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듀라한이 되어버렸다-64화 (64/352)

〈 64화 〉 62.너는 너무 말이 많아(3)

* * *

“유진 언니!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인데요, 알고계세요? 그러니까...”

“유진 언니! 제가 부천쪽에 살았을 때 겪었던 일인데요...제가 어렸을 때...”

“유진 언니! 그거 아세요? 레몬에는 레몬 한 개 분의 비타민이 들어있대요!”

으아악! 살려줘! 나는 수다지옥에 빠져 살고 싶지 않아!

유라는 정말, 매우, 많이, 존나게, 온갖 단어를 갔다 붙여도 모자랄 정도로 말이 많았다. 당장 대화의 물꼬를 틀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와 정신없는 화제 전환, 밑도 끝도 없는 잡지식을 늘어놓으며 듣기 시작하면 한시간이 넘게 이어지는 언어의 홍수에 휩쓸려 정신이 가출해 버리곤 했다.

세연이도 처음에는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끝나지 않은 수다에 기겁하며 방구석으로 도망쳐 귀를 틀어막고 떨기까지 했으니,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나는 세연이가 괘씸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믿도 끝도 없는 수다에 시달리고 있을 때 숨어서 x튜브나 보고 있었단 말이지...?

세연아, 나를 버리고 도망쳤으니 햄버거는 다시 한 개로 줄인다? 치사하게 눈에 안 보인다고 도망가? 꼬우면 너도 옆에서 나랑 같이 고통 받던가! 나 28짤 이유진! 내 앞에서 X루짓을 한 세연이에게 햄버거를 빼앗겠다! 꼬우면 처신 잘하라고.

치졸하다고 욕 하지마! 어? 내가 햄버거 개수까지 늘려주면서 부탁하기까지 했는데 네가 나를 버리고 도망가?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유명한 닌자 만화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동료를 버리는 놈은 제일 쓰레기라고!

나 이유진은 이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내가 적당히 이야기 하라고 타이르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내가 너무 마음이 약했다. 저 꼬마가 정말 웃는 얼굴로 신나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걸 거절하는것도 좀 그렇고. 내가 방송하느라 돌보지 못할 때 잠깐 얼굴을 보면 기운없는 표정으로 폰이나 만지작 거리고 있단 말이야.

애가 세상 외로운 것 같은 얼굴을 하다가 수다만 떨기 시작하면 웃는데 내가 악마새끼도 아니고 저걸 어떻게 수다좀 그만 떨라고 말해! 어른이고 뭐고 말하는 날부터 난 재활용 불가능한 쓰레기 듀라한이 되버린다고!

어차피 며칠 후면 옆 집의 대청소가 끝나고 입주하게 될테니까 아마 수다에 시달릴 일은 줄어들 거다. 지금이야 같은 집에 사니까 마주칠 때마다 밑도 끝도 없는 수다에 노출되는 거지, 집이 다르다면 비교적 밑도 끝도 없는 수다에 덜 노출될 거다.

최소한 지금만큼 평생 들을 이야기를 다 들은 것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나는 점점 복리로 쌓이는 짜증을 꾹꾹 눌러참으며 유라의 수다를 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하라고 하기엔 내 마음이 너무 약하기도 했고.

“세연아.”

“...?”

유라가 샤워하러 간 사이에, 나는 조용히 세연이를 불렀다. 구석에서 폰을 만지고 있던 세연이는 내가 부르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역시 햄버거 통제야. 성능 확실하네. 내가 부른 이유는 당연히 나를 버리고 튄 세연이에 대한 응징 때문이었다.

“유진님, 유진님. 오늘도 집요정 세연이는 하루 할 일을 다 끝마쳤사옵니다...”

평소라면 수고했다 하며 햄버거를 건네줬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를 버리고 도망친 대가를 치러야지.

“그래서 유라는 잘 돌봐줬니?”

“...저는 오늘 욕실 청소도 다 했고, 빨래도 했고, 설거지도 다했고, 방정리도 다했습니다...”

“그래서 유라는 잘 돌봐줬고?”

“...오늘 방송할때도 바람잡이 계속 해줬는데...”

...그런걸 하고 있었어? 오늘 게임 방송하는데 미션 걸어서 도네 유도한게 너였냐. 생각해보니까 그걸로 10만원 넘게 벌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괘씸한게 사라지진 않는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그래서 유라가 수다떨고 있을 때 같이 있어줬어?”

이제와서 불쌍한 척해도 소용없어! 자본주의의 신봉자로서 할 말은 해야겠다! 지금의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혁명전사가 되어 나를 배신한 세연이를 처벌하기 위해 마음을 먹은 것이다.

아, 저는 결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하이에크 만세! 케인스 만세! 자본주의여 영원하라! 나는 건물주 할끄니까!

“똑바로 서라 세연! 어째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냐!”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얼굴로 고개 숙이고 있어도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으니까 어서 실토하지 못할까! 덕분에 오늘도 나는 아침 두시간을 혼자 유라의 수다를 맞장구쳐주는데 사용했다고!

“하, 하지만 너무 말이 많단 말야! 나도 너무 힘들다고! 집안일도 해야하는데 끝까지 들어주기도 힘들단 말이야...”

“님 30분 듣고 탈주했잖아요. 그리고 너 어차피 집안일은 아침이나 새벽에 끝내잖아...”

내가 네 생활 루틴을 모를 것 같니? 나는 세연이를 째려보았다. 세연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지 시선을 피했다. 너도 찔리긴 한가 보구나. 그럼 애초에 도망가지를 말라고...차라리 옆에서 맞장구 치다가 적절하게 끊어 달라고...탈주하지 말고!

역시 예전부터 탈주에 일가견이 있다 싶더라니,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탈주한걸 나는 두눈으로 똑똑히 봤다. 어떠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러면서 나에게 햄버거를 요구하다니,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운적이 없어!

...이렇게 말해도 햄버거를 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탈주한 직후에 햄버거 개수를 줄여버린 것 뿐이다. 이렇게 말해도 내 마음씀씀이는 바다와 같이 넒어서 결국 햄버거를 하루에 두 개는 주곤 했다.

“너가 햄버거를 더 먹고 싶다면 나와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어. 협상 할거야 안할거야!”

“하.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유라 수다떠는거 옆에서 같이 들어줘!”

“아, 알았어...”

풀죽지마. 나는 벌써 3일째 듣고 있단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들은 걸 글로 쓰면 소설책 한권분량은 될거다. 게다가 재 수다를 듣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알아? 예전에 기밀관리본부에서 같이 귀가했을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는데, 애가 분위기만 긍정적이지 말하는 대사는 하나하나가 처참했다.

당장 어제만 해도 저녁을 만들기가 귀찮아 오랜만에 피자를 보고 “와! 저 피자 정말 오랜만에 먹어봐요! 생일에나 먹어볼 수 있는 음식이었는데!”라고 말해서 내가 개 접시에 4개나 덜어줬지. 성장기라 그런지 복스럽게 잘먹더라...안 그래도 작은애가 입에 피자를 볼이 미어터져라 집어넣는 모습을 보니까 햄스터 같아서 귀엽긴 했다.

정말, 가정사정이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라쿤박사가 괜히 나한테 임시로 맡긴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자세한 사정은 까먹은건지 아니면 말해주지 않은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수다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애가 정상이 아닌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신문지를 이용해 난방을 하는 팁이라던지, 하루에 라면으로만 세끼를 때웠다던지, 가끔씩 사람들이 찾아와서 맛없는 도시락을 건네준다던지, 난방비 아낄려고 겨울에도 집에서 옷을 두껍게 입고 지냈다던지...짠내가 나다못해 소금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가 더 수다를 끊지 못하는 거다. 나는 옛날부터 이런 이야기에 약했다. 그래서 세연이가 탈주해도 눈물나는 사연에 차마 크게 혼내지는 못했던 거고...세연이도 그걸 아니까 지금 정말 미안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고 있는거 아니겠어.

“그럼 이제 유라 수다 들어줘야돼? 나 방송할 때 못 들어주는거 알잖아. 나 혼자 들어주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알았어...”

나는 미리 대펴둔 햄버거를 세연이에게 건네주었다. 세연이는 조심스럽게 햄버거를 받아들고는 조용히 먹어치웠다. 삼시세끼 햄버거만 먹는데 물리지도 않나. 나였으면 햄버거를 쳐다보지도 않았을텐데.

“...그런데 걔는 그렇게 말 많이 하면 목 안아플까?”

“목이 아픈 것 보다 수다 떠는게 더 좋다는 거지...나는 좀 자제해줬으면 좋긴 한데. 그걸 말하기도 좀 그렇고.”

“나는 수다 떨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너 까지 짠내 풍기지 마라. 짠내나는건 한명으로 충분해. 뭐가 불만이야, 내가 합법적으로 이승에 남을 수 있게 지옥참마도도 입에 친히 넣어줬잖아. 맨날 폰 붙들고 잘 놀고 있으면서 나 외로워요 어필하면 내가 받아줄줄 알았니?

“야, 나랑 떨고 있는건 수다 아니냐?”

“...그런거야?”

내 주변엔 왜 이런 애들만 있는거지? 나처럼 상식적인 사람은 없는 건가? 하긴 처녀귀신하고 꼬마한테 그런 성숙한 마인드를 기대해서는 안되겠지...? 슬프게도 굴지의 상식인인 내가 더 고생해야 할 듯 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나오지? 평소라면 나올 시간 이미 다 된 것 같은데?”

“...유진아.”

“왜 불러?”

“혹시...듣고 있던거 아닐까?”

세연이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어차피 안들리는데 속삭일 필요야 있지 않을까 싶지만, 분위기라는게 있다. 원래 대화라는게 캐치볼을 주고 받는 거랑 비슷하니까, 약하게 던질 때는 약하게 받아주는거다.

“그건 좀...”

문 밖으로 귀를 기울이니,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내 감각이 소리친 것이다.

아아, 이것은 탈주란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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