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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라한이 되어버렸다-128화 (128/352)

〈 128화 〉 115.화려한 휴가(3)

* * *

“범인은 이 안에 있습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지배인이 외친 대사에, 나는 무심코 튀어 나올 뻔 한 욕을 겨우 집어삼켰다. 저 뭔가 수상한 분위기를 팍팍 풍기던 호텔 지배인 아저씨는 그냥 괴짜였던 걸까. 마치 ‘인생에서 한번쯤 말해보고 싶었던 대사 버킷 리스트’를 달성한 듯한 얼굴이잖아.

실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니 아주 꼴불견이었다. 방을 잘못 들어온 커플이 내 머리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지배인 아저씨는 저딴 말을 꺼내고 있네? 다행히도 눈치 빠른 한솔이가 먼저 경찰에 연락하겠다고 선수를 친 덕에, 경찰이 찾아오는 불상사는 없을 거라 다행이었다.

진짜 경찰들 오면 내가 살아있는 게 높은 확률로 들킬 테고, 그럼 진짜 혼파망의 시작이다. 뒷수습도 어려울 테니 기밀관리본부가 고생 좀 하겠지...사실 지금도 충분히 고생하리라고 생각하지만.

“현장을 최대한 보존해 두도록 하지요. 열쇠는 제가 갖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흑흑...언니...”

“저런...”

“불쌍해라...”

아주 가늘게 실눈을 뜨고 있는 상태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라는 내가 정말 죽은 것처럼 우는 척을 하면서 시선을 끄는 것 같았다. 하긴, 이 상황에 같이 여행 온 사람이 충격 받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다면 의심을 사겠지.

범인은 없지만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까 이 정도의 연기는 필요했다. 유라가 그랬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겠지만. 키가 130cm남짓한 애가 잘도 사람 목을 잘라서 올려놓겠다. 대충 들리는 대화로 짐작해보니 다들 유라를 열심히 위로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나 등이 좀 간지러운데. 다행히도 내 몸은 반쯤 이불에 가려져 있는 상태라 몰래 움직이려면 움직일 수 있겠지만,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참아야했다.

아, 근데 이거 그냥 간지러운 게 아니라 등 쪽에 들러붙은 거 같은데? 온 몸에 소름이 끼친다. 설마 벌레? 그것도 등짝을 스멀스멀 기어오는 느낌이 바퀴벌레나 지네 같은 느낌이라 미칠 것 같았다.

에반데! 시발! 살려줘! 벌레한테 능욕 당해버려!

“일단 문을 닫고 잠가두도록 하겠습니다.”

부스럭.

“...방금 움직인 것 같은데...?”

“...사후경직일 겁니다. 자, 전부 나가시죠.”

등을 기어오르는 불쾌한 감촉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히도 지배인은 내가 움찔거린 것을 사후경직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조씨 헛스윙하는게 솔직히 웃음벨이지만 웃을 수 없는 이 현실이 너무 괴롭다...

나는 문이 닫힌 걸 확인하자마자 머리카락으로 등짝에 있는 벌레를 떼어냈다. 바선생 어찌하여 내 등에 들러붙은 것이오? 시발 머리감고 싶다. 찝찝해! 나는 살짝 열린 창밖으로 바선생을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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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지배인 아저씨가 문을 잠가두고 간 탓에 방안에서는 그럭저럭 조용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근데 그런 건 됐고 배고파. 배.고.프.다.고!

방에 먹을 거 없나? 나는 조심스럽게 방안을 돌아다니며 짐을 뒤졌지만, 있는 거라고는 무더위에 녹아내린 초콜릿 바 하나였다. 와! 프리타임! 휴게소에 들르길 잘했어...나의 선견지명에 만세!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초콜릿 바의 포장지를 뜯어내고 입안에 집어넣었다. 강철도 씹어 먹는 내 이빨은 마치 두부를 잘라내듯이 초콜릿 바를 잘게 조각내기 시작했다. 음. 좀 눌어붙어서 입안이 끈적끈적해졌지만 존 맛. 역시 초콜릿 바는 최고야.

나는 초콜릿 바를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버텨야 되는 거야? 창밖을 본다. 비가 거세게 창문을 두들기고 번개가 내리친다. 날씨한번 주옥같군. 정말 추리소설에 나올법한 분위기다. 이정도의 폭우면 중간에 좀 긴 비포장도로를 지나야 하는 이 기묘한 호텔은 정말 클로즈드 서클(주:추리소설에 나오는 재해, 사고 등으로 고립된 공간을 뜻함)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쩌다 내 휴가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나는 그냥 늘어지게 자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밥 먹고 뒹굴 거리다 바다에 가서 발 좀 담그고 에포나랑 같이 산책이나 하려고 했건만...에반데.

진짜 에반데.

여기 호텔 밥 꽤 맛있었는데 이제 호텔 밥은커녕 뭐 먹고 살지? 밥심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다가온 비극적인 현실엔 눈앞이 캄캄해졌다. 기밀관리본부에서 요원이 언제 파견될지는 모르지만, 하루 이틀 만에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바깥 상황 보면 영...

[곤란한 상황이로다...]

그러니까 뭔가 해결책 좀 없어요? 시간을 돌린다거나...

[그런 일이 가능했다면 내가 이 꼴이 되었겠느냐?]

아 그르네. 차라리 이대로 탈주해서 편의점을 갔다 올까. 은근슬쩍 폰으로 검색을 해본다. 이 근처에 편의점이...5km? 뛰어갔다 오면 얼추 15분 안에 될 것 같긴 한데 날씨가 저래서야...일단 편의점에 다녀오는 방법은 아쉽지만 폐기해야겠다. 맑은 날이라면 모를까 이런 날에 나가면 몸이 젖으니까 들켜버리잖아.

그나저나 지금 사람들은 뭘 하고 있을까. 지배인 하는 거 보면 정말 사람 모아서 추리쇼라도 펼치고 있지 않을까.

아, 나도 구경하고 싶다. 죽지도 않은 사람 놓고 어떤 얼토당토않은 추리를 하는지 보고 싶은데.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는 게 슬프다.

으, 오줌마려. 화장실만 조용히 이용하고 나오자. 설마 물 내리는 소리가 옆방까지 들리겠어? 어제 옆방 커플이 거사를 치루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내가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조용히 화장실 문을 닫고 들어가 볼일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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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23분경, 시체가 송다정양과 하성진씨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저희 호텔의 투숙객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불러 모으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다 모일 필요가 있나요?”

“알리바이 확인과 증거인멸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호텔의 식당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엄숙한 분위기에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살인 사건이라니, 이 황금 같은 휴가에 내린 폭우만큼이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몇몇은 이 사람들 사이에 살인자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누군가는 이 사실에 호기심을, 누군가는 그저 슬픈 얼굴로 허벅지를 전력으로 꼬집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한분씩 오전에 무엇을 했는지 말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최초 발견자인 송다정양부터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피해자의 옆방에서 투숙 중이던, 연애 3주년 기념 바캉스를 온 송다정은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 그게...제가 제 방인 줄 알고 문을 열었는데 문이 열려있어서...그런데...거기에...”

“바닷가에 산책을 난갔다가 방을 착각해서 문을 열었는데 침대위에 있던 이유진양의 목을 발견했다...는 거로군요.”

지배인은 마치 탐정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곤 생각에 잠겼다. 범인은 누구일까. 자신의 호텔 안에서 일어나 살인사건에 마음이 심란했지만, 동시에 약간의 기쁨도 섞여 있었다. 그는 추리소설을 아주 좋아하는 마니아였고, 일부러 이런 곳에 호텔을 만든 것도 추리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살인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지배인은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추리소설을 떠올리며, 증언을 기억했다. 이런 사소한 증언이 나중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럼 그 다음 목격자인 하성진씨의 알리바이를 말씀해 주십시오.”

“어, 저요? 저는 다정이랑 같이 바다에 산책 갔다가 방에 돌아왔는데 소리가 들려서 가보니 시체가 있었어요.”

“그렇군요. 혹시 바다에서 두 커플을 보신 분이 계십니까?”

“닭살커플이라 기억하고 있쥬.”

“아, 저도 본 기억이 있어요. 파라솔 밑에 돗자리 깔고 앉아 계셧었죠?”

“아 그렇쥬. 이 나이에 바닷가에서 뛰어놀기엔 힘이 부쳐서...”

남편과 같이 여행을 온 김영혜(45)씨의 대답이었다. 이어진 증언에 의하면, 김영혜씨는 바다에서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중 바다를 산책하는 두 사람을 본 기억이 있다고. 알리바이에 거짓말이 섞여 있지 않는 것 같군.

지배인은 나머지 6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유진양과 일행인 김한솔과 장유라는 유력한 용의자였다. 어쨌든 살인사건엔 동기가 필요한 법이었고, 두 사람 외엔 지인이 없었던 이유진양을 죽일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을만한 사람은 저 둘 뿐이었지만. 지배인은 아직도 필사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유라를 토닥여 주고 있는 김한솔을 쳐다보다, 유라에게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저 둘 중에 정말 범인이 있을까? 김한솔은 어쨌든, 장유라는 도저히 사람 목을 자를만한 힘이 있어보이질 않았다. 추리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사람 몸을 토막 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영화나 만화처럼 쉽게 잘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추리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실이었다. 당장 자르기 좋게 가공된 고기조차 조금만 두꺼워도 자르기 힘든 게 사람이지 않은가.

저런 가느다란 팔을 가진 꼬마가 사람을 죽였을 리가 없지. 지배인은 자연스럽게 유라를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김한솔을 유력한 용의자로 점찍었다. 이상하게도 친구가 죽었는데도 묘하게 침착했으니까. 분명 침통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으니까.

지배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조금씩 의심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김한솔양. 오늘 오전에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 그러니까, 아침에 유진이랑 같이 밥 먹으려고 했는데, 일어나질 않아서 유라랑 둘이서 라운지에서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있었어요.”

“라운지에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까?”

“음식을 나르던 웨이터가 있었으니까 그분한테 물어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나중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럼 김미영 씨. 오전에 무엇을 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거운 분위기에 긴장했는지, 곱슬거리는 머리에 안경을 쓴 수상해 보이는 인상의 남성이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오전에는 방안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은 있습니까?”

“어, 없습니다.”

없다. 라, 사실 지배인은 이 김미영­이름 때문에 의심하는 게 아니다­이라는 이름의 투숙객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혼자서 이 호텔에 온 것도 그렇고, 피해자였던 이유진양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두어 번 있었다.

사실 저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라면 관심을 가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쳐다본 것과 휴대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는 것도 그렇고, 어둠침침한 분위기도 그렇고 정말 수상한 남성이었다.

마음 같아선 휴대폰을 빼앗아서 확인해보고 싶지만, 지배인은 그게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선을 넘지는 말자. 지배인은 그저 지배인일 뿐이었다. 탐정도 경찰도 아닌.

그 외 몇 명의 알리바이를 들은 지배인은 내용을 정리하며, 머릿속에 결론을 떠올렸다.

알리바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 없다고...?

김미영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서로가 본 적이 있었다. 즉, 모두가 알리바이를 서로 증명한 것이다. 하나라도 빈틈이 있을 거라 생각한 지배인은 방향을 바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대해 파보기로 했다.

살인 사건은 언제 벌어졌을까. 일반적으로 사후경직이 일어나는 것은 최소 한 시간이고, 피가 마르지 않은 것을 보면 죽은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을 거라고 지배인은 추리해냈다. 못해도 두세 시간. 아침 8~9시 사이쯤 될까.

“아니, 그런데 이렇게 모아서 물어보는 게 의미가 있어요? 그냥 거짓말 하면 그만인데.”

“아까도 말했듯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습니다. 범인이 증거인멸을 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할 수도 있습니다. 범인은 사람의 목을 잘라 침대위에 올려놓을 정도로 대담합니다. 아직 흉기조차 발견되지 않은 만큼 범인이 흉기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 이렇게 모여 있는 게 안전하겠죠.”

하성진은 지배인의 대답에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불편한 상황으로 돌아왔다. 지배인은 잠시 침음을 흘리고는 박수를 치며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일단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불침번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2인 1조로 조를 짜서 하도록 하죠. 아, 장유라양은 빼도 됩니다.”

초등학생한테, 심지어 피해자의 동생에게 이런 일을 맡기는 것은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기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2시간 단위로 불침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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