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이스메니오스
***
러셀과 유리아는 공동을 지나 계속 길을 걸었다. 이제 지하 미궁의 길은 아치형의 통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커다란 자연동굴에 가까웠다. 곧지도 않았고 중간 중간 구불텅거렸지만, 끊어지진 않았다.
천장에는 굵직한 종유석이 달렸고 바닥에는 종유석의 이슬을 받아먹고 자란 석순들이 그득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석주가 된 것도 있었다.
유리아의 속성력으로 만들어진 광원체는 계속해서 빛을 발했고, 그에 따라 걷는 둘의 그림자는 수없이 흔들렸다.
말없이 러셀의 옆에서 걷던 유리아가 입을 열었다.
“꽤 기네요.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끝이 안 보여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어. 기껏해야 15분 정도 지났을까.”
“그거 밖에 안 됐다고요? 한 시간은 된 것 같았는데.”
“햇빛이 비추지 않는 지하에 있으니까. 시간 감각이 헷갈리는 거지. 얼마 안 남았어.”
터벅터벅. 타박타박.
덩치의 차이 때문에 둘의 발자국 소리는 다르게 들렸다. 조용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유리아가 말했다.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그 다음은 어디로 갈 거예요?”
러셀은 왼편에서 걷는 유리아의 정수리를 힐끗 내려다봤다가 말했다.
“어디든 가게 되겠지.”
“이왕이면요.”
러셀은 생각해봤다. 어디로 갈 것인지. 처음 집을 나왔을 때는 무작정 아래로만 향했다. 그는 대륙의 최북단에 있었으니까.
몇 번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다가 겨우 찾은 마을에서 상행을 얻었고, 칼리스덴에 도착했다.
칼리스덴은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었고, 여기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면 대수림이 나온다. 그 너머에는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다 건너에는 신대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대륙에 끌리지 않았다. 아직 이 중앙 대륙도 안 가본 곳이 많은데, 벌써부터 그곳에 가겠는가.
“아마 남쪽 아니면 서쪽으로 가게 될 것 같은데.”
“그럼 나중에 제국에도 와요.”
“제국에?”
“네. 볼거리가 많아요. 연극도 있고, 서커스도 있고.”
연극, 서커스라. 러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생전에도 한 번 보지 못했던 것들인데.
“기회가 되면 가보도록 하지.”
“좋아요.”
유리아는 답을 들은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동굴의 길이 끝났다. 미리 짐작하고 있던 러셀은 앞을 바라보았고 유리아는 광원체를 더 높이 띄웠다.
루드비히의 갑옷이 있었던 공동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공간이 빛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커서 유리아의 광원으로도 끝이 다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천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 지나왔던 동굴의 것보다 수십 배는 큰 종유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거대한 석주 기둥들이 곳곳에 빼곡히 세워져서 낮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석주의 몸통은 웬만한 성인 장정 서넛이 껴안아야 겨우 잡힐 만큼 두꺼웠다. 유리아는 공동에 수없이 자리한 석주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기둥이 유난히 많네요? 천장을 받치는데 이렇게 많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그럼 다른 이유 때문이겠지.”
그들은 공동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주 기둥들 사이에 있는 거대한 얼음덩이를 발견했다.
그 안에 용이 있었다. 역관절의 두 다리와 발톱이 달린 뒷발은 바닥을 디디고 있으나 앞의 두 다리는 허공을 할퀴는 듯한 행동을 취한 채였다. 허공을 노려보는 눈은 노란 빛이었고, 쩍 벌린 입은 당장이라도 생동감이 넘쳤다.
시간은 그 안에서 흐르지 않고 박제되어 있었다.
러셀은 용의 비늘 겉에서부터 체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주문들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열쇠이자 자물쇠는 하나의 대검이었다. 용의 가슴께 중간에 대검 하나가 박혀 있었다. 일전 루드비히가 보여주었던 바로 그 묵색의 대검이었다.
러셀은 루드비히가 말했던 검 이름을 떠올렸다.
“나힐니르.”
“그래. 그게 이 검의 이름이지.”
말은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러셀과 유리아가 고개를 내리자, 어느새 얼어붙어있는 용의 아래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아까까진 아무도 없던 자리였다.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장검 손잡이를 쥐었지만, 러셀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여자는 작지 않은 키에 금발이었고, 탄탄한 몸 위에 가죽으로 된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갑옷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지 곳곳이 낡고 헤져 있었다.
겉보기로는 그저 평범한 여행자처럼 보이는 차림이었으나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노란 홍채에 세로로 갈라진 검은 동공, 머리에 난 커다란 굵기의 휘어진 두 개의 뿔이 그것이었다. 유리아가 중얼거렸다.
“드래코니안?”
“아니. 난 이스메니오스다.”
목소리는 얼굴과 같이 아름다웠으나, 감정이 하나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마치 무채색을 소리로 듣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이스메니오스라 밝힌 용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렇게 날 찾아온 걸 보면, 루드비히는 죽었겠구나.”
러셀이 답했다.
“그렇소.”
“그래···. 그는 편안히 갔는가?”
“웃으며 떠났소.”
“다행이구나. 내 욕심으로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둔 것을.”
“당신은 그가 당부했던 것 치고는 그리 미쳐있는 것 같진 않은데.”
이스메니오스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스메니오스의 정신체다. 파괴되고 타락한 것들 중 그나마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부스러기들이 모인 것이지. 이 얼음 안에 갇혀있는 건 더 이상 용이 아니다. 그저 살육에 굶주린 짐승일 뿐.”
그녀는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했다. 자기비하적인 말을 하면서도 이스메니오스의 눈은 꼿꼿하고 단단했다. 자신의 현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자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날 죽일 자들의 이름을 듣고 싶은데. 말해주겠는가?”
유리아가 말했다.
“···저는 유리아 히폴리아스 드 휘페리온이라고 합니다. 조상님의 흔적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 은발과 금안. 잊을 수 없는 특징이지. 네 몸 안에서 루드비히의 힘이 느껴지는구나. 전사, 너는?”
“러셀. 떠돌이요.”
“단지 그것뿐인가?”
“지금의 나는 그렇소.”
“‘지금’의 나라···. 인간들의 시제는 참 알아듣기 어려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래의 나를 모두 구분지어서 말한다는 것. 그것 때문에 루드비히와도 참 많은 말다툼을 벌였지···.”
용인의 눈에 회상의 빛이 서렸다. 그때 유리아가 물었다.
“이스메니오스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저 먼 과거의 어느 한 시절을 떠올렸던 이스메니오스는 곧 초점을 되찾고 그들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 되었냐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용의 아이는 귀하다. 우리는 그 기나긴 생을 살면서 단 한 번 밖에 자식을 낳지 못하지. 개채로서의 우리는 거인과 비견될 만큼 강하나, 종족으로서는 한없이 미달이었다.”
이스메니오스는 감정이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때를 정해서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운이 따라줘야 결실을 볼 수 있었다. 기회를 잡지 못하면 평생을 홀로 살다가 죽게 되지. 자식에 별 미련을 두지 않는 용들도 많았지만, 난··· 나와 루드비히 사이의 자식을 보고 싶었다..”
이스메니오스는 옆으로 돌아 손을 위로 뻗었다. 시간조차 얼려버린 차가운 얼음을 만지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때를 놓친 몇몇 용들은 자신의 피와 마법을 이용해서 비슷한 종족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지. 리바이어던, 드레이크, 드라칸, 드래코니안, 리저드맨···. 하지만 그건 일종의 자위행위에 불과해. 영영 가질 수 없는 한 때를 다른 방식으로나마 충족시키려는 것. 내 그런 생각은 루드비히를 만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무엇을 했소?”
이스메니오스는 눈동자만 움직여 러셀을 보았다.
“모든 것을.”
그녀는 한 악마의 방문을 받았다. 악마는 간절히 원하는 자의 소망을 듣고 나타난다. 신보다 더 빠르고, 더 가깝게 찾아오는 그들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메니오스는 악마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역사에 악룡, 혹은 광룡으로 기록될 것이다. 부정하지 않겠다. 사실이니까. 자식에 대한 내 갈망은 불러선 안 될 것을 불러들였고, 그렇게 난 미쳐버렸다. 그 결과는 보시다시피 나에 대한 봉인이지. 누군가 죽여줄 때까지 기다리는.”
“···어떤 악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나요?”
유리아가 물었다. 이스메니오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의 기억은 온전치 않다. 아까도 말했듯이 난 타락해버린 정신체 중 멀쩡한 것들을 긁어모은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에는 큼직한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법을 전혀 쓸 수 없다는 것이겠지.”
말을 잇던 이스메니오스가 얼음을 짚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쩡, 소리가 들리며 얼음의 표면에 균열이 갔다.
몇 번 더 그렇게 균열을 내자 단단했던 표면이 깊숙하게 파이고 대검의 칼자루가 삐죽 튀어나와 있게 되었다.
“검을 뽑아라. 그러면 이 봉인이 깨질 것이다.”
러셀이 말했다.
“굳이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나힐니르는 알타니움으로 만들어진 검이다. 오직 태양과 별의 빛으로만 제련할 수 있는 금속이지. 그만큼 희귀한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 중 하나가 마력에 대한 배제다. 나힐니르를 중심으로 한 이 마법진은 끊임없이 내 몸의 마력을 흩어버리는 동시에 봉인, 저주, 약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게 없었으면 지금까지 봉인되기도 힘들었겠지.”
러셀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묵색의 대검을 바라봤다.
“검이 빠져나가는 순간이 기점이다. 그리고 나힐니르가 아니라면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어려울 것이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따라오려는 유리아를 손짓으로 저지한 러셀은 얼어붙은 용 아래로 걸어갔다. 여러 매체에서 묘사됐던 것처럼 용은 아름다운 생물이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이어지는 비늘 덮인 육체는 보는 것만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근육질로 덮인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머리에서 솟아나온 커다란 뿔과 길쭉한 얼굴 모두가 그랬다.
이스메니오스가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알겠다. 너, 반은 인간이 아니구나.”
러셀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자청색의 눈동자가 잠깐 빛을 발했다가 꺼졌다.
“너의 혈통과 영혼이 조금씩 보인다. 나도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멀고도 아득한 피가 너에게 흐르고 있구나. 보랏빛 눈···. 그것이 바로 증거다. 그 눈은 보통의 마안이 아니다. 동화에서 묘사되는 악마나 마왕의 눈도 아니지. 그 눈··· 그 눈은···.
그때 이스메니오스의 눈에서 피가 주룩 흘렀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말하면 안 되겠구나. 이제 뽑아라. 그리고 날 죽여라.”
잠깐 말없이 이스메니오스를 내려다보던 러셀은 곧바로 나힐니르의 손잡이를 붙잡고, 당겼다.
고기를 가르는 감촉과 함께 대검이 완전히 빠져나와 그의 손에 잡혔다.
전에 쓰던 클레이모어와 비슷한 길이의 칼날. 그러나 양옆으로는 훨씬 넓고 두터웠다. 가운데에 가느다랗게 하얀 빛을 발하는 검신이 있었다.
십자막이와 그의 양손도 여유롭게 잡을 수 있는 칼자루, 끝에 달린 붉은 금속이 박힌 폼멜은 이음새 없이 한 부분으로 만들어진 듯 했다. 여러모로 크고, 아름답고, 거대한 검이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좋은 주인을 만나서 다행이다.”
러셀이 나힐니르에서 시선을 돌려 이스메니오스를 바라보니, 그녀의 몸은 차츰 투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금빛 비늘의 용을 둘러싸고 있는 얼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저적.
이스메니오스가 러셀을 보며 희미해지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넌 날 죽일 수 있을 거다. 확신이 드는구나. 일을 마치게 되면, 다시 이 공동으로 돌아와 보거라. 내가 남겨둔 것이 있다.”
“그리 하지.”
“그래···. 즐거운 대화였다. 잘 가거라.”
“잘 가시오.”
그리고 이스메니오스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이제 막 자신을 가두고 있던 얼음을 부수는 용뿐이었다.
크롸롸롸라-!
용은 바로 자기 아래에 인간이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거세게 몸을 뒤흔들었다.
그에 따라 용을 속박하던 얼음은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깨져서 떨어졌다. 사지 중 앞다리 두 개의 자유를 되찾은 용이 그 중 하나를 러셀의 정수리 위로 내리쳤다.
유리아가 경악하며 소리 질렀다.
“러셀!”
그러나 밀려난 것은 용이었다. 튕겨나는 앞발을 거두며 용이 균형을 되찾으려 애썼다.
러셀은 충격파를 쏘아냈던 손을 획획 털었다. 그가 디딘 바닥은 용과 러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쩍 갈라져 있었다.
“이스메니오스. 들리나?”
카아아아아아아-!
러셀의 물음에 용은 그저 괴성으로 화답했다. 그 흉포하게 빛나는 노란 파충류의 눈동자에는 지성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코에서 훅, 하고 내뿜는 콧김에 아지랑이가 이글거렸다. 딱딱 하고 위아래로 긴 주둥이가 부딪치며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러셀의 눈이 깊게 잠겼다. 아까 이스메니오스가 말한 대로, 지금의 용은 옛날 위대한 존재라고 불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주문 한 마디 내뱉을 수 없는 짐승,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괴물에 불과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강인한 육신만이 용이 가진 전부였다.
지성을 잃고 타락한 용이 러셀에게 달려들었다. 그 여파에 천장을 빼곡이 받치고 있던 석주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먼지를 피워 올렸다.
네 발로 선 키가 거의 5, 6미터에 달하는 용이 주둥이를 들이밀며 다가오는 모습은 사람이 꿀 수 있는 악몽 중 최악에 달할 것이었다. 그러나 러셀은 그 악몽에 정면으로 달려들 수 있는 전사였다.
그의 왼손에 다시 한 번 마력이 깃들었다. 우웅- 하고 공기가 떨리는 소리를 내뱉더니, 왼손에서 자청색의 빛이 번쩍였다.
콰앙!
용의 머리가 거대한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위로 홱 들렸다. 단단한 비늘이 덮인 아랫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러셀은 그대로 뛰어올라 묵색의 대검, 나힐니르를 휘둘렀고 용은 다급히 왼발을 들어올렸다.
서걱- 소리와 함께 용의 왼발 비늘이 갈라지며 깊은 상처가 생겼다. 엄청난 피가 쏟아졌지만, 완전히 잘라버릴 심산이었던 러셀에게는 아쉬운 상처였다.
용은 울부짖더니 그대로 뒷발로 일어서 몸을 지탱하며 단단한 꼬리를 휘둘렀다.
석주 기둥들이 휘둘러지는 꼬리에 맞으며 부서져나갔다. 공중에 떠 있던 러셀은 나힐니르의 검면을 들어올렸다.
칼날을 들어 벨 수도 있겠지만 직접 맞대보니 생각보다 비늘이 무척 단단했다. 자칫하면 힘에 밀려 자신이 베일 수도 있어 그는 검면으로 전방을 막았다.
굉음이 들리고 러셀은 석주 기둥들을 부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바로 러셀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용의 눈 바로 앞에서 엄청난 광량이 터졌다.
카아아아아-!
너무 압도적인 밝기의 빛을 쬐어버린 용의 시신경이 일순 마비되어 버렸다. 시력이 상실되며 암흑밖에 보이지 않자 용은 더 거세게 날뛰었다.
그렇게 용의 관심을 돌린 유리아는 러셀에게 뛰어갔다. 그때, 그가 떨어졌으리라 짐작되는 곳에서 부서진 석주가 그그긍 소리를 내며 옆으로 밀려났다.
“아, 머리야.”
“괘, 괜찮아요?”
“그럭저력.”
러셀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코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그는 멀리서 난동을 부리는 용을 보다가 그 위의 천장을 살폈다.
“잘못하다가는 깔려 죽겠군. 안 되겠어. 유리아?”
“네, 네?”
“위로 올라갈 준비 해.”
“네?”
러셀은 유리아의 당혹은 신경 쓰지 않고 용에게 걸어갔다. 마침 시력을 회복한 용이 난동을 멈춰가고 있었다.
러셀은 코트 안 쪽에서 백색의 외날 도끼를 꺼내들었다. 그가 도끼와 대검을 서로 부딪치자 깡, 깡 하고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용은 당장에 그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러셀은 씨익 웃었다.
“와라. 짐승아.”
분노의 괴성을 지르며 용이 쿵쿵 달려왔다. 기둥들이 차례로 더 무너졌다. 러셀은 천장에서 나는 불길한 소리를 귀로 들으며 바로 옆의 기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용과 러셀의 추격전이 공동을 달렸다. 러셀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이 기둥에서 저 기둥으로 움직이는 입체적인 기동을 보였고, 용은 걸리적거리는 것 모두를 부숴가면서 발톱을 휘둘렀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을 지탱하던 지지대를 모두 잃은 천장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종유석 하나가 낙하하더니 그대로 용의 등허리를 직격했다. 급작스럽게 닥친 수 톤에 이르는 무게는 과연 용조차도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당황한 용이 몸을 뒤흔들어 종유석을 떨치려는 그때, 추가적으로 큼직한 바윗덩이들이 떨어졌다. 러셀이 떨어지는 돌들을 직접 발로 걷어차서 용에게 날려 보낸 것이었다.
빠른 속도로 커다란 돌덩이들에 짓눌리자 용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이 갇혀갔다.
“러셀! 이러다 우리도 깔려 죽겠어요!”
어느새 완전 무장한 유리아가 천장에서 떨어지는 종유석과 바윗덩이들을 피하며 그에게 달려왔다. 부러진 기둥에서 내려온 러셀이 말했다.
“나한테 잘 붙어있어. 곧 올라간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그때 거대한 돌무덤에서 시뻘건 빛이 흘러나왔다. 용이 수많은 종유석과 돌들에 묻힌 바로 그 자리였다.
주체할 수 없이 강해지는 붉은 빛은 돌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화염 줄기가 바윗덩이들을 날려버리며 천장으로 쏘아졌다.
용의 숨결은 바위를 날려 보낸 것을 넘어 천장까지 완전히 관통해버렸다. 동굴의 천장은 이제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그 틈 사이로 언뜻 밤하늘이 비쳤다.
신선한 공기를 맡은 용이 몸을 움직였다.
등줄기에서 돋아난 피막 날개가 위아래로 요동치자 엄청난 공기의 격류에 무거운 바위들도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굴렀다.
“지금이야.”
러셀은 대검과 도끼를 코트 안쪽에 넣더니 유리아의 손을 붙잡고 달렸다. 그들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바위들을 피하며, 때로는 마력이 담긴 주먹으로 쳐내면서 용에게 가까워졌다.
“뛰어!”
“어디로요?!”
“용의 위로!”
“제정신 아니죠?!”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러셀과 유리아는 막 떠오르기 시작한 용의 등으로 뛰어올랐다.
다행히 비늘 위로 돋아난 작은 돌기들이 무척 많아 잡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다 유리아는 그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올라간다! 꽉 잡아!”
“으으으! 여기 오면서 이런 경험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는데요!”
나도 마찬가지야. 미친 듯이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맞으며, 러셀은 피식 웃었다.
***
한창 괴물과의 전투가 벌어지는 칼리스덴의 동쪽 임야.
콰과과광!
바닥이 아래로 무너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날개를 펄럭이며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