걸어갔다. 비늘 한 조각이라. 할 수 있다면 해보지.
카아아아악!
크아아악!
저들에게 다가오는 러셀을 본 괴물들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충격을 회복한 것인지 용도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용은 다시 날개를 펴려 했으나 하지 못했다. 날개 죽지가 완전히 부러진 것이었다. 피막 날개까지 구멍이 숭숭 뚫려 공기의 저항을 받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크아아-!”
분노한 용이 포효했다. 그리고 곧장 멀리서 걸어오는 러셀을 발견했다. 지능이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해도 용에게는 아직 강력한 공격 수단이 있었다. 모든 용들이 성장하면서 갖게 되는 숨결.
가슴팍에서 비늘을 투과하는 붉은 빛이 타오르더니, 곧 거대한 화염이 용의 입에서 이글거렸다.
괴물들이 두 다리, 혹은 네 다리를 박차면서 달려오는 것과 기다란 화염 줄기가 쏘아진 것은 동시였다. 화염은 괴물들도 가리지 않고 불태워버렸고, 괴물들은 달리는 자세에서 재로 바뀌며 흩날렸다.
러셀은 정면에서 덮쳐오는 거대한 화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물러서지 않았다.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었다.
그는 다만 도끼를 바닥에 꽂고, 두 손을 들어 올려 내밀었다. 마치 거센 파도를 인간의 힘으로 막아내겠다는 듯 무모했다. 불꽃은 물이나 바람 같이 완전히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파도를 막을 수 있는가?
러셀은 그렇게 했다.
화염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벌써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언젠가, 트롤의 화염을 막아냈을 때와 비슷한 장면이 재현됐다.
시야의 모든 곳이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확실히 용의 숨결은 트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고밀도의 마력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어 전처럼 흩어버리는 게 아니라 흘려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고, 각종 저주와 약화가 걸려있어서 이 정도였다. 러셀도 제대로 된 용의 숨결을 받아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손바닥이 불타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아니, 실제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손바닥의 피부에서 수포가 일어나며 화상으로 일그러졌다. 용의 불은 손을 넘어 손목과 팔꿈치까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금방이라도 그의 상체를 다 태울 듯 했다.
마안이 번뜩였다. 그 어느 때보다 번쩍이는 빛이 자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은 세상을 잇는 창구라고 했던가. 지금 러셀의 눈과 이어진 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없는 암흑과 공허, 끓어오르는 거품과 그 속에서 수없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미숙한 세계가 가득한 공간.
화염이, 차츰 물러갔다. 그에 맞춰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숯처럼 까맣게 타들어가던 러셀의 팔이 본래의 근육과 피부를 재생했다.
불꽃이 완전히 밀려나 손바닥 앞에서 멈추고, 그의 재생이 마쳐진 동시에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화염 줄기가 끝났다. 용의 숨결이 다한 것이었다.
용과 러셀 사이, 그리고 러셀이 둘로 갈라낸 불꽃에 대지가 옆으로 누인 Y자 형태로 검게 타올라 있었다. 남은 잔불이 축축한 풀잎을 태우며 검은 연기를 피우고 아지랑이를 그렸다.
그 타는 냄새를 맡으며, 러셀은 땅을 박차며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숨결에 타버려 두 덩어리로 갈라진 괴물들과 숨을 몰아쉬던 용이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숯덩이가 되지 않은 러셀의 모습에 도마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도약력의 정점에 다다른 러셀이 체내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노도같은 기세의 마력이 혈관을 질주하며 끝없는 힘과 고양감을 만들어냈다. 아드레날린이 펑펑 솟는 기분.
양손에 쥐어진 백색 도끼가 러셀의 마력을 받아들였다.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의 엄청난 냉기가 뿜어졌다.
바람에 펄럭이던 코트도 옅은 빛을 뿌리더니 처음 입었을 때의 갑주가 되어 러셀을 덮었다. 촤르르륵, 하고 수십 개의 쇠구슬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검은 갑주의 기사가 도끼를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앙-!
도끼가 대지를 내려찍자 그를 중심으로 땅이 원형으로 뒤집어졌다. 도끼에서 뿜어진 서리 폭풍이 대지를 달리며 닿는 모든 것을 얼어붙였다.
순식간에 범위 내에 있던 모든 괴물들이 얼음 동상이 되어 굳어버렸다. 냉기의 여파는 가까이 있던 용도 뎦쳤다.
다른 괴물들과 마찬가지로 하얗게 얼어붙은 용이었지만, 그 범위는 상반신 조금밖에 되지 않았다. 곧 전신에서 열기를 이끌어내더니 구속하고 있던 냉기를 떨치며 용이 포효했다.
“크아아아아-!”
러셀은 전신에서 하얀 수증기를 피워올리는 용에게 곧게 돌진해갔다.
용은 겁 없이 달려드는 이 조그마한 인간에게 왼쪽 앞발을 휘둘렀다. 낮게 뛰어서 피한 러셀은 바로 아래의 다리를 타고 올랐다.
자신의 몸을 타고 가까워지는 그를 본 용이 몸을 뒤흔들었으나, 러셀은 고양이 같은 균형감으로 용케 떨어지지 않았다.
벌써 용의 머리가 지척이었고, 그래서 그는 도끼를 휭으로 그어 용의 입가에 상처를 입혔다.
“카아아악!”
서리 도끼에 맞은 상처는 빠른 속도로 얼어붙으며 크기를 늘리고 재생을 막았다.
그러나 주문을 쓰지 못하는 용이라도 육체는 강했다. 면적을 넓혀가던 냉기가 사그라들고, 질게 그어졌던 상처도 아물었다. 트롤의 것보다도 뛰어난 재생력이었다.
“크르르르···.”
코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용의 이빨과 눈을 보던 러셀은 씨익 웃었다.
“어쩔 건데, 도마뱀 자식아.”
쾅!
지근거리에서 터진 충격파에 용이 머리를 휘청이며 옆으로 쓰러졌다. 허나 러셀도 놈이 휘두른 앞발에 얻어맞아 바닥을 굴렀다.
“칵, 퉤.”
투구를 해제하고 침을 뱉었다. 피가 약간 섞인 것을 보니 내장이 흔들린 것 같았다.
저편에서 비슷하게 뇌진탕을 겪은 듯 용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자청색의 눈이 마력에 번쩍거리고, 용의 노란 파충류의 동공이 길게 가늘어졌다.
하늘은 여전히 검은 색이지만, 먼 동녘에서는 푸른 물감이 스며드는 것처럼 서서히 파래지고 있었다. 길고 긴 밤이 끝나는 가느다란 신호였다. 초승달과 별빛은 아직 지상의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빛을 반짝였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모두는 그런 건 생각하지도, 보지도 못 하고 있었다. 당연히 저 아래서 한 기사와 한 마리의 용이 싸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내려가서 같이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내뱉어지진 못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걸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백 년 만에 인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용의 거체는 그런 용기와 투지를 깡그리 박살내는 박력이 있었다.
그리고, 기사와 용은 다시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다시 한 번 용이 숨결을 뿜기 위해 호흡을 들이켰고, 러셀은 그걸 가만 보고만 있지 않았다.
화염을 입에 장전하고 쏘아내기 직전, 러셀의 손에서 던져진 도끼가 빛의 원을 그리며 용의 입천장에 틀어막혔다. 입천장에 박힌 도끼는 즉시 냉기를 분사했고, 마력을 얼리는 서리의 폭풍에 용은 커다란 얼음덩이를 입에 문 모습이 되어버렸다.
입을 다물지도, 완전히 벌리지도 못하게 된 용이 당황해서 앞발로 입가를 긁으려고 할 때, 러셀의 코트 안쪽에서 묵색의 대검이 드러났다.
새벽이 되어가는 밤하늘 아래의 나힐니르는 잘 보이지 않았다. 칼날 중앙에서 빛나는 하얀색의 검신만이 보여서 언뜻 보면 그는 희고 가느다란 쇠꼬챙이를 든 것 같았다.
하지만 용은 저 검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은 저 검을 스스로에게 꽂아 봉인과 저주를 걸었다. 그 기억은 죽을 때까지 잊히지 못할 고통이었다.
주둥이를 얼려버린 얼음 때문에 괴성도, 포효도 내지르지 못하는 용이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러셀은 용의 두려움을 눈으로 읽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하고, 디딘 바닥이 포탄을 맞은 것처럼 터져나갔다. 일순 용은 그의 움직임을 놓쳤고,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러셀의 검이 심장에 닿아 있었다.
-끼아아아아아아-!
소름끼치는 비명이 용의 목구멍에서 새어나왔다. 마치 용이라기보다는 사악한 악령의 비명 소리와 비슷했다.
용은 가슴팍에 검과 러셀을 매단 채로 땅 위를 굴렀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가 20미터를 넘는 육중한 거체가 대지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광경을 자아냈다.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용의 몸에 매달려있는 러셀은 있는 힘을 다해 칼자루를 쥐고 버텼다. 갑옷의 보호로 납작해지진 않았지만, 엄청난 무게를 견뎌낸 것만으로도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시발. 네가 무슨 일곱 살 배기 애새끼냐!”
고함친 러셀은 발이 땅에 닿는 회전의 순간 강하게 박찼다. 그러자 검극이 쑤욱 밀리며 완전히 심장에 파고들었다.
-······!
용이 구르는 것을 멈췄다. 사위가 조용해졌다.
러셀이 근육에 힘을 주며 팔뚝이 용의 살덩이 속에 파고들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검을 찔렀다. 용의 비늘이 촤르르- 떨리며 솔방울 흔들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때, 저 먼 동녘의 하늘이 완전하게 밝아졌다. 밤의 새벽이 물러가고, 쉬지 않고 휭단을 계속한 태양이 반쪽의 세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환한 햇빛은 숲을 타고 넘어와 긴 그림자를 만들고, 우뚝 굳어버린 용과 대검을 위로 찌른 자세의 러셀을 비췄다.
용의 비늘이 제 색깔을 되찾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러셀은 칼자루에서 전해져오는 심장의 고동이 차츰 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용이 고개를 내려 그를 쳐다봤다. 러셀은 그의 자안과 마주하는 저 노란 눈동자에서 더 이상의 흉성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용의 눈과 러셀의 눈이 마주친 순간, 둘은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하늘과 땅 모두 하얀 공간이었다.
그는 거대한 용의 거체가 사라지고, 대신 머리에 커다랗게 휘어진 뿔을 단 여자를 발견했다.
“이스메니오스.”
“그렇다. 전사여. 네가 날 볼 수 있다는 건, 훌륭히 나를 죽였다는 거겠지.”
자신을 죽인 것에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그녀를 보며 러셀은 피식 웃었다.
“그렇소. 막 당신의 심장에 칼을 꽂은 참이지. 도끼는 당신의 입천장에 박혀 있고.”
“음, 음. 장하구나. 그런 너에게, 내가 남기고 싶은 게 있다. 들어주겠는가?”
“말해보시오.”
“내가 봉인되어 있던 공동의 끝에 가보면 작은 방이 하나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보면 내가 남긴 것이 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여기서 말해주면 될 것 같은데.”
“삶의 묘미는 반전에서 오는 법. 루드비히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러니 나도 너에게 똑같은 것을 주고 싶구나.”
나 원. 러셀은 인간의 낭만에 물들어버린 용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가 보겠소.”
“그럼 됐다.”
이스메니오스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까지 지은 희미하거나 옅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공간은 차츰 사라져갔다.
러셀은 점차 접혀가는 하얀 공간의 틈에서 언뜻 루드비히를 본 것 같았다. 이스메니오스를 꼭 껴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공간은 완전히 닫혔다.
현실에서 눈을 뜬 러셀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발견했다. 용의 시체가 점차 스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시작은 햇빛이 닿은 부분에서부터였다.
부러지고 찢어진 날개가 잿빛으로 물들더니 부서졌다. 단단했던 비늘들도 햇빛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그 뒤를 이었다. 꼬리가 스러지고, 다음은 몸통, 그 다음은 다리와 머리가 스러져갔다.
러셀은 나힐니르를 뽑고 다른 손으로 서리 도끼를 불러들였다. 그의 왼손에 빛 무리와 함께 용의 입천장에 박혀있던 도끼가 다시 나타났다.
쿠드드드드···.
얼음덩어리가 부서지며 조각을 흩뿌렸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투명한 얼음 조각들이 햇빛에 반사되며 화려한 무지개를 반사했다.
그렇게 무지개가 꽃잎처럼 허공에서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가운데, 오랫동안 고통 받던 한 용이 먼지가 되며 완전히 흩어졌다. 비늘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잿빛의 가루와 얼음 가루, 그리고 동쪽에서 빛나는 햇빛을 맞으며 러셀은 그렇게 서 있었다.
***
러셀이 말했다.
“···시발.”
이스메니오스가 봉인되어 있던 공동의 끝, 어느 작은 방.
방 안에 서 있는 러셀의 손에는 묵직하면서도 커다란, 하나의 알이 들려 있었다.
꿈틀.
그리고 알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