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16.자라나라 머리머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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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보니 머리가 장발에서 단발이 되어 있었다.
뭐지? 꿈인가?
허리 까지 내려와서 머리 감을때마다 시간을 10분씩 잡아먹는 생머리가 왜 갑자기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이 되었지?
자는 사이에 누가 내 머리카락을 자른거야?
설마...나는 이 집에 얹혀사는 군식구인 처녀귀신을 노려보았다. 빨래를 개고 있던 이세연양은 내가 째려보자 움찔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도리도리. 귀신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기가 아니라고 어필했다. 하지만 이 집에서 가위질을 할 수 있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는 너 밖에 없는데? 내가 스스로 자르기라도 했단 소리야?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계속 쳐다보자, 우리 처녀귀신양은 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결백을 주장했다.
“너가 아니면 또 누가 있는데...? 머리카락이 지 스스로 짦아지기라도 한거야? 에일리언이야? 아니면 머리카락이 자아라도 가지고 있어?”
거울을 통해 확인해보니 누가 가위로 싹둑 자른것처럼 흉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단정해서 원래부터 단발머리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해야 하나.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내 몸뚱아리가 하와와 미소녀 여중생 듀라한으로 바뀌었는데 이제와서 머리카락 길이 바뀌는 정도야...이건 이것대로 꼴....아니 어울리는데.
머리카락 끝을 만져본다. 잔뜩 케어라도 받은것처럼 애기솜털 같은 감촉이 손 끝에 느껴진다. 보들보들한 강아지 털이라도 만지는 느낌에, 나는 아무 생각없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머리가 왜 짦아졌을까. 혹시 어제 샤워하다가 “머리카락 말리기 귀찮네, 확 잘라버릴까...”하고 투덜거렸기 때문일까?
“뭐, 놔두면 알아서 길어지겠지...”
알아서 짦아지기까지 했는데 다시 길어지는 정도야. 아마 자고 일어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설마 더 짦아지겠어?
폰으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침 10시. 늦었지만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먹고 씻고 폰좀 만지다보면 방송할 시간이로군. 방송하는게 워낙 오랜시간을 하다보니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 유일한 돈줄이다. 자낳괴라도 불러도 상관없다. 먹고 살려면 자낳괴가 되어야 하는걸. 돈 좋아! 세종대왕님 쪼아! 신사임당님도 쪼아!
나름대로 시청자 수도 순조롭게 늘어가고 있다. 이번 주에 처음으로 세자릿수를 넘어서면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또 신작 호러게임도 나왔으니까 방송을 날로 먹을 수 있어!
호러게임. 얼마나 날로먹기 좋은 장르인가.
O꾸르도 좋다. 3D도 좋다. VR도 좋다. ‘호러’만큼 게임 인방에서 방송하기 쉬운 장르가 없다. 호러게임이란게 자기가 하긴 무서워서 못하겠는데 해보고는 싶고. 그러다보니까 스트리머들이 하는 걸 찾아보면서 대리만족을 하게되거든.
게임 스트리머라면 한번은 꼭 해봐야 한다는 O웃라스트, 주기적으로 유행하는 여러 인디 호러게임들, 가끔씩 나오는 O이오 하자드 같은 AAA급 호러 게임들. 호러게임은 방송 클립을 뽑아내기에도 좋고, 리액션을 하기에도 좋다. 시청자들의 몰입도와 반응도 좋은 편이고.
물론 나는 무섭지 않. 아. 요. 시청자들을 위해서 리액션을 하는 것뿐이야. 비명을 지르거나 책상을 너무 쎄게 쳐서 큰소리를 내거나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게 결코 무서워서가 아니야! 듀라한이 호러게임을 무서워 할 리가 없잖아!
“ㅉ.... ,,,ㄹ...ㅂ... ...”
“쫄보는 맛소금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너님이시구요.”
나의 온몸을 던지는 리액션은 그저 리액션일 뿐이야! 돈을 위한 내 헌신을 몰라주다니, 니 햄버거도 내 리액션에서 나오는 거란다.
내 리액션 한번=햄버거 2개라고. 내 리액션은 햄버거를 복사한다 이거야. 하지만 몇 년 전에 죽은 처녀귀신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햄버거를 죄다 군대리아 햄버거로 바꿔버릴까. 수증기에 찐 빵에 치즈 하나에 싸구려 고기패티에 딸기잼으로 삼시세끼 꽉꽉 채워줄까? 물론 우유는 없다. 딸기잼도 한숟갈만 줄거다. 샐러드는 만들기 귀찮으니까 대충 양배추 썰어서 마요네즈에 버무려서 주면 되지 않을까? 물론 해줄 생각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대에선 정말 날로먹는다는 소리 듣는 군대리아가 사회에서는 엥간한 햄버거 값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럴 바에 그냥 O리버거를 먹지.
O리버거는 신이고, O데리아는 무적이다!
잡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냉장고를 열어보니, 전자레인지에 1분만 돌리면되는 인스턴트 햄버거의 대명사, O벅 햄버거가 한 칸을 꽉 채우고 있었다. 대량구매하면 무려 천원 아래! 유통기한은 좀 짦지만 어차피 귀신이 먹는거니까 좀 상해도 괜찮지 않을까? 고등학생 시절에 야자 전에 친구들이랑 같이 하나씩 조지는게 정말 행복했었는데. 맨날 내기에서 져서 별명이 빵셔틀이었지. 그때가 내 리즈시절이었어... 그때는 나름 인싸여서 친구도 많았다고...
이제는 타락해버려서 통살치킨버거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버렸어...
이거랑 대충 사이다랑 먹자. 냉장고에서 두 개를 꺼내 포장지를 살짝 뜯어 전자레인지에 집어넣고 1분30초로 세팅한다. 아 두 개니까 시간 추가해야지. 하나씩 돌리기는 귀찮아. 1분 기다리고 또 1분보다 1분 30초 한번으로 퉁치는게 시간 절약도 되고 좋잖아?
“야, 너 근데 사이다도 마실 수 있어?”
귀신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햄버거도 먹는데 사이다를 못 마실 리가 있나. 나는 컵을 하나 더 꺼내 사이다를 따라주었다. 맛소금 공포증이 있는 처녀귀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컵을 두손으로 꼭 쥐고 사이다를 홀짝였다. 기뻐하는걸 보니 사이다가 마시고 싶었던건가.
왜 저렇게 처량해 보이지?
창백한 피부에 나름 현대인이었다고 새하얀 원피스 하나 입고 사이다나 홀짝이는 모습이 정말 처연해보였다. 아니 처연한거 맞나. 젊은 나이에 목 매달고 죽었으면 그만큼 현실이 비참했단 소리니까. 젊은 나이 운운하기에는 나도 앞날이 한참 남은 20대 후반이지만. 100세 시대에 20대란 아직 응애거리며 바닥을 뒹굴거리는 시기다. 20대 후반이라도 수명의 4분의 1 남짓 채운거잖아.
듀라는 아가야. 아가는 지켜줘야해...
그러고 보니, 저 처녀귀신은 나보다 연상일까 연하일까?
귀신이라 그런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산 사람은 액면가 보면 대충 얼굴이 세월에 직격타를 맞은 경우가 많아서 짐작하기 쉬운데, 귀신은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알아보기 어렵다. 살았을 때 못받았던 외모 보정 죽어서 몰아받은 느낌이랄까. 사실 내가 본 처녀귀신은 저 귀신 하나였기 때문에 비교대상이 딱히 없긴 하지만.
“너 몇 살에 죽었어?”
사이다의 맛을 음미하던 고독한 처녀귀신양은 컵을 내려놓고 잠시 고민하더니, 양 손을 들고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왼손엔 검지와 중지가, 오른손엔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을 편다.
스물...넷? 생각보다 어리네? 그럼 대학생 아니야? 이 근처에 대학이 뭐가 있었지?
“대학생이었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는 손가락 세 개를 치켜든걸 보니 3학년? 24살이면 여자기준이면 졸업할 나이 즈음 되지 않나? 휴학한건가? 자세한 사정은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여기까지만 묻기로 했다. 원래 남의 인생사 만큼 재밌는것도 없다지만, 처녀귀신의 인생사야 꿈도 희망도 없을테니까...
대충 예상가는 시나리오도 있고.
“내가 연상이네. 말 놔도 되지?”
귀신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에서 ‘처음부터 말 놨으면서 무슨 헛소리야. 님 도르신?’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읽혀진다. 뭔가 열받는데. 처녀귀신을 꼬나보면서 전직 빵셔틀의 폼이 어딜 가지 않은건지, 몸은 자연스럽게 O벅을 꺼내 처녀귀신에게 건네고 있다.
처녀귀신은 정말 맛있게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누가보면 수제 햄버거 집에서 데려가서 만원이 넘는 고급 수제 햄버거라도 먹이는 줄 알겠네. 820원짜리 햄버거이라 맛도 별로 없을텐데 너무 맛있게 먹어서 이쪽이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정말 햄버거 못먹고 죽은 귀신 아냐?
햄버거를 하나 먹어치우니 적당히 배가 불렀다. 이 몸이 되고나서 얼마 안되는 좋은 점이 그거다. 가성비가 좋아. 햄버거 하나면 배가 부르다니, 예전의 몸하고는 비교도 안되는 효율이다. 변하기 전의 내가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왠만한 성인 남성 만큼은 먹고 살았다.
근데 왠지 머리카락이 끝이 간지러운데. 나는 기묘한 느낌에 머리를 만지작 거렸다. 마치 미용실에서 머리 자르고 나왔을때의 느낌인데. 뒤통수가 시원한 감각이...
어?
짦아 졌...어?
이제는 목의 절반가량을 덮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머리카락이 스스로 탈코르셋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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