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물빛 머리의 여기사
하피들이 그렇게 죽자 성벽 위의 병사들은 좀 더 마음 놓고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용병들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칼과 방패를 휘둘렀다.
기어 올라온 고블린의 머리에 창날을 꽂고,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워 곳곳에 불덩이를 날렸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들은 전투에서 물러나 있다가 부상자가 나오면 치유의 기도를 읊었다. 모두가 제각기의 위치에서 맡은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단연 두 자루의 도를 역수로 쥔 흑요정과 대검을 휘두르는 남자가 돋보였다.
흑요정은 발걸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으며 나비처럼 가볍게, 벌처럼 날카롭게 도를 날렸다. 그럴 때마다 한 번에 둘, 혹은 셋 이상의 괴물이 어깨 위가 허전해진 모습으로 쓰러졌다.
흰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붉은 눈동자가 마력을 담아 빨간 실선을 남겼다. 유연하면서도 길쭉길쭉한 팔다리가 흉벽 위를 오르더니, 날랜 치타처럼 그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징검다리 같은 흉벽의 돌을 외줄을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하지만 뛰어난 균형감각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아래에서 오크들이 화살을 날려댔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화살비 사이를 자유롭게 누볐다.
도가 번뜩이자 막 흉벽에 오른 고블린이 팔이 잘린 채 아래로 떨어지고, 오크의 머리통과 다른 괴물들의 양단된 상체, 하체가 뒤를 이었다.
이따금씩 그녀에게 닿는 화살들도 피부 위의 붉은 아지랑이를 뚫지 못하고 튕겨났다. 그런 흑요정을 향해 용병들은 처한 상황도 잠시 잊고 멍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마치 전장에 강림한 천상의 발키리, 피의 천사, 죽음을 수확하는 사신의 인도자처럼 보였다. 그녀가 막 등 뒤에서 날개를 뽑아낸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듯 했다.
대검은 그보다 무자비했다. 쿵쿵 발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성난 소처럼 돌진했고, 그 돌진에 괴물들은 으스러지거나 박살나며 죽었다.
“으아아악!”
러셀의 눈이 막 흉벽에 올라선 오크의 손에 잡힌 병사를 발견했다. 투구는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연갈색의 머리카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그 아래의 앳된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다.
오크는 아직 벽에 손을 박아 넣고 매달려 있고, 병사는 안간힘을 쓰며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잔인한 미소를 지은 오크의 칼날이 병사의 목을 베어갔다. 피부가 갈라지고 근육이 잘리며 대동맥이 베여 더운 피를 뿜어내기 직전.
오크의 팔뚝이 누군가의 손에 턱, 하고 잡혔다.
오크와 병사의 시선이 그 손의 주인을 향해 돌려졌다. 러셀이었다.
러셀은 다른 손으로 병사를 잡아 뒤로 던졌다. 동시에 쥐고 있던 오크를 단박에 끌어올렸다. 100kg은 넘을 몸뚱이가 장난감처럼 떠올랐다. 오크의 작달막한 눈이 경악에 차고, 팔다리가 버둥거렸다.
그 눈높이보다 약간 높이 뜬 오크의 복부에 러셀의 오른주먹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오크는 검은 피를 뿜으며 쏜살 같이 평야의 저편으로 날아갔다. 떨어지는 지점에 있던 괴물들이 오크의 시체와 함께 데굴데굴 굴러갔다.
“끄륵, 끅, 끅···.”
뒤로 던져졌던 병사가 양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러셀을 올려다봤다. 키 큰 전사는 짙은 구름 덕에 낮아 보이는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그 장대한 모습은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는 신화 속의 거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병사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 거인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러셀은 병사의 손틈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는 걸 보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늦지 않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러셀이 물었다.
“이름이 뭐냐?”
병사가 헐떡거리는 숨을 토하며 자신을 응시하는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봤다. 앞뒤 없는 물음이었지만 병사는 어쩐지 그 질문을 거스를 수 없었다.
“끅, 지크, 지크입니다···.”
러셀은 점차 생명이 꺼져가는 병사를 가만 내려다봤다. 그의 생명이 손 틈 사이로 새고 있었다. 러셀은 불꽃을 일으켜 상처를 지질까 생각했다. 하지만 피를 이미 많이 흘렸고, 작열통에 심장이 멈춰버릴 지도 몰랐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잠깐만, 러셀.”
러셀이 고개를 돌리자 빨간 머리의 마법사가 그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블린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병사의 손을 밀어내더니 상처 입은 목 위에 자신의 하얀 손을 올렸다.
그녀가 주문을 읊자 손아래에서 하얀 빛이 반짝거렸다. 성직자가 했던 기도와는 다른 형식이지만, 분명 치유의 빛이었다.
이블린이 손을 치우자 목의 상처는 아물어 있었다. 병사는 피를 많이 흘려 피부가 창백해지긴 했지만, 죽지 않았다.
연갈색 머리칼의 병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블린을 보다가 곧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반복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됐어. 넌 이제 후방으로 가. 사제들이 있는 쪽으로.”
지크라는 이름의 병사는 러셀과 이블린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인사는 나중에 끝나고 하자.”
“그러지.”
짤막한 인사 후 이블린은 바로 다른 전장을 향해 뛰어갔다. 러셀은 그 출렁이는 붉은 머리칼을 보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이블린이 한 병사를 살린 사이, 다른 곳에서는 무수한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칼에 머리가 쪼개졌거나, 가슴에 화살이 꽂혀 죽었다.
칼리스덴의 치안을 담당하는 병사들은 분투했지만, 그 노력이 목숨을 지켜주기에는 부족하기만 했다. 아마 이 도시는 오랫동안 괴물들의 습격을 맞이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가진 지리적 이점으로 교역을 통해 부를 쌓고 질 좋은 식량을 수확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도시의 자주력을 의미하진 않는다. 스스로를 지키는 힘은 외적의 침입에서 나온다. 그리고 칼리스덴은 아직 그럴 만한 병사들이 없었다.
뭐 그렇게 생각해봐야 러셀이 칼리스덴에 도착한 것은 어제다. 막 도착한 주제에 한 도시의 전력을 판단하는 것은 조금 이를지도 몰랐다. 그리고 기사들은 아직 나서지도 않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기사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러셀은 아까 지휘봉을 들고 있던 깃 투구를 쓴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자는 악단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처럼 지휘봉을 휘두르며 병사를 옮기고, 마법사의 배치를 조절하고 있었다. 가진 지휘 능력이 괜찮은지 최소한의 희생으로 더 많은 괴물들의 시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러셀은 마지막으로 하늘을 보았다.
산과 숲에서 밀려오는 먹구름은 점점 더 층층이 겹을 쌓아갔고, 그로 인해 더 어두워져갔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습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이 하늘은 검은 얼굴 그대로 침묵했다. 이따금씩 울리는 천둥만이 머지 않았음을 알렸다.
사위가 검어졌기에 인간과 괴물의 싸움은 멀리서 보면 검은 덩어리들의 이합집산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붉은 피, 검은 피가 섞여서 바닥과 성벽에 뿌려졌다.
시체가 쌓여간다. 죽음, 비명, 혼란, 공포, 탄식이 그 위 허공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 음습하고 부정한 기운들은 한 쪽은 괴물들의 뒤편으로, 한 쪽은 도시 어딘가로 흘러갔다.
그의 눈은 그 기운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가만히 서 있는 러셀이 빈틈투성이로 보였는지 흉벽 위로 올라선 오크가 뛰어오르며 칼을 내리쳤다.
대검으로 오크의 칼날을 막은 러셀은 그대로 힘으로 밀고 나가 칼과 팔뚝과 목을 같이 잘라버렸다.
잘린 칼날과 팔뚝, 목이 잘린 채 바닥 위를 뒹굴었다. 오크의 시체에서도 흐릿한 기운 같은 것이 허공으로 오르더니 똑같이 날아가 버렸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뭔가가 뭔지도 모른다는 거지만.
상념을 마친 러셀은 다시 검을 들어 괴물을 베었다. 전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고, 남은 괴물들은 많았다.
비는 아직 오지 않았다.
***
“알베르트, 저 자는 누구인가?”
깃 투구를 쓰고 질 좋은 판금 갑옷을 입은 남자가 대검을 휘두르는 전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뒤에 서 있던 성주의 마법사가 성주와 같이 전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탁한 금발에 귀는 뾰족했고, 얼굴은 미형이었다.
알베르트는 그야말로 마법사다운 복장으로, 길다란 로브를 입고 손에는 길쭉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의 끝은 갈고리처럼 휘어져 있었고 그 중심에 수정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그 자입니다. 제가 경매에서 얻은 트롤 시체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남자입니다.”
“남문 길목을 막고 있었다는 그 괴물을 말함이구나. 안 그래도 위로는 도적단, 아래로는 트롤이 나타났다기에 골머리를 썩인 참이었는데.”
대화의 도중에도 전사의 대검은 멈추지 않고 성벽 위를 휩쓸었다. 몇 남지 않았던 하피 하나가 하늘에서 곤두박질치는 자살 같은 공격을 감행했지만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쪼개져 양 옆으로 나뉘어 떨어졌다.
정수리 위에서 떨어지는데다가 적지 않은 무게까지 합해져 평범한 전사라면 대응도 못 했을 것인데, 저 대검의 전사는 손쉽게 그를 해냈다.
덩치에 걸맞게 거인 같은 힘과 숙련된 검기(劍技)의 조합이었다. 거기다 그의 다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고블린들도 발길질과 주먹질에 죽어 나자빠졌다.
성벽 위의 좁은 통로라 작은 몸을 가진 악귀들이 까다로울만도 한데, 휘두르는 대검만큼이나 가볍게 몸을 날려 죽이고 있었다.
깃 투구를 쓴 남자, 프레드릭 성주가 눈을 빛내며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대단하구나. 살면서 저런 용력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다. 이름 난 은빛 늑대 기사단의 기사가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싶구나. ···병력들은?”
아까처럼 마법사가 대답했다.
“집결했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바로 출격할 수 있습니다.”
“좋아.”
“저, 근데 말씀드려야 할 것이.”
“뭔가?”
“제오나 아가씨가 기사들과 같이 계십니다.”
“제오나가?”
알베르트가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수분이 응집되더니 다른 상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그 속에는 성문 앞에서 말을 탄 채 대기하고 있는 판금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그리고 그 선두에는 칼과 방패를 든 여기사 하나가 보였다. 프레드릭 성주의 장녀, 제오나였다.
성주는 탄식을 흘렸다.
“허, 그 성격에 가만히 있지 못하리란 건 짐작했지. 무장은 잘 했는가?”
여기서 무장은 성주가 도시의 재화로 사준 각종 마법 무구와 유물을 말했다. 어릴 적부터 다른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다르게 칼과 갑옷에 큰 관심을 가진 딸을 위해 아버지가 마련해준 선물이었다.
칼은 칼리스덴에서 이름난 흑요정 대장장이가, 갑옷은 난쟁이가 만들어줬다. 방호력을 갖춘 목걸이와 귀걸이는 고대의 유물로 내장되어 있던 주문을 일깨운 것이었다.
알베르트가 답했다.
“예. 투구와 흉갑, 목걸이와 귀걸이가 아가씨를 지켜드릴 것입니다.”
“그럼 됐어. 전투를 경험할 나이가 되긴 했지.”
“하지만 성주님. 전장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수없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혹여나 다치시는 경우라도 생기면···.”
“그건 녀석의 미숙함이지. 말린다고 들을 아이였다면 내가 검술 길드의 마스터를 불러 가르치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게 해주는 게 부모의 도리 아니겠나? 가만 놔두게. 잃어야만 얻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될 테지.”
성주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옆에 기사들도 있다. 그리고 설사 다친다고 해도, 교회에서 오신 성직자분도 계시지 않은가.”
성주가 돌아보자 마법사의 왼편에 흉갑과 메이스를 장비한 금발의 성직자가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위에 푸른 눈동자는 아까의 성주와 마법사처럼 대검을 들고 있는 사내에게 닿아 있었다.
“엘레노아 사제?”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목숨만 붙어있다면 사지가 날아가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지 않은가. 거기에다 자네도 포션 잔뜩 만들어놓았다면서?”
요정 마법사, 알베르트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프레드릭 성주는 자기 아버지 파트리키를 닮아 자식을 아끼는 건지 사지로 모는 건지 모를 행동을 자주 했다.
파트리키의 친우로서 오랜 세월 동안 성주의 마법사 직을 지켜왔지만, 아직도 그런 성정은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성주님의 뜻대로.”
“그래. 슬슬 때가 된 것 같군. 성문을 열도록 하라.”
***
뿔 나팔 소리가 울렸다. 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린 러셀이 나팔을 불어 젖힌 기수를 쳐다봤다. 기수가 외쳤다.
“곧 성문을 열 것이다! 궁수와 마법사를 제외한 보병들은 준비하라! 밖에서 회전을 벌일 것이다!”
성벽이라는 이점을 버리고 평야에서 회전을? 성주가 돌아버린 것인가?
러셀이 먼발치의 갤러리를 보았을 때, 마침 성주도 그를 보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하자 러셀의 주위에 옅은 아지랑이 같은 구형의 막이 일렁거리며 나타나고, 전장의 소음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괴물의 고함과 병사들의 비명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듯 멀어진 것이었다.
-들리나?
“···들리오.”
성주의 뒤에 지팡이를 든 마법사가 보였다. 보아하니 그 마법사가 손을 쓴 듯 했다. 러셀의 귀에만 들리는 성주의 목소리가 말했다.
-난 프레드릭이라고 하네. 성문이 열리면 대기하고 있던 내 기사들이 말을 타고 나갈 것이네. 모두 마력을 다루는 초인들이지. 그 뒤로 보병과 용병들이 뒤따를 테고. 자네는 그 중 용병들 선두에 서 주면 좋겠는데. 어떤가?
자신감의 근원은 출중한 기사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고 있었나.
그리고 프레드릭이라는 이름. 러셀은 자신이 들고 있는 클레이모어를 만들어준 알리샤의 말을 떠올렸다. 파트라키 전 성주의 아들. 현 칼리스덴 성주. 스스로를 성주라 먼저 말하지 않고 이름으로 소개한 것은 특이했다. 명령조로 말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냥 나가서 싸우라는 건 아니야. 이 전투에서 이기면 보상을 주도록 하지. 금은보화, 아니면 자네만한 전사도 탐낼 만한 무구를, 어떤가?
거기다 확실한 기브 앤 테이크 정신까지. 마음에 드는 작자였다.
러셀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좋아. 바로 내려가게.
“아니. 난 여기서 잠깐 서 있다가 내려가겠소.”
-···좋을 대로. 늦지만 말게.
곧 러셀의 주위를 덮었던 막이 사라졌다. 멀어졌던 소음이 한순간에 물밀 듯이 그를 덮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소음의 갑작스런 증폭에 머리가 띵할 것이다. 허나 러셀의 단련된 오감은 순식간에 그 소음들을 받아 넘겼다.
성주의 지휘에 마법사들이 아껴두었던 마력을 그대로 풀어헤치며 주문을 자아냈다. 억눌렸던 폭발력이 확산되듯이 터져나가는 주문들의 해일에 성벽 위의 괴물들이나 아래의 괴물들이나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화염의 해일이 휘몰아치며 괴물들을 불태웠다. 불붙은 놈들은 괴성을 지르며 땅바닥에 뒹굴거나 다른 괴물의 칼이나 발톱에 목숨을 내놨다.
그 인세에 펼쳐진 연옥 같은 광경을 내려다보며 러셀은 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허공에서 나풀거리는 불씨 하나를 잡아채 끄트머리에 대자 곧 연기가 피었다.
“담배 펴?”
슬쩍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온 것인지 렉시가 서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러셀의 감각마저 속일만한 민첩함과 은신이었다.
“응.”
“냄새 나는데.”
“그럼 떨어지든가.”
“그건 싫은데.”
어쩌라고.
러셀은 알리샤와는 다른 피부와 머리카락을 가진 이 흑요정이 가면 갈수록 알 수 없다고 느꼈다.
뿌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지고, 성문이 열렸다. 기사들이 우렁찬 환호를 터트리며 튀어나왔다.
그들이 탄 갑주마들이 콧김을 펑펑 솟아내며 탄탄한 근육질로 맥박치는 네 개의 다리를 휘저었다. 그럴 때마다 기사들은 대지를 밟으며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이야아아아!”
뭐야 저건?
러셀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기사들의 가장 선두에서 달려가는 자를 보았다. 마력을 눈에 집중하자 망원경의 배율을 조정한 것처럼 시야가 확대되었다.
은빛의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장검을 든 기사. 투구 아래로 흘러내린 파란 물빛의 머리카락. 다른 기사들에 확연히 호리호리한 몸매. 여기사가 검을 높게 치켜들며 외쳤다.
“이 제오나를 따르라앗! 가즈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