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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279화 (279/352)

〈 279화 〉 외전:까치까치 설날은~어저께고요~

* * *

“흠흠, 다 모였지?”

나는 주방 앞에 일렬로 선 식구들을 훑어보았다. 에포나부터 아나트까지 총 5명의 인원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니들 왜 긴장했는데. 여기가 무슨 전쟁터라도 되는 줄 아냐.

“주인님! 우리 이제 뭐해?”

뭐하냐고? 이 날에 할 건 하나 밖에 없지.

“에포나. 이제부터 내가 너한테 중요한 일을 맡길 거야.”

내 말에 에포나가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아고 이 귀여운 녀석. 감정에 솔직하구만. 근데 너 언제부터 말딸모드였냐. 분명 아까까지 말 형태로 돌아다녔잖아. 그래도 옷은 걸치고 있으니 장족의 발전이네. 적어도 알몸으로 돌아다니지는 않잖아.

역시 인간 상태는 털이 없어서 그런 건가? 아무리 난방을 틀었다고 하지만 알몸은 추우니까...

“에포나, 네가 할 일은...”

“할 일은!”

“세연이랑 같이 눈사람을 만들도록.”

“눈사람!”

그래 눈사람. 조오오오오오온나 쌓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어라 이거야. 그게 네가 우리 집안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눈사람! 좋아!”

“옷은 잘 챙겨 입고. 불편하다고 벗어던지면 안 된다? 이 눈이 펑펑 내리는 날씨에 얆게 입고 다니면 감기 걸려.”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저기 놔둔 옷 입고 눈사람 만들러 간다. 실시!”

“실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 집의 막내, 에포나가 세연이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둘이 언제 친해졌는지는 모르겠는데 친해서 다행이야. 혼자 보내면 좀 그렇지만 둘이 보내는 건 안심되니까... 다음은 리온이었다. 리온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닫지 못한 듯 했다.

“나도 눈사람 만들어?”

“그럴래?”

“응!”

“옷 잘 챙겨 입고 나가렴. 너무 오래 놀진 말고 적당히 들어와서 몸 좀 녹이고 그래.”

1년에 한 번 오는 설날 연휴인데 아프면 좀 그렇지. 나는 리온이 신나서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애들은 나가놀게 하는 게 답이지. 설날 준비하는데 거들게 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아니 뭐 애들한테 전 부치라고 할 수도 없고 장보라고 할 수 도 없고. 그냥 밖에서 신나게 놀게 해서 힘 빼는 게 최고야. 내 도움 없이는 눈사람 만드는데 오래 걸리니까 그 동안에 설날 준비를 해야지.

“유라, 한솔아. 너희들은 내가 X톡방에 사야할 재료 적어놨으니까 그거 사오면 돼. 카드는 이걸로. 겸사겸사 너희들 먹고 싶은 간식 같은 거라도 사와.”

나는 내가 평소에 애용하는 카드를 꺼내 유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알았어요 언니. 그럼 바로 다녀올게요!”

유라는 한솔이를 끌고 집 밖으로 사라졌다. 한솔이가 자가용이 있으니 한솔이한테 시키는 게 제일 편하지. 그럼 이제...

나는 쭈뼛거리며 서 있는 아나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나트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내가 설명을 안 해주긴 했어.

“저,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가 물어봐도 될까요...?”

“음...너희 쪽에는 새해가 되면 행사 같은 거 해?”

보통 판타지 세계에도 신년 행사 정도는 하던데.

“아, 새해기념으로 전 대륙에서 축제를 열어요.”

“그거야. 우리도 똑같이 신년행사를 하는 거야. 다만 축제가 아니라 집안에서 벌이는 행사인 거지.”

“아, 그렇군요.”

내 말에 아나트는 납득이 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맞춤설명이 최고야. 설의 유래나 의미 같은 건 제쳐두고, 그냥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라는 것만 알면 됐지. 관광가이드도 아닌데 복잡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되나요?”

“나랑 같이 준비를 할 거야. 새해 행사답게 준비할 요리들이 하나같이 만들기 번거로운 음식들이 많거든. 미리 세팅을 해놓고 만들 수 있는 건 만들면서 재료가 오길 기다릴거야.”

지금 보낸 것도 미리 사놓은 것 중에서 재료 상태가 좀 애매하거나 모자란 것들 마저 사오라고 보낸 거니까 일단 적당한 것부터 만들어야지. 부모님은 저녁에 오시기로 했으니까 그 전까지 준비를 끝내놓으면 된다.

지금은 오전 11시. 나는 아나트와 함께 정신없이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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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작대기는 뭔가요?”

“아, 그건 꼬치 만들려고 쓰는 거야.”

설날이든 추석이든 손은 많이 가지만 인기는 많은 산적꼬치를 만들 위한 꼬치지. 재료도 적당히 다채롭게 준비해뒀다. 게맛살에, 파에, 고기에, 햄에, 버섯에, 당근. 이정도면 재료는 충분했다.

단무지? 조까! 난 꼬치에 단무지가 들어간 게 제일 싫어! 단무지는 산적꼬치에 있어서는 안 될 재료다! 단무지 하나 넣을 자리에 고기를 하나 더 끼워 넣고 말지! 집안의 가장은 나고 내가 만드는 거니까 아무튼 단무지는 안 넣습니다.

불만 있으면 5700자 짜리 탄원서라도 써서 내십쇼. 그러면 잠시 고려하다가 거절해드림.

나는 도마에 재료들을 올려놓고 먹기 좋게 썰기 시작했다. 아나트에게는 고기를 굽게 시켰다. 귀찮아서 삶을까 했는데 그럼 좀 맛이 별로야. 산적꼬치용 고기는 적당히 익혀서 꽂아 넣고 부치면서 제대로 익히는 게 국룰이지.

아닌가? 아님 말고.

손님이 적다곤 해도 우리 집의 인원수가 6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양은 꽤 많았다. 야채와 게맛살, 버섯을 다 자르고 나니까 거의 1시간이 지났더라.

너무 많이...산건가?

뭐 남으면 나중에 냉동실에 넣어 놨다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으면 되지. 그러라고 있는 전자레인지인데. 요즘은 에어프라이어가 대세기는 하지만. 에어프라이어가 너무 좋아서 전자레인지가 좀 빛을 바래긴 했는데 대충 해먹기엔 전자레인지 만한 게 없어.

나는 산처럼 쌓인 재료를 한 번 훑곤, 아나트가 익혀온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냈다. 새끼손가락 사이즈면 적당하겠지? 재료를 여러 개 끼워서 만드니까 고기를 큼지막하게 썰 필요가 없었다.

“이정도면 준비는 됐고...아나트, 여기 이 이쑤시개에 재료를 이렇게 끼워 넣어줘.”

나는 시범삼아 게맛살­파­당근­고기­버섯 순으로 끼워 넣은 것을 보여주었다.

“순서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데 한 꼬치에 재료는 한 개씩만 넣어야 돼. 이건 뭐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고. 아무튼 다 그렇게 꽂으면 이야기 해줘. 나는 다른 음식들도 준비해야 되니까.”

“네...”

아나트는 산처럼 쌓인 재료들을 보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좀 많긴 하지. 내가 사실 산적꼬치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고, 8명이 먹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원래 설날 음식은 조온나 만들어두고 그걸로 일주일 정도는 연명하는 게 국룰이라고.

산적꼬치는 그래도 되는 음식이야.

맛도 좋고 영양밸런스도 아마 괜찮고...일단 호불호가 덜 갈린다. 간혹 싫어하는 재료 한두개씩 빼서 먹는 애들이 있긴 하지만, 뭐 애들이 편식 한두 번 하나. 편식하면 X숲 못하게 하면그만이야!

진짜 제사는 안지내서 다행이지. 제사까지 지냈으면 리온이랑 에포나도 불러서 일 시켜야 됐을 거다. 그럼 이제 갈비를 양념에 버무려서 재워두고, 잡채...는 지금 바로 준비할 필요는 없고.

전은 동태전에 빈대떡에 동그랑땡에 애호박전 정도면 되겠지. 햄을 전으로 부치기엔 쉽긴해도 귀찮긴 하고. 이미 꼬치에 들어간 게 한가득이다.

“언니! 저희 왔어요!”

“오냐, 그럼 이제 와서 이거 꼬치 좀 꽃아!”

“알았어...요?! 아니 얼마나 꼬치를 만들려는 거에요? 꼬치로 장사해요?”

“너희들 입에 들어갈 꼬치다. 악으로 깡으로 만들어라.”

“저거 다 꽂으면 보기만 해도 물릴 것 같은데...”

“유라야, 괜찮아. 다 먹게 돼 있어. 오늘 못 먹으면 내일 먹고, 내일 못 먹으면 내일 모레 먹고, 내일 모레 못 먹으면...”

내 말에 유라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산적꼬치는 두고두고 먹어도 안 질린다고.

“나는 피만 있으면 돼.”

“피는 알아서 뿌려 드시구요.”

피에 젖은 산적꼬치라니, 충격적인 비주얼이겠네.

“너무 많이 만드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전 부칠래?”

“...꼬치 꽂을게요.”

유라는 발판을 가져와 그 위에 올라서서 꼬치를 꽂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인원수는 충분하고...나는 왜 자기는 안 시키느냐는 한솔이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너는 방에 들어가서 설날 기념 방송이라도 하렴.”

“아 왜!”

“네 요리 실력을 생각해봐. 난 새해를 축하하려고 음식을 만드는 거지. 새해에 묫자리 짜려고 음식을 만드는 게 아니야.”

“너무하네!”

“그렇게 말해도 안 바꿔줘. 돌아가.”

결국 본인도 본인의 처참한 요리실력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인지, 한솔이는 툴툴거리며 거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저 포지션이 딱 개꿀이라고.

장만 봐오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포지션 말이야.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가즈아!”

“가...좌?”

“가.즈.아.”

“가.주.와?”

아 몰라 뜻만 통하면 됐지. 나는 미친 듯이 전을 굽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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