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5.응애 나 아기 듀라한(4)
* * *
응애 나 아기 듀라한!
28짤!
이사했어!
원래 일을 하려면 망설이지 말고 후딱 하라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방을 뺐다. 그리고 처녀귀신이 마중나오는 월셋방에 입주했다. 집주인에게는 일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전근을 가게되서 방을 뺀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뒀다. 지금 일이 생겨서 내가 연락을 못한다는 식으로 어머니가 이야기를 했지만 집주인은 신경쓰기 귀찮았는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답하곤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와, 저게 내 롤모델이야! COOL한 건물주.
유진아, 방송으로 한탕 크게 땡기고 건물주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도록 하자! 돈 많은 백수보단 건물주가 더 있어보이잖아!
돈많은 백수는 한량이지만 건물주는 우러러 보거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따박따박 월세가 들어오는 그 아름다운 판타지란 사람을 흥분시키는 법이야!
월세독촉! 알박기! 보증금 인상!
건, 물, 주! 얼마나 멋진 울림이야!
인류 역사이래 건물주가 갓물주가 아닌 시절은 없었다고!
“헬로~시드니?”
“...나...ㄱ...ㅏ...”
“나가란 소리 좀 그만하지 않을래? 이사하는 동안 벌써 8번 말했거든?”
어차피 너 내가 뿌려놓은 소금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돌아다니면서 이삿짐 옮기는걸 방해하려고 하길래 구석에 몰아넣고 주변에 소금을 왕창 뿌렸다. 조상님들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호랑이 담패피던 시절 귀신 쫒는 방법인 소금 뿌리기는 정말로 효과가 있었는지, 귀신은 구석에 박혀서 움직이질 않았다.
효과 확실하네. 소금이 바닥에 흩뿌려진게 좀 아깝긴 한데, 시끄러운 자칭 건물주의 어깃장을 방지하기 위한 을의 노력이니까 사람들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막 뿌려놓아서 바닥에 흩어진 소금 알갱이들을 빗자루로 쓸어서 귀신 주변에 하얀 선을 만들었다.
좋아. 이정도면 영역표시 깔끔하네. 어째서인지 귀신의 얼굴이 더 창백해진다. 와, 이젠 그냥 하얗네. 진저도 저정도로 하얗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세연씨? 1년 365일 거기에 계속 앉아있을 거 아니면 협상을 합시다.”
“...나...ㄱ...ㅏ...”
그놈의 나가 좀 그만 하시구요 제발. 혹시 녹음기라도 돌리는 거야? 억양부터 높낯이까지 완벽하게 똑같은데 귀신은 사실 같은 말 밖에 못하는 정박아야? 어디 나한테 저 귀신의 언어능력에 대해서 인텔리하게 법률적 자문을 해줄 귀신 없어? 나 대신 영상 편집 해줄 친절한 귀신은? 나도 고스트 O둑왕 같은 귀신이랑 동거하고 싶다고!
아니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별로네. 사람은 매일 만나는게 아니지만 귀신은 맨날 등 뒤에 O탠드 마냥 붙어있으니까 24시간 풀타임 훈수질하려 드는거 아니야?
어 라떼는 말이야...말이야....말이야...
아 그거 그렇게 하는거 아닌데...
나 때는 그렇게 하면 어? 어?
그러고 보니까 대학생 시절에 수업시간에 뭐만하면 라떼는 말이야를 읊던 교수님이 계셧었지. 좋은 수면제 강의로 유명했다. 그래서 모두가 마음껏 딴짓하고 시험은 몇 년째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 내용으로 학과내에서 도는 족보로 해결했다. 교수님, 지금은 뭐하고 계실까. 미칠듯한 갑질에 빡친 대학원생이 논문 표절건을 터트려서 교수자리 잘렸다고 듣기는 했는데. 단톡방에서 모두가 낄낄대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러셨어요. 정년 퇴직도 얼마 남지 않으신 분이.
“내...ㅈ...ㅣ...ㅂ...이...ㅇ...ㅑ...”
나가, 오지마, 내 집이야
누가 지박령 아니랄까봐, 이 방에 대한 집착이 심상치 않다. 정말 저 말 밖에 못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방에 대한 집착이 상상을 초월하는 걸까? 어느쪽이던 별로 알고 싶지는 않은데. 그냥 어떻게 퇴치라도 해볼까. 소금 무서워 하는거 보니까 소금 한 컵 정도 머리 위에 살살 뿌려주면 사라지는거 아니야? 민간요법이 또 뭐가 있더라. 도와줘요 트리위키!
음...성경이라도 읊으라고? 나 교회 싫어요우. 군대에서 햄버거 준다고 했을때만 빼고 자발적으로 가본적이 단 한번도 없다. 햄버거는...신이야! 없던 신앙도 생기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햄버거! 콜라! 감자튀김! 오늘 점심은 엄마손길이야!
단돈 5900원의 행복. 근데 만원 이하는 배달 되던가?
아 몰라 2세트 시키지 뭐. 남으면 냉장고에 박아놓고 나중에 또 먹으면 될 일이다. 햄버거는 식어도 맛있다고...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다시 따끈따끈해진다고...
“햄...ㅂ...ㅓ...ㄱ...ㅓ”
“뭐? 햄버거?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돈 있어? 요즘 시대는 더치페이가 국룰인거 몰라?”
내가 한 턱 쏜다 그런거 없다. 대학생 시절 때 한 턱 쏴봐야 먹버밖에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거든...
기억해라, 이성이 먼저 밥을 쏘게 하는 자가 진짜 승리자라고...잘생긴 얼굴은 모든걸 가능하게 한다...얼굴은 개연성이다...얼굴이 못생기면 뭔 짓을 해도 여자가 안꼬이고 얼굴이 잘생기면 뭔짓을 해도 여자가 꼬인다...근데 나는 이제 도내 최상위 랭크 미소녀니까 얼굴만으로 모든 개연성을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호러쪽도 커버할 수 있어! 머리만 똑 떼서 들고 다니면 와! 괴담 하나 완성! 이 빌라를 아예 유령빌라로 만들어 버릴 수가 있어! 할 생각은 없지만.
아, 근데 방 두 개 건너 이웃이 살고 있던걸로 기억하는데, 거기까지 소리가 들리진 않겠지? 이거 들키면 왠 미친년이 발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게 뻔하잖아.
“햄버거가 먹고 싶으면 협상 테이블에 서던가. 햄버거 말하는거 보니까 다른 말도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 대화좀 해보자.”
“...ㅉ...ㅣ...ㄴ”
“지금 찐이라고 했지? 내가 잘못 들은거 아니지?”
아니 이년이? 지금 나보고 찐이라고? 선 씨게 넘네? 식상한 도발이지만 나 28세 이유진, 국지적 도발을 참지 않는 여자. 한번 당하면 반드시 복수한다! 100배로 갚아준다! 당하지 않아도 복수한다!
주방에서 맛소금을 컵으로 가득 퍼서 가져온다. MSG의 힘을 보여주마. 네 몸에서 감칠맛이 나게 해주겠어...
“자 선생님. 마지막 기회 드리겠습니다. 협상 할거야 안 할거야!”
지금까지 뻗대던 귀신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맛소금 한컵의 공포를 이겨낼 수는 없었는지, 눈물을 찔끔 흘리며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귀신의 눈물이라니, 귀하군요. 저거 담으면 팔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바닥을 통과하는 눈물방울을 보며 새로운 블루오션의 꿈은 접어야 했다. 아깝네...
방 구석에 세워둔 접이식 탁자를 꺼내 정확히 맛소금 38선 가운데에 좌상을 놓고, 귀신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귀신은 눈물로 번진 마스카라처럼 볼을 가르는 검은색 줄이 생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에 초점이 없으니까 애가 날 제대로 보고 있는건지 아닌건지 알 수가 없네.
“자, 나 이유진은 이집에서 살겁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건 결정사항입니다. 님이 맨날 나...가...를 외치던 말던 난 여기서 살거야. 니 집 권리 주장하고 싶으면 너가 월세 내던가.”
월세 내준다 해도 나갈 생각은 없지만. 짐 풀었다 말았다 하는게 얼마나 귀찮은지 알아? 지금도 아직 짐정리가 끝나지 않아서, 못해도 내일까지는 짐 정리에 시간을 쏟아부어야 겨우 집이 사람 사는 곳처럼 보일 지경이라고. 그런 타이밍에 귀신이 눈치없이 텃세를 부리면 내가 빡쳐요? 안빡쳐요?
“...내...ㅈ...ㅣ...ㅂ...ㅇ...ㅣ...ㅇ...ㅑ...”
울먹이는 목소리로 억울하다는 듯이 주장하지 마! 내가 나쁜년 같잖아! 그거 을질이야 을질!
확 소금으로 샤워 시켜버리는 수가 있다? 어? 처신 잘하라고.
“자 선생님. 우리 진지하게 대화를 해봅시다. 저도 이런 방 구하기는 어려워서 여기로 이사왔고, 님도 이 집에 계속 거주할 생각이면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맛소금 컵을 눈앞에서 흔들어준다. 대화에 응하지 않겠다면 친절하게 무력행사에 나서겠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원래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겐 인실좆을 먹여주는게 우주의 순리인 것이다. 인생은 실전이야 귀신아!
맛소금은 신이다! 나는 무적이고.
“뭐 제가 이세연양을 성불시킬 생각은 없고, 얹혀살려면 그만한 노동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뭐 할 수 있는거 있습니까?”
영화보면 막 폴더가이스트같은거 있잖아. 책장 넘어트리거나 사람 밀어서 떨구거나 하는거. 그런거 할 수 있으면 설거지나 청소도 할 수 있는거 아니야? 집요정처럼. 공짜로 살게 해주는값이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거 아니야? 물론 나는 양심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가를 지급할 거다.
처녀귀신 앞에 펜과 종이를 가져다 놓는다. 귀신은 잠시 망설이더니, 펜을 잡았다. 오, 물리력 행사가 가능하다니, 하긴 안 그러면 어깨에 손자국 내는 귀신이나 물귀신 같은 애들은 이미 일자리 잃고 실업자 저기 옆동네 사탄이랑 소주마시면서 헬조선 타령하겠지. 귀신도 심각한 취업난을 이겨내려면 물리력 행사정도는 거뜬히 해내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요즘 세상에 깜짝 놀래키는 걸로 귀신 노릇하려면 ‘우효~처녀귀신 겟또다제~“하면서 달려들 놈이 한다스라고.
슥슥, 하고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의사표현을 하려나 본데. 10초정도 걸려 글자를 쓴 귀신은 뭔가 뿌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햄버거]
혹시 햄버거 못 먹고 죽은 귀신이야?
뭐 나야 햄버거 정도로 퉁치면 좋긴한데.
“그럼 하루 1회 설거지랑 세탁기 돌리기에 청소 어때? 대신 하루에 한 번 햄버거를 주지...”
귀신이 느릿하게 손을 내밀며 검지와 중지를 펼친다. 2개?
“그래, 두 개.”
내가 순순히 넘어가자 기회라는 듯 엄지를 펼치는 처녀귀신의 뻔뻔한 행태에 나는 맛소금이 담긴 컵을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관성을 이기지 못한 소금 알갱이가 식탁 위로 떨어진다. 처녀귀신의 새하얀 엄지손가락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접혀있었다.
세 개는 선 넘었지.
종이를 뒤집어 계약서를 쓴다. 뭐라고 쓰지?
대충
1.을은 갑에게 집청소, 빨래, 설거지를 매일 성실하게 이행한다.
2.갑은 을에게 매일 햄버거 2개를 지급한다.
3.Profit!
종이를 보여주자 귀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 타결이다.
“자 악수.”
귀신의 손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냉방비 아낄 수 있겠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