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관문
성남 페가수스의 FA컵 결승 진출은 K리그 팬들에게도, K2리그 팬들에게도 큰 화제가 되었다. 근래에 K2리그 팀이 FA컵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던 것은 지난 시즌 전주 드래곤즈의 8강 정도밖에 없었다. 그만큼 K2리그를 비롯한 하부 리그 팀들이 FA컵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것이 이번 시즌 성남 페가수스의 결승 진출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 시즌부터 시작된 승강제로 인해 더더욱 사람들의 관심은 깊어졌다. 지금껏 협회에서 추진한 승강제를 반대했던 팬들도 성남 페가수스를 포함한 K2리그 팀들에 관한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4강 진출 때도 몇 개 있긴 있었지만 결승이 되니까 확 늘어나는구만.”
동민은 집에서 인터넷 뉴스를 보면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인터넷 스포츠난에서는 K2리그의 돌풍이라며 여러 기사들이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성남 페가수스를 필두로 한 K2리그의 돌풍, 우승까지 갈 것인가. 결승 진출이 되니까 확실히 이런 기사가 많아지는구나. 아예 저번 시즌이랑 비교 기사도 있네.’
지난 시즌 K2리그에서 4위, FA컵에서는 16강이라는 비교적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던 팀이 이번 시즌에 들어서 K리그에서도 강팀이라 할 만한 부산 히어로즈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이제 남은 경기는 하나. 진짜 코앞까지 왔네.”
그러나 그에게는 K2리그의 돌풍도, 승강제의 변화도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가 지금 바라는 것은 오직 FA컵의 우승일 뿐 그다음의 일은 관심이 없었다. 이미 그에게 FA컵 우승이라는 일은 여러 감정들이 뭉쳐진 목표와도 같았다.
‘어차피 팀에서 떠나는 일은 결정 사항이니까. 내가 내 발로 목표를 이루고 떳떳하게 나가느냐, 아니면 그 인간의 비웃음을 받으면서 떠밀려 나가느냐의 차이지. 그 이후의 일도 이미 생각해 둔 건 있으니까.’
동민은 얼굴을 굳히고 생각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어째서 이 일에 이렇게까지 구애받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의문에서 고개를 돌리고 어느새 다음 경기에 집중했다.
‘남은 경기 상대는 같은 날 승부차기로 올라온 수원 블루 데빌즈라……. 이래저래 익숙한 팀이네.’
능력을 얻고 난 뒤, 확인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보았던 경기도 수원 블루 데빌즈와 서울 레드윙즈의 경기였던 것을 생각하며 동민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2주가 조금 넘게 남아 있는 시간 동안 그런 상대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초조함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래서 또 나냐?”
“부산 다녀온 거 의외로 괜찮았다면서 다음번에 또 일 있으면 같이 가자고 한 건 형이잖아.”
동민의 대답에 경태는 과거의 자신과 눈앞의 동민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난번에 한번 당했던 일을 또 되풀이하게 만든 자신의 입이 방정이었다.
“하이고, 내가 그 말 탓에 이러고 온 거 아니냐.”
경태는 한숨을 쉬면서 동민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몇 걸음 더 걷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래도 굳이 나랑 또 올 필요 없지 않냐? 이번에는 부산처럼 멀어서 차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혼자 오거나 아니면 그 같이 일하는 여자 코치랑 와도 되잖아?”
“수연 씨랑? 말이 되는 소리를, 아…….”
경태의 말을 일축하려던 동민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수연 씨가 수원 블루 데빌즈 팬이라고 했던가. 저번에 언뜻 들은 것 같은데 어쩌면 오늘 만날지도 모르겠네.’
동민의 머릿속에서 예전 블루 데빌즈 팬에 관한 기억이 슬며시 떠오르려 했지만, 이는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수연에 관한 생각으로 넘어갔다. 처음 수연과 만났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처럼 이렇게 개인적인 정보들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새삼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실실 웃고 있어? 너 그 사람이랑 진짜 뭐 있었지?”
“아니, 별거 아니야. 그냥 지금 상황이 신기하다 싶어서. 그리고 형이랑 오는 게 일하고 떠들기도 좋잖아. 얼른 들어가기나 하자고.”
동민은 파고들려 하는 경태의 말을 적당히 대꾸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확실히 저번 부산 경기보다도 사람이 많네.”
경기장에 들어서자 경태가 눈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아직 20여 분 이상이 남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원 블루 데빌즈의 홈 경기장인 올드 데빌 스타디움의 정원은 벌써 4분의 3 이상 차 있었다.
“충성심이 높은 걸 넘어서 제일 극성스럽다는 소리까지 듣는 게 수원 팬들인데 이 정도야 당연하지. 오늘 경기 상대가 중위권인 인천FC였으니 망정이지 만약 서울을 상대하는 슈퍼 매치였으면 이런 일반 표는 구하지도 못 했을걸?”
동민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수원 블루 데빌즈는 서울 레드윙즈와 더불어 K리그에서 가장 많은 팬들을 보유한 팀들 중 하나이자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 팀이기도 했다.
‘그런 팀을 상대로 결승전이라… 진짜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니까.’
K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을 상대할 생각에 동민의 가슴은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 일단 요즘 축구를 안 보는 나도 알 정도인 K리그 최고의 스타가 있는 팀이기도 하니까.”
경태의 말에 동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동민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바뀌었으려나.’
동민은 자신의 기억 깊숙이 남겨져 있던 스테이터스 하나를 떠올렸다.
[심형만]
25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4.8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2.9 / 20
선호하는 플레이: 좌측면에서 안쪽으로 드리블 선호, 공을 잡고 템포를 조절, 정확한 슈팅 선호
특성:
장점 - 정확한 패스, 왼발의 마법사
단점 - 불같은 성격
현재 컨디션: 8/10
동민이 보았던 모든 스테이터스를 전부 떠올려 보아도 심형만 이상의 능력치를 지니고 있던 선수는 거의 없었다.
‘베인스 같은 진짜 규격 외의 괴물 말고는 거의 없었지. 더군다나 K리그 내에서라면 야… 2년 전에 보았을 때에도 분명히 무시무시할 정도로 높은 스테이터스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으려나. 들리는 소식으로는 스테이터스도 더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동민은 자신이 보았던 선수가 얼마나 변했을지에 대한 기대와 그런 상대를 곧 상대해야 한다는 걱정을 동시에 담고 그라운드에 눈을 고정시켰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자 동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미친…….”
그는 자신의 옆에 경태가 있는 것조차 잊고서 욕을 내뱉었다.
[심형만]
27세
잘 쓰는 발: 왼발
성장 가능성 14.9 / 20
현재 포지션에 대한 적합도 13.8 / 20
선호하는 플레이: 좌측면에서 안쪽으로 드리블 선호, 우측면에서 안쪽으로 드리블 선호, 정확한 슈팅 선호
특성:
장점 - 정확한 패스, 왼발의 마법사
단점 - 불같은 성격
현재 컨디션: 6/10
‘포지션 적합도는 물론이고 성장 가능성도 미세하게 올랐어. 거기다가 가장 무서운 건 좌우측 어디서든 뛸 수 있게 변했다는 건데… 솔직히 저 정도면 K리그에 지금까지 있는 게 말이 안 되는 수준 같은데.’
형만의 스테이터스를 보고 동민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지금껏 상대했던 선수들 중에서도 최상급의 스테이터스에 할 말을 잃은 탓이었다.
‘단순하게 숫자만 따지면 베인스가 훨씬 더 높기야 하지만 그때는 프리 시즌에 있던 친선 경기고, 저 녀석을 상대할 경기는 FA컵 결승이야. 아무리 베인스가 더 스테이터스가 높았다고 해도 비교가 될 리 없지. 거기다가 베인스와 파블로 두 명의 에이스 말고는 떨어지는 편이던 상하이 레인저스와 K리그의 손꼽히는 강팀 수원 블루 데빌즈, 팀으로 비교하면 더 상대가 안 되고.’
곧 다가올 결승에서 그가 상대해야만 하는 상대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끔찍하게 강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심형만과 수원은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야.”
“…응?”
“결승전 장소가 여기였지? 이길 수 있겠냐?”
전반전이 끝난 뒤, 경태는 불쑥 동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반전이 시작되고 처음 있는 그들의 대화였다. 그만큼 그들은 경기에 압도되어 있었다. 단순히 심형만의 플레이가 대단한 것만이 그 이유가 아니었다. 심형만을 중심으로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맞아떨어지는 수원 블루 데빌즈의 경기력도, 그리고 그런 그들을 응원하는 목소리로 가득 찬 올드 데빌 스타디움도 모두 그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극성스럽다는 표현마저 들을 정도인 수원 블루 데빌즈의 서포터들은 원정 팀이 공을 잡을 때마다 야유를, 반대로 수원의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는 환호를 보내며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상대팀을 짓눌러 버릴 듯한 경기장 속 분위기는 경태마저 마른침을 삼키게 만들 정도였다.
“…무진장 힘들어 보이긴 하는데 못할 건 없잖아.”
그러나 동민은 그 분위기에 눌리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조금도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원의 에이스인 심형만에 대한 걱정도, 확실하게 성남보다 몇 수는 위인 상대 팀에 대한 두려움도, 수원 서포터들에 대한 압박감도 모두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동민은 그런 상황에서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우승할 때에도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어. 그런데 이겼잖아. 경기는 모르는 거라고. 심형만이 얼마나 잘하든, 수원이 얼마나 대단하든, 팬들이 얼마나 응원을 해대든 게임은 하기 전까진 모르는 거야.”
동민의 말은 떨리고 있었지만 반대로 그만큼 상대에게 밀리지 않고 우승을 차지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래, 니가 안 쫄았으면 된 거지 뭐. 표정 보아하니 오늘 경기 끝나고도 한잔하기는 그른 거 같은데.”
경태의 말에 동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이제야 전반전 끝난 거지만 보고 나서도 좀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처음부터 가볍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역시 직접 보니까 느낌이 아예 다르네. 적어도 제대로 된 뭔가가 생각날 때까지는 틀어박혀서 머리 좀 굴려봐야 할 것 같아.”
“대답하는 거 보니 정말로 압도되거나 그런 건 아닌 모양이네. 다행이야.”
경태는 동민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이 없는 그조차 분위기에 압도될 정도였으니 다음 경기를 위해 알아보는 동민은 얼마나 부담감이 클지 걱정했던 그였지만, 다행히 동민은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어 보였다.
‘확실히 예전하고는 달라지긴 달라졌구나. 내가 키운 건 아니지만 뭔가 허전하네.’
그가 기억하던 조심스럽고 심약하던 모습의 후배는 어느새 꽤나 강단 있는 사람으로 변한 듯했다. 그리고 그 변화에 경태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