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133.용서받지 못한자(1)
* * *
“할아버지, 여기서 주무시면 안돼요. 주소 불러 주세요. 저희가 데려다 드릴 게요.”
“#(@Y$&*$Y&(...”
“네? 할아버지? 방금 뭐라고 하셧어요?”
누군가의 신고에 의해서 골목에 있던 노인을 찾아온 순경은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노인의 복장에 당황했지만, 금방 신경을 끄고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날씨가 그렇게 춥거나 덥지는 않았지만, 이런 날씨도 노인들에게는 치명적이니, 치매에 걸린 듯 한 노인을 일단 경찰서로 데려가든, 아니면 집을 찾아서 데려다주든 해야 했다.
“고순경, 이 할아버지가 뭐라는지 알겠냐?”
“모, 모르겠습니다. 한국어는 아닌 것 같은데...”
“영어도 아니고...그냥 정신이 나가셔서 아무렇게나 말하는 건가?”
“일단 차로 데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네가 왼쪽에서 받쳐봐. 내가 오른쪽에 받칠 테니까.”
“!@*$!#T^&$!...”
두 경찰은 노인의 양옆에서 노인을 세우기 위해 노인의 겨드랑이 밑이 팔을 끼우고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였다.
“야, 뭔가 갑자기 춥지 않냐?”
“갑자기 춥기는 합니다. 빨리 차에 돌아가야...”
“미안허이.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말일세...”
“어....어어.....”
노인을 부축하려던 경찰이 의식을 잃고 더러운 골목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노인은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온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들의 지식과 생명력을 흡수한 노인은 약간이나마 총기어린 눈빛으로 쓰러진 경찰들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전장을 호령하던 건강한 육체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이정도면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는 데는 충분했다.
“이 정도면...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겠군.”
최소한의 배려로 나동그라진 경찰들을 곱게 앉혀둔 파르사드는 조용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미련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니, 그, 괜찮아요?”
“아니.”
“...미안해요.”
“아냐 아냐.”
내가 미친 거지.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니 정말 머리가 아팠다. 내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짓을...이제 변태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잖아. 세연아 넌 왜 아쉬운 눈빛으로 보는 거냐.
정말 내가 무슨 짓으로 그런 미친 짓을...모유는 여성호르몬을 과다 분비하는 작용이라도 하는 건가. 이런 기분 알고 싶지 않았는데. 유라가 자꾸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다. 나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며 유라와 함께 속옷매장으로 향했다.
속옷매장에 가는 이유?
가슴이 커져서...모유가 나오면 유선발달 어쩌고 저쩌고 아무튼 가슴이 커져서요! 지금 쓰고 있는 브래지어가 너무 아파서! 새로 사야겠어! 가슴이 커져서 속옷을 새로 사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괴롭다!
[여자로서는 좋은 일이 아니더냐?]
아 좀 닥쳐봐요. 안 그래도 빡치는데 휘발유를 부으시려고 하네. 진짜 채식주의자가 뭔지 보여드립니까? 일주일동안 식탁을 풀밭으로 뒤덮어 버릴겁니다? 화 돋구지 말고 좀 조용히좀 계십쇼.
[난폭하느니라...여는 그대를 그렇게 키운 적이 없느니라...]
그거야 여신님이 키운 적이 없으니까 그렇죠!
[그 몸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느니라! 그러니까 내가 키운 것이 맞지 않느냐?]
몸 뺏으려고 하시던 분이 말이 참 많습니다 그려. 그러면 상호 동의하에 계약서 쓰고 바꾸던가! 뜬금없이 몸 바꿔놓고 그런 말 하시면 참 제가 고마워하겠습니다 그려.
[덕분에 돈은 많이 벌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덕분에 고생도 오질라게 많이 했거든요? 죽을 뻔한 적도 있고.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제 인생을 판타지로 만들어 버린 거에요? 뭐 전생에 제가 나라를 말아먹기라도 했답니까?
[전생...전생이라...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느니라.]
뭐? 진짜 전생에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꼭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더라도...그에 준하는 짓을 저지르는 방법은 많느니라.]
그렇게 들으니까 전생이 궁금해지네. 뭐 아는 거 없어요?
[흠.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느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면 말이니라.]
에라이. 그냥 알려주기 싫다고 말하시죠. 치사하게. 내가 여신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기를 먹었는데! 삼겹살! 뒷다리살! 항정살! 갈매기살! 갈비!
“언니, 먼저 속옷매장부터 갈 꺼지?”
“그래야지. 가슴이 꽉 껴서 답답해...”
“...부럽다...”
가슴 큰게 뭐가 부럽다고. 일상생활에서 불편하기만 한데...나름 아슬아슬하게 거유라인에 들어가는 나만해도 그런데, 한솔이 정도의 사이즈면 일상생활이 정말 불편하지 않을까. 일단 뛰는 건 완전히 무리일 듯 한데.
그러니까 네 납작한 가슴 보면서 시무룩해 할 필요는 없단다 이 꼬맹아. 애초에 네 작은 몸집에 가슴이 커지면 굉장히 언밸런스한 광경이 될 것 같거든? 너는 그냥 그대로 있어줘...나만의 작은 유라로 말이야...
그렇게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에, 목표로 하던 매장에 도착했다. 물론 옛~날에 갔던 곳이 아니라, 은하의 소개를 받아 간 곳이다. 듣자하니 이곳 사장이랑 직원이 변이자라서 변이자들은 웬만하면 이곳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
그런데 서비스업에서 변이자가 대놓고 장사해도 되는 걸까. 들키면 안된다매? 그 정도로 티가 안난다 이건가? 과연 어떤 변이자가 있을지 궁금한데.
“어서오세요~! 연락하셧던 이유진양이랑 장유라양 맞으신가요?”
“아, 네...”
저거...깐...아니 엘프 맞지? 플래티넘 블론드라는 단어가 저절로 생각나는 물결처럼 굽이치는 황금빛 머리카락과, 마스크를 썼음에도 숨겨지지 않는 미모, 그리고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에서 존재감을 자랑하는 기다란 귀. 한눈에 봐도 가느다란 허리에 맞지 않는 풍만한 가슴...
내가 잘 알고 있는 엘프의 모습이었다.
“예약시간에 정확히 찾아오셨네요! 여기가 좀 구석진 곳에 있어서 헤매다 늦으시는 분들이 종종 계시거든요.”
확실히 인기척이 없는 곳에 가게가 있기는 했지. 변이자가 운영하는 가게라니까 그러려니 하기는 했지만. 보통이라면 속옷가게가 있을만한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외곽에, 그것도 골목 깊숙이에 있는 가게가 보통 어디 있을까.
“일단 소개해드리자면, 저희 ‘요정의 장난’가게는 변이자들을 위한 속옷과 의복을 맞춤제작 하는 곳이랍니다. 물론 일반 속옷들도 팔고 있구요, 약 300명 가량의 변이자 분들이 저희 가게를 이용하고 계세요.”
300명? 많네. 서울에 있는 변이자 거의 전부라고 봐도 되나.
“자, 그럼 속옷을 새로 맞추러 오셧다는 이유진양은 따라와주세요.”
나는 깐...아니 엘프의 말을 따라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는 공간에 들어섰다. 공간 안에는 옷을 벗어놓을 수 있는 작은 서랍과 큰 거울, 그리고 줄자가 있었다.
“자, 그럼 상의를 탈의해 주시겠어요?”
“아, 넵.”
나는 가디건과 셔츠를 벗어놓고 잠시 망설였다. 아 좀 부끄러운데. 그래도 이제는 작아진 브래지어를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조심스럽게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옷들 위에 올려놓았다.
“평소에 관리를 잘 하셧나 봐요! 형태가 아주 이쁜 가슴이세요!”
“...넵...”
부끄러워. 얼굴이 뜨겁다.
엘프 점원은 내 가슴형태를 칭찬하면서, 주머니에서 줄자를 꺼내 길게 뽑아냈다.
“그럼 가슴 아래둘레부터 잴테니 팔 좀 들어주시겠어요?”
“넵.”
나는 엘프 점원의 말대로 팔을 번쩍 들었다.
아찔한 치수측정의 시작이었다.
“어머, C컵이시네요. 다른 분들이 부러워 하시겠어요.”
아니, 못해도 F컵은 되어 보이시는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셔도...C컵이 작은 건 아니지만. 아예 한 사이즈 늘어난 내 가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줌마가 재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엘프가 재니까 얼굴이 터질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 나는 민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거...수치플이야...
“속옷은 매일 갈아입으셔야하니 C컵 사이즈로 속옷을 5세트 정도는 사는 걸 추천 드리고요, 혹시 원하는 디자인 있으세요?”
“어...음...무난한 디자인으로...”
남들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니까...
“안 돼요! 이왕 왔으니까 예쁜 걸로 사야죠! 점원 언니! 혹시 입어볼 수 있나요?”
“물론이죠!”
어, 어? 나는 갑작스러운 유라의 급발진에 반응하지 못하고 유라와 깐프년에 의해 탈의실로 밀어 넣어졌다.
안 돼! 옷 갈아입히기 인형은 싫어!
안돼에에에에에!
“이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군. 말 없는 마차라니...”
파르사드는 어젯밤 마법진을 통해 찾아낸 목표를 향해 움직이며 마주친 수많은 이 세상의 문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네모난 물건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말없이 굴러가는 마차, 하늘을 날아다니는 정체모를 쇳덩이까지.
이 세상은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어쩌면 그가 살던 세상도 언젠가는 이렇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파르사드는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자기 잇속만 차리는 신들만 없었다면, 그들이 대륙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런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신에 대한 증오를 들끓는 마음을 가라 앉히며, 대로를 지나 골목길 앞에 멈춰섰다. 그의 마법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목표대상은 골목길 안에 있었다. 이제 목표가 코앞이었다. 파르사드는 곧 목표가 나타날 거라는 사실에 치솟아 오르는 흥분을 애써 감추며, 골목길 안으로 사라졌다.
“부디, 평화롭게 끝날 수 있다면 좋겠군.”
이루어 질 수 없는 중얼거림을 내뱉으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