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75.주인님 그거하자 낑낑(1)
* * *
“낑낑...”
“뭐야...”
답답해...
내 가슴팍에 묵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머리 올려놨나? 뒤통수에 베개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걸 보니 아닌 것 같은데. 올라타 있는 것 같았다. 뭔데. 내가 이 몸으로 가위 눌렸을 것 같지도 않고...나는 계속해서 수면부족을 호소하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주인님 그거하자 낑낑...”
웬 소형견 사이즈의 마스코트 같이 생긴 검은색 망아지가 내 가슴 위에 올라탄 채로 낑낑 거리고 있었다. 이 미친 망아지는 또 뭐야?
망아지가 올라타 있는 상황 자체가 비상식적이지만, 이제 와서 이런 사소한 사건 정도로 놀랄 짬은 아니다. 처녀귀신도 만났고, 저승사자도 만났고, 흡혈귀도 알고, 난쟁이도 아는데 이제 와서 말하는 망아지 하나 추가 된다고 놀라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
이젠 갑자기 창밖에 마법소녀가 나타나서 “우리 같이 마법소녀가 되어서 세상을 구해 봐요!”하고 마법소녀 전직 권유를 해도 놀라지 않을 거다. 당연히 거절하겠지만. 내가 이 나이에 마법소녀가 돼서 세상을 구하리? 나는 그냥 소시민 1로 살거야.
애초에 듀라한 마법소녀라니,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모조리 박살내놓는 마법소녀는 좀...
“넌 누구야?”
“난 주인님의 말이야!”
그게 뭔데?
좀 알아듣게 말 좀 해라 이 망아지야. 나는 망아지의 뒷목 잡고 들어 올려 옆에 내려놓고, 머리카락 스무 가닥을 목에 묶어 머리를 고정시켰다. 옆에 던져둔 폰을 보니 아침 5시 반. 평소보다 두세 시간은 일찍 일어났다.
넌 내가 직장 그만둔 걸 감사하게 여겨라. 회사 다니는데 이 시간에 깨웠으면 얼굴 보자마자 주먹부터 날아갔어.
“낑낑...주인님 그거 하러 가자!”
“그게 뭔데?”
“당연히 달리기지! 나를 타고 달려줘!”
그래...말이니까 누구 태우고 달리고 싶은 건 그렇다 치자고.
“넌 뭔데?”
“나는 주인님의 애마야!”
애마? 내가 아는 애마는 애마부...나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아직 아침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시간에 강제로 깨워진 참이라, 머릿속이 멍했다. 어쨌든 난 이런 망아지를 부하로 둔 기억이 없는데. 또 이상한 군식구가 생기는 건가.
안 그래도 내 집이 요 층 주민들 아지트로 쓰이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젠 이상한 망아지까지 추가된다고? 인외들만 추가되는 줄 알았더니 이젠 축생까지 내 방에 머무를 모양이다. 내가 보모도 아니고. 난 유라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고.
수다스러운 식구는 한명으로 족해.
“그거하자 낑낑!”
뭔진 모르겠는데 묘하게 기분 나쁘네. 저 대사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아니 뭘 하자는 거야? 애마는 뭐고?”
“주인님은 애마를 몰라? 애마는 애마야!”
이년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나를 바보 취급 하는 목소리에 짜증이 치솟는다. 이 주옥같은 망아지는 왜 새벽 댓바람부터 속을 긁어대지?
이게 무슨 속 터지는 상황인데? 그거 물어봤겠어? 왜 내 애마를 자칭 하냐는 거지! 내 애마는 폰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다고! 두 달 동안 긁어모은 재화로 말딸 하나 뽑으려다 폭사했는데 현실로 튀어 나온 거냐?
이 망할 망아지하고는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유라를 불러서 맡기는 게 방법일지도 모른다. 유라의 무호흡 토크를 몇 시간 동안 들으면 제 아무리 정신 나간 망아지라도 제정신으로 돌아올 테니까.
“주인님! 나가는 거야?”
“아니, 화장실. 그리고 난 네 주인님 아니야.”
“아니야!! 주인님은 주인님이야!!!”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이 망아지 비슷하게 생긴 짐승은 기본 에티켓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떽떽거리는 거 한 대 쥐어박고 싶네. 아니 쥐어박을까?
“주인님은...주인님인데...”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해봐. 다른 사람들 다 깨겠다.”
후, 내가 참자. 하는 짓 보면 애기 같은데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좀 마음에 걸렸다.
나는 냉장고에서 며칠 전에 냉장고 구석에 박아놓은 당근을 꺼냈다. 이거라도 물리면 좀 조용해지지 않을까. 나는 당근을 물에 씻어서 망아지의 입에 물려주었다. 역시 망아지라 그런지 당근을 주니 희희낙락하며 당근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금방 먹는구만.
나는 망아지를 지켜보다, 생수가 담긴 페트병을 꺼내 물을 마셧다.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집에서 물 마실 때 그렇게 마시지 말라고 등짝 스매싱을 당하곤 했는데.
근데 이게 제일 편한 걸 어떡해요 어머니.
“자, 우리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이야기 해보자.”
“네, 주인님!”
“내가 왜 네 주인이야? 그것부터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주종페티시 같은 거 없다. 그런 거 보고 싶으면 BDSM클럽이라도 찾아서 가보던가. 물론 이 시국에 가면 코로나 당첨 되서 멍청한 놈 소리 듣기 딱 좋겠지만.
“주인님은 주인님...”
“아니 내가 왜 주인님인지 설명해 보라니까? 내가 오늘 너를 처음보거든?”
내가 술 처먹고 나도 모르게 집에 들여온 것도 아니고. 어제도 분명히 멀쩡히 방송을 하고 잤는데...세연이는 어디 갔지? 가끔 산책을 나가니까 새벽 산책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소란이 벌어졌으면 가장 먼저 나를 깨웠을 테니까.
“주인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듀라한님이니까, 내 주인님이야!”
“듀라한?”
음...확실히 듀라한의 전승에 목 잘린 말 같은걸 타고 다닌 다는 전승이 있었다고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애가 그 말이라고? 타기는커녕 나를 타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즈인데? 판타지의 산물이니까 아마 크기 조절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제 대충 보기만 해도 견적이 잡힌다. 대충 이 마스코트같이 생긴 망아지가 듀라한이 타고 다니는 말이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거지?
“저는 주인님을 태우기 위해 태어났어요!”
나는 딱히 뭘 타고 싶지 않은데. 말 타는데도 면허 필요한 거 아니야?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말을 타고 다닐 수도 없고. 게다가 나는 탈것이랑 별로 친하지가 않다. 나갈 일도 별로 없는데...흠.
“여기는 어떻게 찾아왔니?”
“주인님이 있는 곳은 어디라도 알 수 있어요!”
“아...그래...”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대답 감사하다. 이 망아지야.
그러니까 뭐 자체 추적기능이 달린 탈것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 건가? 내가 집밖에 나갈 일이 거의 없는데 타지도 못할 말이 하나 생겨봐야 의미가 없는데. 근데 말은 애완동물로 키울 수 있는 건가?
말은 어릴 때 제주도 목장에서 본 것 빼곤 제대로 본적이 없으니까 잘 모르겠네. 근데 말은 초원에 풀어놓고 키우니까 여기서 키우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주인님은 내가 싫어?”
망아지가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린애 괴롭히는 것 같아서 좀 마음 한 구석에 박혀있든 죄책감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약간 자기 키워달라고 떼쓰는 아기고양이 같은 느낌인데, 말을 하니까 더 꺼림칙했다.
“아니, 그거는 아닌데...”
내 군식구가 늘어날 것 같은 예감에 슬펐을 뿐이야...십중팔구 이 녀석도 뭔가 트러블을 몰고 올게 뻔 하니까. 듀라한 되고 나서 새로 만난 사람들이 다 그렇더라. 그냥 평범하게 만나면 안 돼? 난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살고 싶다고.
언제나 트러블에 시달리는 황야의 무법자 같은 인생이 아니라!
“주인님! 어서 나가자! 그리고 같이 달리자!”
“요즘 세상은 말 타고 돌아다니는 걸 범죄 취급하거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말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은 적이 없고. 시골이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길거리에서 말 타고 돌아다니는 미친놈은 본적이 없다.
“말도 안 돼! 그럼 사람들은 뭘 타고 다니는데?”
“자동차랑...오토바이랑...비행기랑...여튼 이젠 말을 타지 않아도 탈게 많거든.”
“그럼 나도 변하면 되는 거지?”
“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아동용 애니메이션에서나 볼법한 연출 같은 연막이 내 시야를 잠시 가렸다. 그리고 연막이 걷혔을 때, 망아지는 사라지고 대신 다른 물건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주인님! 어서 탑승을!”
“왜 세발자전거로 변신하는 건데! 말은 또 어떻게 하는 거야?”
세발자전거 주제에 X스트 라이더 마냥 바퀴에서 푸른색 불꽃 피어오르지 말라고! 그 플라스틱 재질에 푸른 불꽃이 붙으니까 느낌이 진짜 이상하네. 핑크핑크한 몸체에 푸른 불꽃이라는 괴상한 조합을 보니 이 망아지는 미적 감각이 괴상한 모양이었다. 하다못해 바퀴랑 어울리는 색깔로 색 좀 맞추던가.
내가 눈깔로 RGB 한 자릿수 차이를 구분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저 정도로 색 배치가 괴상하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어? 하지만 저기 밖에서 돌아다니던 사람도 이거 타고 다녔는데?”
“잘 생각해봐. 그거 타고 다니는 애가 몇 살로 보였냐?”
“어...나보다 컸어!”
그래 너보단 크겠지. 소형견 사이즈면 갓난아기가 아닌 이상에야 일단 너보다는 클 테니까...
“그럼 다른 걸로!”
내 트라우마 센서가 경종을 울렸다. 이 망아지, 뭔가 집에서 변신해서는 안될 걸로 변신할지도 몰라!
“변신 멈춰!”
“왜?”
“너 지금 어떤 걸로 변하려고 했어?”
지금 진짜 불안하거든? PTSD가 신경줄을 타고 온몸에 흐르려고 하고 있는데 뭔지 몰라도 정말 위험하단 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마차 같은 거? 막 물건들 엄청나게 싣고 다니는 말 없는 마차였어!”
“...그거로는 절대 변신 하면 안 돼. 알았어?”
“알았어. 주인님...”
망아지는 세발자전거에서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쳐다보지 마. 방금 넌 내 집을 박살낼 뻔했어. 알아?
집안에서 트럭으로 변신하면 빌라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 망아지를 어떻게 한다...
일단 나는 회의를 소집하기로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