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157.엘프(이)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2)
* * *
리온을 데려오면서 생각한 것이 있다.변이자란 도대체 뭘까.나 같은 누군가의 의도하에 몸이 철저하게 개조당한 경우를 빼면,대부분의 변이자는‘어느 날 갑자기’몸이 다른 종족,혹은 인종으로 바뀐다.나처럼 성별까지 바뀐 케이스는 아직 없는 모양이라지만,어딘가에는 나처럼 성별까지 바뀌어버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리온은 명실상부한 순혈 엘프다.순혈이니 혼혈이니 따지는 건 무의미 하지만,굳이 분류를 했을 때 그렇다는 거지.그럼 그 양장점의 엘프는 순혈일까?아니면 혼혈일까?리온과 그 깐프는 같은 종족일까?아니면 다른 종족일까?
...정말 궁금하다.
[엘프귀를 숨기는 방법이요?저희 양장점에는 엘프 변이자 분들을 위한 패셔너블한 모자가 있답니다!]
“넉넉하게 아동복이랑 같이 주문하려고 하는데,언제쯤 방문하면 될까?”
[오늘 일이 없으시면 바로 여분이 있으니 바로 오셔도 되구요,일정이 있으시면8시까지는 운영하니까 그7시 전까지만 오시면 되요.]
기밀관리본부에 들렀다가 가면 시간이 되려나.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텐데.라쿤 박사님이 나를 붙잡고 한무설교를 시전하려고 하시겠지만 리온 핑계로 빠져나가면 된다.오늘 하루도 바쁘겠구만.
“오전은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간단하게 한글이나 가르칠까.”
나는 에포나와 놀고 있는 리온을 보며 생각했다.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배워야지.내가 언제까지고 인간번역기 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일단 글자라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어떻게 호적을 만들어서 우리나라 사람이 되면 기초교육과정정도는 이수해야 할 텐데,그러려면 최소한 초등학생 수준의 언어구사능력 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헤으응!”
“헤으응!”
...벌써부터 앞날이 어둡긴 하지만.
그렇다고 화내기도 그렇고.재내들은 그냥 저게 뭔지도 모르곤 막 쓰는 거란 말이야.뭐라 하기도 좀 그래.좋지 않은 말이라고 하면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볼테고,그럼 나는 답하기 곤란해져서 어떻게든 얼버무리는 결과가 보인다.
“후...피곤하다...”
저 말버릇을 고치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교육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그렇다고 에포나랑 리온을 떼어 놓을 수도 없고.저렇게 화기애애하게 잘 노는데 어떻게 떼어놔.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육식주의자 여신님 마냥 냉정하게 손절각을 재게 만들게 하진 못하겠다.
그러고 보니 봉인 당하신 육식주의자 여신님은 여전히 조용하시네.내 머릿속에서 떠드는 사람이 하나 사라졌다는 사실은 상쾌하기도 했지만,어쩐지 외롭기도 했다.이래저래 내 몸을 뺏으려고 했던 괘씸한 여신님이지만,이래저래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까.
“괜찮아?햄버거 먹을래?”
“그러다 진짜 소금샤워 하는 수가 있다?나 지금 정말 심란하니까 건들지 말아줄래?”
“나는 그냥 기분 좋아지라고 햄버거를 권유했던 것 뿐인데...햄버거를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야...”
햄버거가 마약이야?배부르면 기분 좋아지긴 하겠지만.
보나마나 점심을 햄버거 시켜 먹자는 소리겠지.한두 번 그런 것도 아니고.잊을만하면 은근슬쩍 햄버거 배달을 권유하는 게 세연이의 버릇이다.
일주일에 한번정도는 내가 식사를 차리기 귀찮으니 그렇다 쳐.근데 이틀에 한번 꼴로 물어보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사람은 균형 잡힌 식사를 해야 된단 말이야.적당한 야채와,적당한 고기가 조화된 식단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필수라고!
밥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가 식사를 만들 때 얼마나 고민하는 부분인데 그걸 햄버거로 도배해 버리는 건 좀...뭐 이 빌라에 사는 변이자들 중에 햄버거만 먹는다고 몸이 나빠질 사람은 거의 없긴 했다.
한솔이야 요즘은 내 피가 거의 주식 취급이고.유라는 편식도 안하고 뭐든 잘 먹고.우리 집에서 편식하는 건 이 햄버거 성애자 처녀귀신 뿐이다.
“뭐부터 가르쳐야 하나...솔직히 가르치는 건 별로 자신이 없는데.”
일단 글자부터 익히게 해야 되나.대충 내가 어떻게 발음하는 지 알려주고,따라 쓰게 하는 식으로?내가 살다살다 한국어를 진지하게 가르쳐야 할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내가 한국어에서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고는 수능2등급 뿐이다.
“산 넘어 산이네...”
그래도 식구는 이제 그만 늘어났으면 좋겠다.나는 폰으로 일정을 확인하며 생각했다.내가 결혼한 것도 아니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밑에 딸린 애만 셋이야!뭔데!내가 장발장이라도 돼?
후,이런 생각해봐야 나만 피곤해질 뿐이지.나갈 준비나 해야겠다.
“*이거 쓰고 있어.절대 벗으면 안 되고.알았지?”
“왜?”
“*여기는 엘프가 없어서 네가 모자를 벗으면 다른 사람들이 널 전부 쳐다 볼 거야.나쁜 사람이 널 보면 이놈~하면서 잡아갈지도 모르고.”
물론 그런 놈을 실제로 만나면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릴 자신이 있다.내가 귀신도 잡아보고,호랑이도 잡아보고,용(짭)까지 잡아본 몸이다.이제 와서 사람하나 못 막을 리가 없었다.애초에 요즘 세상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게 만들어야지.
“유진씨?준비 다 됐어요?”
“잠깐만.마지막으로 체크 좀 하고.”
실용성이라곤 별로 없어 보이는 선물 받은 크로스백이랑 역시 나한테는 큰 의미는 없지만 물티슈도 하나 챙겨놨고,폰이랑...혹시 몰라서 저번에 사놓은X럭시 워치를 손목에 채워놨으니 잃어버려도GPS로 찾을 수 있었다.
“유진씨 가족 늘리는 속도가 심상치 않으시네요.혹시 가족수집가세요?”
“아니,이건 불가항력인데.내가 결혼도 안했는데 가족이 늘어봐야...”
한솔이는 내 등짝에 들러붙어 나오지 않으려하는 리온을 보며 살풋 웃었다.안심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리온은 오히려 기겁하며 내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흐,흡혈귀...어떻게 낯에...도망쳐야 돼요!흡혈귀는 밤에 잠 안자고 있으면 잡아간다고 촌장님이 그랬어!”
“저건 착한 흡혈귀야.오늘 너를 목적지까지 태워주실 분이고.자 인사해보렴.안.녕.하.세.요!”
내 옷 좀 그만 잡고.옷 다 늘어지겠다.리온은 그래도 내 말에 어느 정도 안심한 건지,내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다시 내 허리에 들러붙었다.
“무서워!”
“흡혈귀는 인기가 없네요.나도 이왕이면 엘프 같은 걸로 변했으면 좋았을 텐데.”
한솔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리온이 거부반응을 보이자 적잖이 실망한 모양이었다.
나야 듀라한이라서 그러려니 했지만,창백한 피부에 붉은 눈은 어린애들이라면 충분히 무서워 할 만하니까.영화에서 볼법한 흡혈귀 같은 외모니까...방송에서야 조명빨로 피부색 정도는 커버칠 수 있어서 상관없지만,무려 언데드 취급 받는 종족이라고.보통은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그냥 어딘가 아픈 사람 정도로 인식하겠지만.
“자,이제 가자.너도 몇 시간 후엔 방송 시작이니까 빨리 가야지.”
“올 때는 어떡하시려고요?”
“기밀관리본부쪽에서 어떻게 해주겠지.”
애초에 그게 일이니까...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럼 빨리 출발해요.시간이 좀 아슬아슬 할 테니까 빨리 갔다 와야 해서.”
“알았어. *리온,나가자.”
“*응.”
여전히 한솔이를 경계하며 길고양이 마냥 움직이는 리온을 보며,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오게!엘프는!어딨나!”
“박사님,그러다 잡혀가요.”
“괜찮네!연구만!할 수!있다면!”
이 라쿤,진심으로 말하는 건가?그 오크 때도 그렇고 이 라쿤 연구거리만 찾으면 환장하는 것 같은데.
“애가 무서워 하니까 소리 지르는 건 좀 자제해 주세요.”
“나는!그럼!말을!하지!말라는!건가!”
“아니 성량을 좀 줄이시면...”
그나마 외형이 귀엽기 그지없는 라쿤이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말하는 의사가운 걸친 라쿤이라니.관심이 생길만도 하지.엘프면 동물이랑 친...한가?엘프 마을에서 먹었던 재료에 고기 있는 걸 보면 사냥하면서 먹고 살고 있던 거 아니야?
동물이랑 친함(식량으로 먹어치움)인건가?
“흠흠!어쨌든!만나서!반갑네!나는!라쿤!박사일세!번역 좀!해주게!”
“*라쿤 아저씨가 너보고 반갑대!”
“*진짜요?”
“*응.진짜로.”
“무슨!이야기를!하는지!하나도!모르겠네!난생!처음!들어보는!언어로군!놀라워!”
라쿤박사는 좀 더 가까이에서 리온을 보고 싶었던 모양인지 매번 올라와 있었던 책상에서 뛰어내려와 리온에게 다가왔다.다행이도 이번에는 상대가 동물이기 때문인지,리온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라쿤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족보행에 말하는 라쿤이라니,꽥꽥 소리 지르는 거 빼곤 애들한테 인기 많을 상이긴 하지.
“겉보기엔!변이자랑!다를 게!없군!”
“그렇더라고요.”
육체적으로는 아무리 봐도 우리가 아는 엘프 그 자체 같은데.내가 아는 엘프 변이자라곤 양장점에서 일하는 그 깐프밖에 없어서 비교하기가 좀 애매했다.
“*귀여워!”
리온은 어지간히 라쿤박사(의 외형)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리온은 조심스럽게 라쿤 박사에게 손을 뻗었다.한번 만져볼 생각인 모양이었다.귀엽긴.라쿤박사는 평소라면 버럭 소리 지르며 재주 좋게 손을 쳐냈겠지만,희귀한 샘플에 어린아이다 보니 차마 쳐내지 못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졌다.
“나는!동물이!아니네!”
“아니 동물 맞잖아.왜 갑자기 생물학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러십니까.”
“*털이 부드러워~”
리온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굴욕을 잔뜩 맛본 라쿤 박사는 일그러진(겉으로 보기엔 으르렁 거리는)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호랑이가 내 앞에서 으르렁 거리며 위협하는 것도 봤는데 이제 와서 내 엉덩이에 겨우 닿을 법한 사이즈의 라쿤한테 쫄을 리가 없었다.
“자네는!나중에!설교일세!”
에반데.
“내가 뭘 했다고...”
“그!묘하게!비웃는!얼굴이!아무것도!안한!얼굴인가!”
“비웃다니,그냥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을 뿐인데!”
이거 너무 하시네.나한테 화풀이를 하려고 하시다니.근데 어째 일은 진행이 안 되고 콩트만 하는 것 같네.슬슬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후딱 끝내고 가야지.
“...그래서 이 애 호적은 만들어 주는 거죠?”
“그렇네!다만!이 아이를!돌보려면!자네나,자네!부모의!호적에!넣는 게!빠르겠지!”
“그렇죠.”
거기까지는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근데 부모님 호적에 애를 넣어버리면,어...감당이 되나?본가로 소환당해서 깊고 깊은 추궁과 함께 구박받을 것 같은데.어머니가 애들을 싫어하지는 않지만,갑작스레 딸이 생겨버리면 놀라겠지...
게다가 그 딸이라는 게 보통 사람도 아니고 엘프란 것도 문제다.참...복잡한...문제야...
“자네!부모는!이 사실을!아는가!”
“아뇨.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우리 부모님은 평범하신 분들이라 이런 트러블에 휘말리지 않으셨으면 하는데.이쪽 세계랑 연이 없으셨으면 한다.내가 이렇게 된 시점에서 의미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내 주변이 어지간히 시끄러워야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뻥뻥 터지는 데 어떻게 알려.그러다 부모님까지 휘말리면 진짜 좆같을 거라고.
지금 상황에선 멀리하는 게 최고다.그러므로 부모님의 호적에 함부로 집어넣을 순 없었다.
“그럼!방법은!자네의!호적에!집어넣는!방법밖에!없네!즉!양녀로!들이는!거라네!”
딸이라...나는 리온을 내려다보았다.이 애를 보호하기 위해선 그게 제일 낫겠지.나도 그것 말곤 딱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다른 사람 명의를 빌려와서 호적을 파는 것도 좀 그렇고.내 양녀라는 형태로 처리하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다른 사람한테 피해도 안주고.어차피 나랑 같이 사는 건 기정사실이니 나는 상관없었다.갑작스레 엄마가 된다고 해도 이미 엄마노릇 하고 있던 것도 있고.결혼할 생각도 없고.애초에 남자가 연애대상으로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야.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알겠네!”
라쿤박사는 내 말에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내가 진지하다는 걸 눈치 챈 모양이겠지.나는 리온을 부르곤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 리온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리온,여기는 신분이 굉장히 중요해서,신분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거든?그러니까,넌 이제부터 내 딸이 될 거야.알았지?”
“*내가 신님의 딸이 되는 거야?”
“*어...그렇지.”
그렇긴...한데...직접 들으니까 좀 어색하네.딸이라...이 나이에10살 배기 딸이라니,사람들이 참 기묘한 시선으로 쳐다보겠군.애초에 외모 때문에라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겠지만.
백발에 붉은색 새치가 나 있는 미녀랑 기다란 귀를 가진 엘프 꼬마의 조합이라니.시선이 집중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그럼!피를!뽑아도!되겠나!”
“네네.잠시 만요. *리온,라쿤이 네 몸이 건강한지 검사하겠다고 하니까 얌전히 있어야 돼.알았지?”
“*네!”
나는 리온을 의자에 앉혀놓고 나도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주사기를 보면 놀랄 테니,주의를 끌어줘야 했다.애들은 주삿바늘을 엄청 무서워한다고.
“그럼!하겠네!”
재주껏 팔꿈치 부근을 묶고 주사기를 꺼낸 라쿤 박사가 소리쳤다.나는 라쿤박사 쪽을 쳐다보려는 리온의 얼굴을 붙잡고 내 쪽을 보게 했다.
“*리온,우리 저녁은 뭘 먹을까?”
“*저녁?음...나 스튜가 먹고 싶어!”
“*스튜?만들어본 적은 없는데...한번 도전해 보지 뭐.”
“다!끝났네!”
역시 애들 주사 맞기 편하게 하려면 주의를 끌어야지.나는 세상천지에 다시없을 귀중한 보물을 다루는 것처럼 주사기를 챙기는 라쿤박사를 보며 생각했다.
“그럼!이제!가도!좋네!가는 길은!은하를!부르도록!하겠네!”
“고맙습니다.”
“자네를!위한 게!아닐세!저!아이를!위한!거지!좀!불안하지만!자네에게!맡기겠네!”
거 말이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나도 좀 긴가민가 하긴 하지만.
“그럼 나중에 봐요.”
“되도록이면!보지 않았으면!좋겠군!자네는!언제나!트러블을!몰고!오지!않나!”
섭섭하게 구시네.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랜만입니다. 오늘은 귀여운 손님도 데리고 왔군요."
"내 딸이야."
"네?"
"...양녀지만."
"...그, 그렇군요."
나와 리온은 라쿤박사님의 집무실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던 은하와 합류했다. 은하도 이번에 찾아온 깜찍한 손님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내밀었다
리온은 내 얼굴과 은하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보다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사탕을 집어들었다.
"...귀엽네요."
"그렇지?"
이젠 내 딸이야. 배아파 낳은 딸은 아니지만.
어쨋든. 묘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리온의 손을 잡고 기밀관리본부를 떠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