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 외전:흡혈귀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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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화장실. 그 날도 평범한 날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렇게 지나가는 하루. 한솔은 여느 때처럼 하품을 하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낡은 화장실이긴 하지만, 이미 익숙해진 곳이었기에 한솔은 아무렇지 않게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이게 뭐야...”
한솔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토종 한국인의 갈색 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영화에서나 볼법한 반짝거리는 금발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명백하게 한국인이라고 볼 수 없는 서양인의 이목구비.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소름끼치게 위화감 넘치는 외모이기도 했다.
꿈인가?
한솔은 혹시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 봤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꿈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한솔은 이 상황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볼을 더 세게 꼬집어 봤지만, 볼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이 상황이 엄연히 현실임을 냉정하게 알려주었다. 한솔은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 상황이 결국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꿈이 아니면, 뭔데?”
“뭐긴 뭐야. 꿈이지.”
“뭐?”
한솔은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입가에 피를 잔뜩 칠한 자신이 자신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입 꼬리를 비튼 것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꿈에서 깰 시간이야.”
“허억...허억...”
도대체 뭐야. 왜 이제 와서 그런 꿈을...한솔은 고개를 저으며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악몽을 떨쳐내려고 노력했지만, 기억조차 안 나는 악몽은 계속해서 한솔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피가 부족해서 그런 걸까. 한솔은 미리 준비해둔 텀블러에 담아둔 피를 전부 들이켰다. 달콤한 피비린내와, 피 특유의 찐득한 맛이 입을 통해 목구멍 안쪽으로 스며든다.
그녀의 친구인 유진의 피는 한솔에게 있어 생명수나 다름없는 물건이었기에, 한솔은 언제나 유진의 피를 그녀의 방에 있는 냉장고에 일정량 보관해 두고는 했다.
텀블러를 깨끗하게 비운 한솔은 다시 잠에 들려고 했지만, 온 몸에서 흘린 식은땀 때문에 찝찝해서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라도 하고 다시 잠들어야겠다고 한솔은 생각했다.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간 한솔은 차가운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머릿속에 찐득하게 달라붙던 악몽을 몰아내기에 딱 좋은 차가움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한솔은 다시 잠들려고 했지만, 잠깐, 아주 잠깐 달이라도 구경하기로 했다. 잠들려고 하면 잠들 수야 있었지만, 한솔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피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었지만, 그렇다고 무의식에 잠재된 스트레스까지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이 세상은 피를 합법적으로 구하기 정말 어려운 세상이었다. 한솔은 자기가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한정 피를 공급 받을 수 있는 경우가 그녀 외에 존재할 리가 없었으니까.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한은. 며칠 전 미국에서 사람들을 납치해서 피를 빨아마시던 흡혈귀 변이자가 사살되었다는 기사를 한솔은 본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범죄를 저지를 용의 따위는 없었지만,
흡혈 충동이 생각 이상으로 견디기 어렵다는 사실은 그녀도, 범죄를 저지른 흡혈귀도 다르지 않았기에, 한솔은 유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며 몸서리치곤 했다.
흡혈욕구를 제어하는 연습을 해도 될 정도로 많은 피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솔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운이 좋은 흡혈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덕에 아직까지 진짜로 사람을 덮친 적이 없었다.
변이자관리본부에서 지급하는 피는 아무래도 질이 좋지 않고, 양이 적었기에 대부분의 흡혈귀는 끈임없이 흡혈충동과 싸워야 했으니까. 그나마 피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연인이나 부부는 그나마 상황이 나았지만, 혼자서 흡혈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은 흡혈충동 때문에 사회생활에 지장이 많았다.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목덜미는 언제나 흡혈귀에 눈에 먹음직스러워 보였으니까. 충동을 참지 못하고 저지른 범죄가 한 둘이 아니었기에, 변이자들 중에서는 흡혈귀의 평판이 가장 좋지 않았다.
애초에 흡혈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다. 흡혈귀는 영화나 만화에서 볼 때나 매력적인 존재이지, 현실에서까지 매력적인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 외모는 아름답다지만, 인간답지 않은 아름다움이기에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고. 피를 마신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곤 했다. 사회적 평판이 좋은 축에 속하는 그녀도 종종 짖궂은 질문에 시달릴 때가 있었으니까.
“후우...”
언제까지 이 집에 있을 수 있을까. 아직은 연인도 없고 나갈 이유도 없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어? 안자고 있었네?”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유진은 한솔의 옆자리에 앉아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둥그렇게 뜬 보름달이 어두운 밤을 홀로 환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한솔은 착잡한 표정으로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떴다고 흡혈충동 같은 게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흡혈귀가 밤의 권속이기 때문인지 한솔은 보름달을 쳐다 볼 때마다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악몽을 꿨어. 흡혈귀가 된 첫날의 꿈이었던 것 같아.”
언제나 꿈이 그렇듯이 내용은 흐릿했지만, 한두 번 꾸어본 것이 아니었으므로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나도 가끔 그런 꿈을 꿀 때가 있어. 그때마다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유진은 한솔의 말에 맞장구 쳐주며 한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복잡한 표정, 유진은 벌써 1년 가까이 한솔과 만났기에 한솔이 악몽을 꾸면 달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확실한 건,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는 아주 오래 살게 될 거라는 거야.”
아직 변이자가 등장한지 10년 밖에 되지 않아 오로지 유전자 분석에 의한 결과였지만, 흡혈귀는 엘프와 같이 대표적인 장수종에 속했다. 최소 2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인생을 한솔은 살아야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검사를 통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안겨주기엔 충분했다.
물론 불로장수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장 유라만 해도 그녀보다는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한솔은 고뇌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을 법한 미래는 아니었다. 교우관계가 대부분 같은 장생종 혹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신들인 유진과는 다르게 한솔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인간이었으니까.
친구, 친척, 그리고...
“뭘 그렇게 걱정이 많아? 나중 일은 나중 가서 생각해.”
“그렇긴 한데...지금 이렇게 쓸데없이 감성에 젖어서 고뇌하는 것보단 그게 낫겠다.”
한솔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유진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유진은 잠시 불편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솔의 어깨를 두드렸다.
“달이 이쁘네.”
“...그러네.”
듀라한과 흡혈귀는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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