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68.피는 영어로 BLOOD(1)
* * *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낯선 천장이다...”
여긴...병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 였는데...
“일어났다! 언니이이이이!”
유라야, 너가 여기 왜 있어? 아, 유라가 날 간호해 준 걸까. 나는 머리를 들어 다리 위에 놓고 침대머리판에 기대어 앉았다. 진짜 병실 맞네. 묘하게 고급스러운 것을 보니 1인실인 모양이었다.
...1인실이면 비싸지 않나? 일어나자마자 돈 걱정이라니, 어처구니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돈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거의 없었다. 자본주의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이 대부분 그렇지만.
예상외의 지출만큼 무서운 것도 없고.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 병원이지? 머리를 돌려 창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자리를 보아도 바깥이 보이는 창 대신 불투명한 창이 보일 뿐이었다.
이건 병실이라기보단 격리실에 가까운 것 같은데. 유라가 들어와 있는 걸보면 딱히 격리당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유라야,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언니 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지셔서 걱정돼서 와봤더니 변기통에 머리가 빠진 채로 기절해 있으셧어요! 주변이 온통 피칠갑해서 정말 죽은 줄 알았어요! 저는 수습하려고 했는데 세연이 언니가 접근 하지 말라고 해서 지켜만 보고 있다가 기밀관리본부에 연락해서...직원들이 와서 여기로 데려왔어요! 그, 방송은 제가 사정 설명하고 껐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기절한동안 한바탕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하긴 핏물을 아주 쏟아 내면서 기절했으니 난리가 안나는 게 이상하지. 근데 그거 다 치우려면 고생할 것 같은데. 세연이가 치웠으려나. 1리터는 넘게 토했던 것 같은데, 살아 있는 걸 보면 내 몸도 어지간히 판타지스러운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딘데?”
“기밀관리본부 내부에 있는 변이자용 병실이예요. 변이자들만의 특이한 증상이 생기거나 병이 발병했을 때 이곳으로 호송해서 치료한다고 라쿤 박사님이 그러셧어요!”
이런 곳도 있었구나. 더럽게 넒어 보이더니 별의별 시설이 다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일반 병원이었으면 벌써 난리가 났을 테니까.
으, 목말라. 몸에서 수분을 너무 많이 토해 내서 그런가, 갈증이 심했다.
“유라야, 혹시 물 있어? 목이 말라서 말이야...”
“네, 잠시만요!”
유라가 물을 뜨러 밖으로 나가자, 나는 침대 밑으로 머리카락을 잡고 바닥에 머리를 대고선 침대 밑 어두운 공간을 살펴보았다.
“거기서 뭐 해?”
“...어...그. 그러니까...미안 해...”
세연이는 침대 밑에서 조심스럽게 튀어나오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침대 옆 간병인용 의자에 앉았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걸 보니 내 상태가 심각하긴 했나 보다. 아직도 좀 괘씸하긴 한데, 세연이도 많이 반성하는 것 같으니까 꿀밤 한 대로 끝낼까.
생각을 했으면 바로 실행해야지! 나는 망설임 없이 세연이의 이마에 꿀밤을 날렸다. 내가 한때 손이 아주 맵기로 유명했거든? 햣하, 내 꿀밤을 맞아라!
“아얏!”
“그걸로 봐줄게.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땐 소금으로 샤워하게 될 줄 알아.”
“아, 알았어!”
군기가 바짝 든 모습 아주 좋아. 근데 유라는 왜 이렇게 안 오지?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눈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거구를 자랑하는...곰?
“왜 그러나?”
“라쿤은 그렇다 치고, 이젠 곰까지...”
“곰이 말하는 건 처음 보나?”
당연히 처음 보죠! 의사가운 걸친 이족 보행 곰이라니 누가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장에라도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이족보행 곰의 위압감은 내가 그럴 말을 꺼낼 용기조차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걸을 때마다 쿵쿵 울리는 거 실화냐. 실수로 팔 한번 휘두르면 사람 하나 저승으로 산지직송 해 버릴 것 같은데?
나 이유진, 약자에게 강하지만 강자에겐 약하다. 그런고로 나는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곰닥터에게 성실하게 협조하기로 했다. 개겼다가 곰발바닥 맞고 이/유/진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이유진양. 이유진양의 몸 상태는 아주 심각하네.”
“네?”
나 죽을병에라도 걸린 걸까.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피를 그렇게 많이 토해 낼 리가 없었다. 대충 피가 아주 입에서 쏟아졌던데, 그 정도면 온몸의 피를 다 쏟아 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나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몸뚱어리가 판타지 그자체니 뭔가 초현실적인 무언가가 작용했다고 생각하면 되나.
“이유진양의 현재 상태는...”
꿀꺽. 마른침을 삼킨다. 목이 아파. 드라마에서 의사들이 뜸을 들이는 게 정말 답답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당사자가 되니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정말로 죽을병에 걸린 거라면 어쩌지?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해?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친다. 나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의사를 쳐다보았다. 의사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그 커다란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정상일세.”
“네?”
“지나치게 멀쩡하다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군.”
“...머, 멀쩡?”
근데 왜 쓸데없이분위기를 잡는데...요! 걱정해서 손해 봤네! 의사가 환자를 속여먹어도 되는 거야? 이거 항의해도 되는 거지? 그렇지?
“피를 그만큼이나 토했는데 어떻게 사람이 멀쩡할 수 있겠는가? 내가 수많은 변이자들을 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일세.”
아 그러십니까. 근데 병원 검사에서 멀쩡하게 나왔으면 아무런 문제 없다는 뜻 아니야? 피를 토한 건 뭐...윗입으로 생리했다고 치면 되지 않을까. 나 이 몸으로 생리 한 번도 안했으니까...근데 생리를 아예 안하면 내 몸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인가? 남자랑 섹스할 생각은 1도 없는데 궁금하긴 했다.
이 몸뚱어리는 갈수록 의문만 늘어난다. 이미 인간에서 한참 떨어진 육체인건 알겠는데, 동강동강열매라도 먹은 것처럼 몸이분리된다고 해도 이젠 납득할 것 같았다. 이거 완전 사지절단 읍읍...나는 그런 고상한 취미따위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사지절단 당해도 머리통 하나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기는 하네...
“그럼 바로 퇴원해도 되요?”
“안 되네. 자네 몸이 검사 결과상으로는 멀쩡하다고 하지만 그건 그저 현재 의료기술로 진단이 힘든 것일 수도 있다네. 변이자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신체 구조가 아예 다른 경우도 존재하니 말일세. 라쿤 박사가 자네를 위해서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었으니 일주일 정도는 쉬고 가는 것을 추천하네. 겸사겸사 라쿤 박사와 함께 테스트도 한번 받아보게.”
일주일이면 도네로 100만원 정도는 손해인데...그렇다고 바로 퇴원한다고 고집부리는 것도 문제였다. 실제로 피를 그만큼 토해 냈는데 몸이 멀쩡할 리가 없잖아.
결국 꼼짝없이 일주일은 입원해 있어야지. 어차피 바로 돌아오면 그건 그것대로 난리가 날게 뻔했다. 각혈해서 병원에 실려간 스트리머가 하루 만에 복귀?
시청자들이 당장 방송 끄라고 채팅을 도배할게 뻔했다. 딴것도 아니고 피를 토하는데 방송이 문제냐! 라면서.
“그럼 푹 쉬고 있게. 곧 라쿤 박사가 자네를 만나러 올걸세.”
곰 닥터는 그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나와 세연이만이 남은 병실에 적막이 찾아왔다.
“이쯤 되면, 말하는 침팬지가 나와서 반란을 일으켜도 그러려니 할 것 같아...”
“...정말 그럴지도 몰라...”
너도 그 영화 봤구나? 하긴 1편은 나온 지 엄청 오래되었던가. 2편도 재밌었지. 3편은 안 나오나.
“그럼 일주일 동안 뭘 하며 시간을 보낼까...”
“병상에서 쉬어야지. 돌아다니다가 쓰러지면 안 되니까!”
세연이는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이럴 때는 진짜 엄마 같다니까. 하지만 일주일 동안 누워만 있는 건 심심한 걸... 폰으로 게임이라도 할까. 대학생 때 가챠로 한 달 용돈 다 까먹고 나선 손도 안댔는데.
근데 내 폰은 집에 있나?
“혹시 내 폰 가져 왔어?”
“유라가 가져오지 않았을까?”
유라가 돌아오면 물어 봐야 할 것 같았다. 하긴 나를 신고한 것도 유라였으니 폰을 챙겨올 사람은 유라밖에 없긴 했다. 그나저나 애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정수기가 지상에 있기라도 하나.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손에 텀블러를 든 유라가 나타났다. 유라는 종종걸음으로 내게 걸어와 텀블러를 건넸다. 나는 단숨에 텀블러 안에 있는 물을 들이켰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지나가자 갈증이 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목이 엄청 마르셧나 보네요! 그런데 물 마실때는 입술부터 적셔가며 마시는 게 좋다고 SNS에 나와 있다고...”
“스톱.”
환자 앞에서 수다를 떨려 하는가! 밑도 끝도 없는 투 머치 토킹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단호하게 문장을 잘라 냈다.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지 마, 방금 네가 나를 수다지옥에 빠트리려고 했던 걸 깨닫지 못했니?
“유라야, 혹시 내 폰 가져 왔니?”
“앗, 여기요!”
유라가 작은 파우치에서 내 폰을 꺼내 내 머리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폰을 집어 들고 내 X게더에 접속했다. 일단 휴방공지를 때려야지.
그리고 밥이나 먹자.
환자고 뭐고 밥은 먹어야지!
환자식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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