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114.화려한 휴가(2)
* * *
“갑자기 휴가라니, 물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심신이 피폐해져서 쉬러 간다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
한솔이야 백화점 붕괴 사건에 휘말렸다는게 워낙 잘 알려져 있어서 심신요양 목적으로 다녀온다고 하면 모두 납득할거고, 당장 난 코로나에 걸려서 치료 받고 있었다는 식으로 납득시켰으니 휴가 다녀온다는 말에 시청자들도 납득하지 않을까?
뭐, 지들이 납득 안하면 어쩔 건데! 아 몰랑, 나는 내 건강한 방송생활을 위해서라도 이 무계획적인 휴가를 보내야겠어! 시청자 수가 줄어도 상관없어!
내게는 2억 원이 있다!
물론 시청자 수가 줄어들면 좀 뼈아프겠지만, 요즘 피곤한 일이 많아서 일주일 정도 쉬고 싶었다. 몸이야 쌩쌩하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 너무 많아. 파파라치들이라던 지, 앞뒤 안재고 달려드는 정신 나간 렉카들이라든지.
시발 놈의 렉카 새끼들. 평소에도 뭐 이슈 생기면 뇌피셜 전개해서 좆같이 구는 게 어이가 없었는데 내가 직접 당해보니까 이마에 직접 지건을 날려버리고 싶네? 내가 그 딴 놈들한테 돈 뜯기는 게 싫어서 참고 있지만, 인기척 없는 곳에서 마주치기만 해봐라.
진짜 먹이터에 버려두고 올라니까.
내가 혼자 사는 독고다이도 아니고, 이젠 내가 돌봐 줘야할 식구들이 많으니까.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거다. 에포나도, 유라도, 세연이도. 조금...애매하지만 한솔이도...일단 식구 취급 해주자. 내 피 받아먹고 사니까.
내가 사라지면 누가 밥을 해주는데? 뭔가 뉘앙스가 이상하지만, 이 멤버 중에 요리 가능한건 나밖에 없다고! 내가 바위 타입 관장도 아니고 뭔가 슬프지만, 맛있게 먹어줬으면 그걸로 됐어...애초에 저 라인업에 내가 요리를 시키는 입장이 되면 완폐녀 같잖아...
“준비 됐지?”
“근데 어디로 가는 거에요?”
“머나먼 시공, 저 너머로!”
“?”
어...음. 이 명대사를 모르다니, 이게 세대차이란 건가. 나랑 6살밖에 차이 안나는 데 이걸 모를 줄은 몰랐다. 괜히 뻘쭘해지네. 라떼는 그거 모르면 간첩이었는데. 내 나이에 삑사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거야. 장난감들이 모험을 떠나는 장면에서 모두 도키도키하면서 집중했을 거라는 거 내가 다 안다고!
“농담이고, 속초 쪽에 괜찮은 호텔이 하나 있다더라고, 거기에 한번 가볼 생각이야. 가격도 적당하고, 일단 사진 보니까 방도 괜찮아 보이고. 전망도 괜찮으니 일주일 정도 호텔이랑 바다에서 뒹굴거리다 보면 힐링도 되고, 추억도 쌓고 뭐 그런 거지.”
원래 나이 먹으면 놀러나가기 힘들어져서 여행 하나하나가 귀중한 법이다. 나는 내 옆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가 사온 캐리어를 트렁크에 집어넣고 있는 유라를 쳐다보았다. 내 휴가긴 하지만, 태어나서 살던 곳을 벗어나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유라를 위해서 큰 마음 먹고 멀리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기도 했다.
불쌍하잖아. 원래 어릴 때 여행가는 것 만큼 추억 만들기 좋은 게 없는데. 태어나서 아직 바다를 눈으로 본적이 없다는 말에 내 감수성이 터져버려서...이 시대에 바다 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자연스럽게 행선지는 바다로 정해져 버린 것이다.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는 이유는 말 안해도 다 알지? 이놈의 분리형 뚝배기는 도움이 안돼요.
“근데 차는 어디서 구하셨어요? 아니 그전에 운전할 줄 아세요?”
“...운전면허는 있어.”
차야 당연히 렌탈했지. 요즘 렌탈 서비스가 정말 편하더라. 어플로 몇 번 누르니까 금방 오더라고. 큰맘 먹고 차를 렌탈했다. 나중에 한 대 뽑아야지. 고급외제차 같은 건 모르겠고, 적당히 끌고 다닐만한 걸로.
“...제가 운전할게요.”
아 왜, 내가 장롱면허긴 해도 면허시험에서 90점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 인간한테 운전을 맡기면 고속도로에서 접촉사고가 나서 고생하게 될 것 같다는 시선은 뭔데! 너 시험점수 몇 점이야! 시험 점수 딱 대!
[현명한 아해로다.]
아니 여신님? 여신님이 그러시면 제가 정말 슬퍼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데요?
[흠흠, 내가 실수를 했도다...]
“언니! 다 넣었어요!”
“그럼 출발할까?”
나는 마지막으로 혹시 빼먹은 게 없는지 짐을 체크했다. 옷은 다 챙겨왔고, 수영복은 딱히 입을 생각 없고, 집구석에 박혀있던 튜브랑 그 외 에포나를 위한 당근 한 상자정도면 충분하겠지?
세상 참 좋아졌단 말이야, 반려동물 반입 가능한 호텔도 있고. 가격이 좀 비싼 호텔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 호텔을 추천 해준 게 마리아여서, 조금 찝찝하기는 했다.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건 확실한데 그게 뭔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으니까. 여신님은 그게 누군지 대충 짐작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본인이 알려줄 때까지 말하지 않겠다 하셧고.
마리아가 소개해준 호텔이라, 뭔가 이상한 게 숨어있진 않겠지? 원래 이럴 때 묵은 호텔에서 밀실 살인사건이 일어나거나 귀신이 나온다거나 해변에서 사람을 만났는데 나중에 보니 발자국이 없었다든가 사실 손님을 납치해 요리재료로 쓰는 곳이라든가 그런 오컬트 스팟 같은 곳은 아니겠...지?
씁 한밤중에 X튜브를 너무 많이 봤나. 심심하다고 괴담 영상을 몇 개 봤더니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져 버렸네. 설마 그런 곳이 이 세상에 있을라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게 그런 평범한 곳에 있을 리가 없다.
시기가 시기라 예약자 수는 적다고 하지만.
나는 조금 찝찝함을 숨긴 채로, 4명+1마리 5인파티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오, 높네. 한 10층은 되나?”
호텔은 인터넷에서 찾아본 것 보다는 깔끔한 외관이 돋보였다. 외벽을 새로 칠한 건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하얀색으로 덧칠된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적당히 화려한 장식이 붙어있으니 그럭저럭 고급진 분위기가 있어서, 돈 값을 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언니가 지인한테 추천받은 곳이라 길래 걱정했는데, 아방가르드한 건물 디자인과 새하얀 건물이 인상적인 호텔이라 안심했어요!”
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주차장은 야외 주차장과 지하 주차장으로 나뉘어 있어서, 짦은 이야기 끝에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기로 했다. 이유는 이 더럽게 더운 날씨에 조금이라도 햇볕을 쐬면 피부가 익어버릴 것 같아서.
니들 피부 신경 엄청 쓰는 구나. 난 이 몸 되고 나서 선크림도 귀찮아가지고 대충 바르고 다녔는데. 나는 억지로 내 팔과 얼굴에 발라지는 크림의 감촉을 느끼며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바를 줄 알거든? 내가 미쳐 날뛰는 미취학 아동이라도 되는 줄 알아?
[여자에게 피부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느니라.]
어차피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게다가 이 피부 뭐 겉 표면에 사이오닉 실드라도 쳐져있는건지 바깥 기온이 30도를 넘어도 살이 타기는커녕 여전히 새하얗던데요? 이 피부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길래 호랑이 가죽 마냥 질기고 튼튼한 거야?
“그런데 인기척이 좀 없네요.”
한솔이가 꺼낸 말에 나는 지하 주차장을 쭉 둘러보았다. 정말이네. 지하 주차장에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보이는 것만 7대정도. 야외 주차장에도 비슷하게 있었으니까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지금이 코로나 4단계로 격상했기도 하고, 여기가 좀 외진 곳에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호텔이 사람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요?”
“뭐, 숨겨진 명소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아 이젠 선택지 없다고. 이제 와서 ‘아 뭔가 좀 아닌것 같네요. ㅎㅎ...ㅋㅋ...ㅈㅅ;;’하고 튈 수는 없잖아.
결국 약간의 실랑이 끝에 한솔이는 내 의견에 동의하는 쪽으로 의견을 굽혔다. 뭐 한솔이 입장에서야 좀 불안하기는 하겠지만 유사시엔 에포나랑 내가 있으니까, 위험상황이 닥쳐도 구해주리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난 흑마탄 듀라한이지 백마탄 왕자님이 아닌데.
나와 한솔이와 유라, 그리고 에포나와 세연이는 차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나와 카운터로 곧장 걸었다. 확실히 사람이 없기는 없는지, 카운터 앞은 한산했다. 근처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고.
“여기 몇 시간 전에 예약한 이유진 외 3명+애완동물 한 마리인데요, 체크인 해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손님.”
카운터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은 내 말을 듣더니 잠시 명부를 뒤져 내 이름을 찾아내고는, 나에게 명부와 함께 볼펜을 내밀었다.
“여기에 싸인하시면 됩니다.”
싸인을 하고 명부를 다시 돌려주자 직원은 잠시 카운터 뒤쪽을 뒤적거리더니, 키를 나에게 건넸다.
“즐거운 휴가 되십시오.”
직원의 깍뜻한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5층에 있는 예약한 방으로 향했다.
이 호텔에서 지낸지 벌써 3일이 흘렀다. 유라는 피부가 다 타서 몰라볼 정도가 되어 있었다. 선크림 바르고 논 거 맞지? 그에 반해 나는 아직도 새하얀 피부를 자랑했지만, 어쨌든. 3일동안 이 호텔에서 지내면서 몇가지 의문이 생겼다.
첫째, 우리 이후로 들어온 손님이 단 하나도 없다는 점.
둘째, 요 앞에 있는 바다에 우리들 말곤 아무도 보이지 않을때가 많다는 점,
세 번째, 호텔 지배인이 뭔가 음침한 인상을 가직 있다는 점.
음. 뭔가 수상해. 아무튼 수상해. 결코 나 빼고 호텔 라운지에서 간식을 먹으러 간 유라와 한솔이가 괘씸해서 그런게 아니다. 날씨가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번개가 쳐서 그런 것도 아니고. 아무튼 아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무심코 피를 흘려버린 시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못해도 100ml정도는 흘린 것 같은데. 이정도면 과다출혈 수준 아닌가?
이거 어떡하지? 갑자기 생리가 터졌다고 말하고 바꿔달라고 하면 되나? 으, 정신이 어질어질하네. 살다살다 생리 핑계를 대야할 날이 올 줄이야.
나는 잠꼬대를 하느라 떨어져 버린 머리를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다니까, 정말...”
낯선 목소린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아, 옆방에 묵고 있던 커플이었던 것 같은데. 대충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뭐 1주년 기념 호캉스라던가 그런 것 같았다. 밤중에 은근히 들려오는 야릇한 신음에 좀 민망하더라.
근데 그 사람 목소리가 왜 내방에서 들려와? 나는 함부로 머리를 움직일 수 없어 상황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인생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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