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158.엘프(이)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3)
* * *
“호적에 쓸 이름을 정하라고요? 그대로 하면 안되요?”
이름을 바꾸라는 건 좀 그런데.
[자네! 성을! 붙여서! 쓰면! 이리온! 일세! 이름에! 편견은! 없지만! 이름으로! 놀림! 받을 수! 있으니! 말일세!]
“요즘 시대에 그런 인간이 있을...아닌가. 많나?”
없을 것 같지는 않네. 초등학생이 트럭 몰고 고속도로까지 튀어나가는 세상인데 그런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긴 했다.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네! 게다가! 그 이름은! 발음조차! 제대로! 들을 수! 없지! 않나!]
묘한 배려였다. 하긴 어린애들이 자기 이름으로 놀림 받아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요즘 시대에 다른 사람과 접촉할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이름가지고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게다가 라쿤박사님의 말대로 리온의 이름을 발음할 수 있는 게 나뿐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발음의 문제라고 해야 되나, 엘프어를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야 리온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지만, 기본적으로 이세계의 이름은 이쪽 세상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법칙 문제가 있으니까.
시험 삼아 유라나 한솔이, 은하한테 직접 이름을 말하게 시켜봤는데 아무도 리온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하더라고. 즉, 내가 이름을 알려주거나 한국어로 번역해서 알려줄 수는 있지만, 본인이 자기 이름을 말해봐야 이해 불가능한 언어로 튀어나온 다는 점이다.
내 이웃들이야 다 변이자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이해하겠지만, 생판 모르는 남에게도 그런 배려심을 바라기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 뭣 같은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 시답잖은 이유로 사람한테 칼을 박기도 하는 세상이다.
뭐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는 거야. 결국 리온도 불편할 테고. 아무도 자기 이름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대화의 첫 단추부터 어긋나게 되니까.
예외적으로 에포나는 알아듣는 것 같지만. 애는 애초에 유령마니까 뭔가 판타지스러운 이유가 있겠지. 애초에 사람말을 하는 말이라는 시점에서 태클을 거는 게 이상한 거야.
난 애가 인간으로 변해도 그러려니 할거야. 트럭으로도 변하는데 사람을 변하는 게 대수냐. 좀만 가르치면 아예 X담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헤으응 하는 X담이라니, X덕들 어그로는 찰지게 끌겠군. 아닌가? 오히려 실물 사이즈로 움직이는 X담에 반해서 소리는 들리지도 않으려나?
...생각이 딴 데로 새어버렸다. 지금은 그런 망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름, 이름이라...솔직히 별 생각은 없었는데, 박사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잖아. 이게 선입견인가.
“그럼 제가 오늘 안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일단 리온한테도 물어봐야 하니까...”
[알겠네! 빠른! 답변! 바라네!]
후. 전화를 끊은 나는 목근육을 움직여 머리를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몸과 내 몸을 껴안고 자고 있는 리온 쪽으로 돌렸다. 잘 자고 있네. 깨우기는 좀 미안한데...잠 든지 한시간도 안됐을 거다.
나는 머리카락을 빳빳하게 굳혀 촉수처럼 만든 뒤에 4족 보행 생물체 마냥 거실로 걸어 나왔다. 이거 엄청나게 섬세하고 복잡한 기술이다. 사람이 머리카락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오랫동안 통화를 한 탓에 목이 마르니 물이나 마셔야지. 이제는 왼쪽 머리의 3분의 1을 차지하다시피한 붉은 새치를 움직여 냉장고 문을 열고 물병을 꺼냈다. 물병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머리카락을 다시 움직여 싱크대에서 컵을 꺼낸다.
세연이가 깔끔하게 설거지 해놓은 컵은 묵은 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나는 컵에 물을 반쯤 채우고는 시원한 물로 목을 축였다. 으, 이제 좀 살 것 같네. 차가운 물이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니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다.
“세연아, 리온이 이름은 뭘로 지을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매번 내 등짝에 달라 붙어있어서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딴 짓하느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서 폰을 만지작거리는 세연이를 올려다보았다. 목만 알아서 잘 움직이는 듀라한이랑 서마터폰 중독자 처녀귀신이라니, 이게 무슨 조합이야.
리온이나 다른 사람들 정신건강을 위해서 옷은 입고 다녀야 하나? 내가 그 인형 옷을 어디에 쳐박았지? 집안에 있는 건 확실한데. 한번 입고 몇 달 동안 방치했으니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세연아, 그 인형옷 기억해?”
“어...그 상어?”
“응.”
세연이도 그 인형옷을 기억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네가 내 몸 뺏어서 탈주했을 때 입었던 옷이니까 기억해야지. 내가 그때 얼마나 쫄렸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삼시세끼 소금밥을 먹여주고 싶은 데 내가 음식으로 장난 칠 순 없으니까 참는다.
“아마 옷장 깊숙한 곳에 있을 걸? 그건 왜?”
“입으려고.”
그거 말고 이유가 더 있겠냐. 나는 곧바로 옷장으로 걸어가 인형옷을 찾아냈다. 인형옷은 깊숙한 곳에 보관된 덕인지 먼지하나 없이 깨끗했다. 나는 숙주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기생충 마냥 인형옷 안에 머리카락을 집어넣고, 속을 꽉꽉 채우기 시작했다.
“오...사진 찍어도 돼?”
“찍을 때마다 네 햄버거 하나가 사라질 거야.”
“아쉽다...귀여운데.”
나는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옷장에서 나와 세연이를 올려다보았다. 아 이거 불편하네. 머리 위를 제대로 보기가 힘들어. 머리카락으로 팔다리를 대신 하는 형태라 이래저래 머리카락으로 인형을 조종하듯이 움직여야 하기도 하고.
“폰 그만하고 내려와 봐. 상의할 일이 있어.”
내 말에 세연이는 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무슨 일?”
“리온 이름을 개명해야 한다는데. 괜찮은 이름 생각나는 거 없어?”
“어...나비?”
“뭔가 좀 올드한 느낌인데. 이름...이름...솔직히 이름 짓는 건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이름지을 일이 딱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에포나인데 이건 아무래도 연관 있는 단어가 있었으니까 쉬웠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세상모르고 자는 리온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괜찮은 이름 없을까.
그때였다. 갑작스레 울린 초인종에 나는 현관으로 나가려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잠시 멈춰섰다. 어...이대로 나가도 되나? 아 몰라. 그냥 나가자.
“누구세요~”
“언니! 나야 나!”
나야 나? 혹시 신종 사기법이라도 되십니까? 익숙한 목소리라 단번에 유라라는 걸 알기는 했지만. 어쨌든 문이나 열어 줘야지.
나는 뒤뚱뒤뚱 걸어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제.
현관문 손잡이에 팔이 안 닿아! 팔을 쭉 뻗어도 빡치게 손잡이 바로 아래까지 밖에 안 닿는다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손잡이에 팔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살짝 점프해서 손잡이에 매달렸다. 다행히 머리밖에 없으니 무게 때문에 문고리가 빠지는 일 없이 무난하게 매달릴 수 있었다.
나는 그 상태에서 힘겹게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어? 언니 그 인형 옷은 뭐야? 귀엽다!”
“가지고 있던 옷이야. 지금 내 몸은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중이라.”
“평소처럼 머리만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거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 같아서 재밌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애는 처음부터 내 머리 보고 별로 놀라지는 않았던가. 오히려 재밌어 했던 것 같았다. 이제는 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했지만.
유라는 신발을 벗곤 나를 들어올렸다. 사실상 있는 건 머리랑 머리카락뿐이다 보니 무게가 그렇게 무겁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언니, 오늘 저녁은 뭐야?”
“글쎄...”
다른 일 하느라 냉장고 식재료 체크를 안했네. 그전에 뭔가 밥하기가 귀찮아. 치킨 시켜 먹을까. 요즘 치킨을 입에 댄 기억이 없는데. 적어도 한 달은 안 먹은 것 같다. 평소에 배달음식을 많이 시켜먹는 스타일도 아니고.
“오늘은 치킨 시켜먹자. 새로운 식구한테 치킨 맛 좀 보여줘야지.”
“치킨을? 치킨보다는 그냥 밥이 낫지 않을까? 근데 엘프라고 하지 않았어? 고기 먹어도 괜찮은 거야?”
확실히 엘프가 자연을 사랑해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편견이 많지. 근데 자연을 사랑하는 거랑 육식이랑 무슨 상관이지? 육식은 자연스러운 현상인걸? 뭐? 육식을 하려면 동물을 잡아죽여야하니까 다른 거 아니냐고?
그거 식물차별이야 이 새끼들아! 식물에게도 먹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식물도 감성이 있고 감각이 있어! 그러니까 비건도 결국 육식주의자라는 거지! 진짜 비건이 되고 싶다면 흙이라도 퍼먹던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기 들어간 스튜 잘 먹고 있던데?”
“그렇구나...그럼 양념 반 후라이드 반?”
국룰이지. 근데 양이 모자랄 것 같으니까 한 마리씩 시킬까. 일단 주문은 유라 한 테 맡기기로 하고. 나는 내 몸에 느껴지는 간지러움을 느꼈다. 잠에서 깬 것 같은데.
“주인님! 작아!”
깜짝이야. 넌 언제 깼니? 아까 거실 구석에서 자고 있었는데. 초인종 소리에 깬 건가? 나는 내 주변을 돌며 나를 훑어보는 에포나를 슬쩍 밀어냈다. 입 냄새나 요놈아.
음...가능할거 같은데.
“에포나, 잠깐 엎드려 봐.”
“응!”
나는 엎드린 에포나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에포나는 내가 올라타자 다시 일어나 거실을 한바퀴 돌며 기뻐했다.
“와! 작은 주인님이 나를 탔어! 유라야 이걸 봐!”
“이대로 우리 방으로 전진! 자 가즈..안대! 멈춰! 달리란 소리가 아니야! 걸어!”
에포나야 여긴 실내야! 층간소음으로 민원 들어온다고! 나는 지느러미로 에포나의 머리를 파닥파닥 때리며 멈춰 세웠다.
“언니 뭐해?”
유라의 시선이 따갑다. 하지만 말을 탔으면 그냥 내릴 수 없잖아! 이건 국룰이라고! 사람이 말을 탔으면 이동은 해 봐야지!
“승마?”
“층간소음으로 신고당해...에포나, 여기서 뛰면 안 돼. 여기서 뛰어다니면 무서운 아저씨들이 와서 에포나를 혼낼 거야.”
“아니 혼나는 건 나잖아.”
집주인인 내가 혼났으면 혼났지 이 귀여운 망아지를 왜 혼내.
“언니...”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보지 말란 말이다! 눈치 없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 같은 따가운 시선 멈춰!
“...지금부터 우리 엘프 꼬마의 한국 이름을 정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갑자기 이름을? 그 리온이라는 이름 그대로 쓰면 안 돼?”
“내 성 붙이면 이리온인데? 조금 그렇지 않나? 라쿤 박사님이 그렇다는데?”
“그렇게 되나? 조금 신경쓰이는 이름이긴 하지만 난 괜찮은 것 같은데...”
“나도 그렇긴 한데, 그래도 호적에 등록할 이름이 필요하긴 해서.”
“이름...이름...나비?”
그 이름 왠지 무서운데. 뭔가 얀데레처럼 웃으면서 미친 발언을 할 것 같은 이름이야.
“그건 좀. 뭔가 그럴듯한 이름 없을까...”
“나리?”
“나리? 나리이이이?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이쪽이 좀 더 부르기 편하네. 이것도 성이랑 붙여서 부르면 이나리라 묘하게 일본풍 이름이 되어버리긴 하는데 그런 거 신경 쓸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일본이름 같다고 생각한 당신, 혹시 씹덕이 아닐까요?
눼!
“나리...괜찮네. 그래도 좀 더 후보군이 있을까. 이왕이면 리온이 결정해 주면 좋은데, 아직 자고 있지않...”
“*신님...?”
아 깼나보네. 나는 방문 틈새로 에포나위에 탄 나를 올려다보는 리온을 내려다보았다.
“*깼니? 지금 정말 중요한 이야기 중이니까 여기 와서 앉으렴. 여기서 쓸 이름을 정할거야.”
“*이, 이름을요? 그대로 쓰면 안 돼요? 촌장님이 지어주신 건데...”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이게 엘프어야? 신기하네...마치 음질 구린 음성을 듣는 느낌이야.”
모르면 그렇게 들리긴 했지. 나도 맨 처음에 그랬고.
“주인님! 우리 이대로 나가서 산책하자!”
“안 돼!”
내 사회적 평판을 떨구려 하지 마! 내 머리가 떨궈지면 내 사회적 평판도 나락간다고! 난 그런 현실 참을 수 없어! 듀라한은 듀라한 답게 집에서 머리나 굴리면서 살아야지! 합법적인 재택근무 생활을 포기할 수 있을까 보냐!
“우웅...이대로 산책가면 안 돼?”
은근슬쩍 애교부리면서 떼쓰지 마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너 며칠 전까지 엘프마을에서 미친 듯이 뛰어 다녔잖아. 그렇게 뛰어다니고도 성이 안찼어?
어쨌든 에포나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끊겼네. 그래서 이름 어떻게 하지? 그냥 대충 정하고 넘어갈까?
“나리 *라는 이름은 어때?”
“나...리? *모르겠어! 하지만 신님이 지어준 거니까 좋아!”
좋아 그럼 이나리다.
너는 오늘부터 이나리야!
그리고 이제부터 진짜 호적상 내 딸이 되는 거네...
이게 바로 쾌락없는 책임인가.
나는 결혼할 생각도 남자랑 섹스를 할 생각도 없으니까 평생 쾌락있는 책임이 생길 일은 없다. 나는 ‘x브스 선정 유니콘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소녀 1위’ 타이틀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처녀로 살겠다!
“쾌락없는 책임...”
“...그렇네...”
“대충 마음으로 낳아 길렀다고 하자.”
“뭔가 다큐 같은데서 할 것 같은 소리네. 그러고 보니까 최근에 채식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투 머치 토킹 멈춰! 나는 유라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리온은 알아듣지를 못하니 그냥 저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유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혼란핟다 혼란해.
그래도 그게 우리 집 일상이니까.
리온아, 아니 나리야, 너도 익숙해져야 할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