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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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칼리스덴의 서쪽 문과 그 성벽에 도착했다. 문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선 짐마차가 문을 통과하는 것과 동시에 쿵,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상인들과 소를 몰고 다급히 목축장으로 들어가는 목동들, 손에 낫이나 삽 같은 것을 든 농부들이 구석에 서 있었다.
농부의 얼굴들은 바깥의 밭에 대한 걱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가을로 접어드는 중요한 때에 때 아닌 괴물들의 습격이라니.
러셀의 초인적인 청력에는 괴물들을 향한 저주와 신에 대한 원망이 들렸다.
“용병들은 이쪽으로!”
하사관으로 보이는 병사가 기운차게 소리를 내며 용병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러셀은 인도에 따라 성탑의 나선 계산을 모두 올라 성벽 위에 섰다.
칼리스덴의 외성은 여섯 개의 거대한 성탑을 꼭짓점으로 두고 그를 잇는 벽으로 지어져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왕국과 왕국이 번갈아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동안 한 결 같이 그 자리를 지켜온 유서 깊은 회색의 성벽이었다.
보수를 게을리 한 건 아닌지 연식 있어 보이는 돌 외에도 최근 것으로 보이는 벽돌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또 옅은 빛을 뿌리는 뾰족한 돌이 횃대 같은 것에 끼워져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었다. 보기에 마나 스톤으로 보였다.
햇살은 오전보다 약해졌다. 어디선가 몰려온 짙은 구름이 태양의 얼굴을 가려버린 것이었다.
비가 올 것 같은데.
“빌어먹을, 이게 무슨 일이야.”
“시발, 시발.”
“누구 내 물통 못 봤어?”
“광명을 뿌리는 루테온이시여 부디 저희를 굽어 살피시어 그 찬란한 자태로 하여금 이루 말할 수 없는 승리와 함성을···.”
먹구름 아래의 용병과 병사들은 옅은 그림자를 두른 채로 서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믿는 신을 외우며 기도하거나, 욕설을 뱉거나 했다.
탁, 탁 하고 제자리 뜀을 하면서 긴장을 푸는 자도 있었고 수인과 난쟁이 전사도 몇 보였다. 시끄러운 인간들과는 다르게 조용히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거나 성벽 너머를 보고 있었다.
러셀도 성벽에 가까이 다가가 돌을 짚고 아래를 바라봤다.
높은 성벽에 있기 때문인지 하늘이 보다 가까워 보였다. 멀리 지평선과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구름이 뭉클거리며 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평야와 야트막한 동산 몇 개가 보였다. 그 너머의 숲도. 저곳이 필리 아줌마가 말했던 도적단이 자리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도적단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자리했다.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시발.
괴물들이 있었다. 괴물들은 평야와 동산의 매끄러운 선을 자신들의 머리통으로 대신하며 다가왔다.
오크, 고블린, 놀등 종류가 다양했다. 고블린과 놀이 가장 많았고 오크는 그보다 적었다. 하지만 가장 제대로 된 무장을 한 것은 오크였다.
군데군데 배는 큰 덩치를 가진 놈들은 변종이거나 마력을 각성한 놈들로 보였다. 러셀의 눈에는 이틀 전 트롤과 싸웠을 때처럼 그 주위에 아지랑이 같은 것이 보였다.
구석에서는 소머리에 인간형의 육체를 지닌 거인들이 도끼를 들고 있었고, 또 어딘가는 갈색과 초록색의 피부를 지닌 트롤들이 있었다.
하늘에는 날개를 가진 놈들도 퍼덕거렸다. 어지간한 독수리만한 크기에 인간 여자의 상반신, 새의 날개와 다리를 지닌 하피였다.
괴물들은 동산과 평야를 밟으며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 으르렁 거리던 놈들이 왜 저 지랄인거야? 어? 누구 나한테 설명 좀 해줄 사람?”
“그걸 누가 알아? 닥치고 서서 화살이나 매겨!”
“또 보네.”
마지막 말은 워낙에 태연하고 여상스러워서 러셀도 자신에게 한 말임을 늦게 알아차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아까 만났던 흑요정, 렉시가 옆에 서 있었다.
“이름이 루서. 맞지?”
“러셀이다. 너도 와 있었군. 여동생은 만났나?”
“아니. 가다가 또 길을 잃었어. 정신을 차리니 또 그 서점 앞에 서 있더라고. 그래서 널 기다리고 있었어.”
“···날 거기서 왜 기다려?”
“키가 커서 찾기 쉽고, 친절한 인간은 드무니까.”
렉시는 그 이상의 설명은 없다는 것처럼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렇게 서점 앞에서 기다리는데 병사를 이끄는 인간이 나더러 따라오라고 했어. 왜 가야 하냐고 물으니까 괴물들이 나타났대. 다른 용병들도 모두 동원령을 내려서 참전한다고 하니까, 너도 있을까 하고.”
그렇게 된 거군. 렉시는 러셀을 올려보다가 말했다.
“이 일이 끝나면 대장간에 데려다 줄래? 나 혼자서는 못 갈 것 같아.”
못 해줄 것도 없지. 아마 전투가 끝나면 갑옷이든 칼이든 피와 기름에 더러워질 테니까.
“이 도시는 어떻게 온 거냐?”
“상행. 상행은 좋아.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알아서 목적지까지 데려다 줘. 편리해.”
흑요정이 길치 속성이라니. 어디의 누가 짠 설정이냐.
러셀은 속으로 탄식을 내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끝나면 같이 가주지. 술도 얻어먹을 겸.”
“술? 술 사줄 거야?”
“네가 산다고 했었잖아.”
“그랬나?”
고개를 가로저은 러셀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어느새 괴물들이 지척이었고, 그놈들은 이제 걷기 보다는 뛰고 있었다.
크아악! 카악!
캬아아악!
구룩, 구룩, 구룩.
괴물들이 주둥이에서 괴성을 내며 달려왔다.
“궁수와 마법사들! 준비-!”
러셀이 보자 성벽의 중간쯤 위치한 갤러리에서 깃이 달린 투구를 쓴 자가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
그가 신호하자 궁수들이 활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긴 다음 그 촉을 높게 들었다.
통일된 제복을 입은 성주의 마법사들과 자유분방한 복장들의 마법사들이 성벽에 붙어 각기 주문을 외거나 수인을 맺었다.
러셀은 그들 중 익숙한 빨간 머리를 발견하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용병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대부분 검을 들고 있었지만 용병 몇몇은 도끼와 펼션, 메서, 메이스, 플레일 등 다양한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러셀도 오른손을 어깨 뒤로 뻗어 클레이모어를 뽑아들었다. 스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칼날이 뽑혀져 나왔다. 매끈한 칼날은 얼굴도 비춰 보일 만큼 투명했다.
렉시가 양손에 역수로 쥔 곡도를 들면서 말했다.
“역시 내 동생이 만든 칼이야. 멋져.”
“조용히 하고 앞 봐라.”
“차가워···. 아까는 친절했는데. 그런데 가슴이 두근두근해. 왜 떨리지? 괴물 때문일까?”
뭐라는 거야.
곧 괴물들이 화살과 주문이 닿는 반경까지 달려오자 깃 투구를 쓴 자가 외쳤다.
“발-사-!”
지휘봉이 내려감과 동시에 화살들과 주문들, 불덩이와 번개가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
괴물들의 전열은 순식간에 죽어 나자빠졌다. 갑옷을 차려 입을 정도의 지성을 가진 괴물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크 정도나 갑옷이나 방패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화살 세례에 피해가 적었다. 고블린이나 놀은 작은 몸집을 이용해 다른 덩치 큰 괴물들을 방패로 삼거나 해서 화살을 피했다.
하지만 뒤이어 날아든 마법 주문들은 막는 게 불가능했다.
콰앙! 콰르르!
굉음과 함께 괴물들이 우수수 죽어나갔다. 시체들이 쌓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괴물들이 시체를 밟으며 진군했다.
지상의 것들을 향해 쏘아지던 주문과 화살은 곧 하늘로 향했다. 날개 달린 괴물들이 성벽 위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아악!”
“꺄하하하!”
하피의 갈고리 같은 발톱에 잡힌 병사 하나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두려움에 젖은 병사의 비명. 잔인하게 웃는 하피의 웃음소리.
병사가 손에 쥔 칼로 어떻게든 위를 찌르려 하지만, 하피의 깃털은 두껍고 단단하다.
“이거 놔! 이 괴물아!”
“그래에?”
섬뜩한 미소를 지은 하피는 정말로 병사를 놔버렸다. 까마득했던 지상이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병사는 괴물들 한복판에 떨어진다.
푸확, 하고 피구름이 솟고 흥분한 괴물들이 달려들어 조각난 시체를 먹어치웠다. 전투와 보급이 동시에 이뤄지는 현장이었다.
그런 식으로 하피와 날개 달린 놈들이 병사를 잡아다 떨어트리거나 찢어 죽였다. 찢어 죽이는 것도 한 놈이 어깨나 팔을 잡고 있으면 다른 놈들이 다리나 목을 잡고 뜯어버리는 식이었다.
하늘에서 피와 육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먹구름 아래의 질척한 핏물. 선홍빛 내장. 코가 막히는 피비린내.
“쏴라! 화살을 쏴! 날개를 맞춰!”
“하피의 날개는 단단해서 웬만한 화살로는 힘듭니다!”
“그럼 몸통을 맞추면 되잖, 우아악!”
장교는 병사와 대화를 끝맺지 못했다. 장교는 하늘에서 오체분시되어 병사들 위로 떨어졌다.
하피들이 위에서 그런 짓거리를 해댔기에 아래의 사람들은 뜯겨 죽은 시체의 잔해들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으아, 우아아악!”
“우웨에엑!”
각종 내장을 머리에 뒤집어쓰게 되자 패닉에 빠져 마구 무기를 휘두르는 병사나 토하면서 기절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그런 놈들은 다른 용병이 휘두른 칼이나 괴물의 발톱에 죽었다.
괴물들의 전략(그렇게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에 용병과 병사들은 혹여나 자기도 같은 꼴이 될까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고블린들이 성벽을 타고 기어올랐다.
“끼에에엑!”
성인 남자의 허리춤에나 간신히 닿을 키, 초록과 갈색이 섞인 피부, 가느다란 팔다리와 시뻘건 눈. 성인 여자보다 못한 근력을 가진 놈들이지만 고블린의 무서움은 그 집요함에 있다.
놈들은 가진 단검을 들어 갑옷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오금이나 아킬레스건을 그었다. 작은 몸집을 활용한 놈들의 공격에 곳곳에서 다리를 부여잡은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럼 어김없이 고블린들이 올라타 가진 녹슨 단검이나 도끼로 마구 내리찍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병사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되었다.
이대로만 가면 칼리스덴의 함락은 쉬워보였다. 괴물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 작은 악귀들을 향해 휘둘러지는 대검이 있었다. 좌에서 우로 휘둘러진 검격 안에 있던 모든 괴물들의 머리통들이 둥실 떠올랐다.
막 성벽에 오른 괴물들의 눈이 그 대검을 휘두른 자에게 향했다.
2미터에 가까운 키, 넓은 어깨, 검은 가죽 갑옷과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 투구를 쓰지 않았기에 그대로 드러난 귀족 같이 잘생긴 얼굴에서 보랏빛 눈이 번쩍거렸다.
캬아아악!
괴물들이 남자에게 달려들었고, 아까처럼 똑같이 머리통과 허리가 분리되어 쓰러졌다. 얼굴에 묻는 검은 피를 훔친 러셀은 성벽 위를 빠른 속도로 걸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생명이 스러졌다. 대검에 목숨을 구함 받은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러셀을 쳐다봤다. 그는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 다른 괴물을 토막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러셀을 발견한 건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사와 궁수들을 괴롭히고 있던 하피 하나가 가까워지는 러셀을 보고 날개를 펼쳐 날아들었다.
“꺄아하하아!”
마치 부엉이가 사냥감을 낚아채듯이 날개를 쫙 펼치고 맹금류의 다리와 갈고리 같은 발톱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목표는 러셀의 등이었다.
콱!
방해 없이 뒤에서 러셀의 어깨를 발로 움켜쥔 하피는 쾌재를 부르며 날아오르려 했다.
이 덩치 큰 인간도 하늘에서는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이 될 것을 기대하며.
하지만 하피가 아무리 날개를 퍼덕거려도 러셀은 떠오르지 않았다. 장정 둘을 잡아 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진 하피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커다란 인간의 손에 다리가 잡힌 하피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바닥을 이루던 판석이 쩍 소리를 내며 쪼개지고 갈라졌다. 러셀은 휘둘러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뜯겨진 하피의 다리를 집어 던졌다.
아래에는 상반신의 흔적 조금 밖에 남지 않은 고깃덩어리가 피떡이 되어 있었다. 하피가 터지면서 솟은 깃털들이 허공에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그 모습에 상공을 날아다니던 하피들의 눈이 뒤집혔다. 공동체 생활을 하며 모두가 누군가의 어머니, 언니, 여동생인 하피들은 결속력이 대단한 괴물이다.
숲에서 하피를 맞닥뜨리면 바로 도망치는 것은 그 결속력에 있다. 한 마리라도 죽이면 숲에 사는 모든 하피와 죽고 죽일 때까지 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끝은 대부분 하피를 죽인 자의 죽음이었다.
꺄악! 꺄아아악!
“죽여! 죽여어어!”
“감히 내 동생을!”
높고 째지는 여자의 비명소리를 내는 하피들이 모두 러셀에게 날아들었다. 마법사들은 한숨을 돌리게 됐지만 동시에 저 전사의 명복을 빌어줄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하피들의 강철 같은 발톱과 날개에 맞아 죽을 것이 뻔했기에.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저 사람은···.”
용병 마법사 중 빨간 머리의 여인이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시체에 모이는 까마귀들처럼 한순간 러셀의 주위가 하피들로 가득 찼다. 축 늘어진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내고 역겨운 얼굴을 가진 괴물들.
시야 어디를 돌려도 피에 젖어 번들거리는 갈고리 발톱과 깃털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억센 손아귀가 클레이모어의 손잡이를 꾸득 움켜쥐었다. 바닥에 살짝 끌리던 검 끝이 들리고, 근육이 맥동했다. 러셀이 대검을 휘둘렀다.
그건 칼날의 폭풍이었다.
상하,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든 방위를 점한 대검에 달려든 하피들이 갈가리 찢겨 육편으로 비산했다.
괴물의 검은 핏물로 그려낸 그림은 1초간 허공에 머물러 보는 모든 자들에게 섬뜩함을 선사했다. 그림이 바닥에 쏟아지며 철퍽, 소리를 내고 온몸을 피에 적신 러셀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초가을로 접어들고 먹구름이 끼어 싸늘해진 공기 속에서 달궈진 숨은 하얀 숨결이 되었다.
“대단해···.”
뒤에서 러셀을 도울 요량이었던 렉시가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