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선을 위하여(2)
“네?”
동민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청바지에 후드 티라는 편안한 복장을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별로 꾸미지 않은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눈이 갈 정도의 미인이란 것을 깨닫자 동민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
“방금 연습하시는 거 봤는데, 금원대학교 축구 동아리 분들 맞으시죠?”
“네?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세요?”
급작스럽게 들어오는 질문에 동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답했다.
“저는 부광대학교 축구 동아리 BU의 매니저 한수연이라고 합니다. 혹시 감독님은 오늘 없으신가요?”
“예?”
예상치 못한 질문에 동민은 아무 생각 없이 되물었다.
“저번 경기 때문에 감독님을 좀 뵙고 싶어서요. 감독님은 혹시 오늘 안 계신가요?”
“어… 그…….”
“얘가 감독인데요.”
동민이 당황해서 말이 막힌 사이에 경태의 한마디가 그 위를 덮고 가버렸다.
“네?”
수연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자세히 보았다.
‘이 사람 조금 전 연습에서 눈여겨봤던 그 사람이잖아? 이 사람이 선수가 아니라 감독이라고?’
조금 전까지 연습에서 상대 수비를 유린하던 선수가 감독이라는 말에 이번에는 수연이 당황할 차례였다.
감독을 만나러 온 것은 맞았지만, 이렇게 젊다 못해 어린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그녀였다.
‘순식간에 우리 팀을 분석해서 그 해법을 들고 나온 그 감독이 이 사람이라니.’
“안녕하세요. 금원대학교 축구 동아리 감독을 맡고 있는 강동민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아, 안녕하세요. 저, 저기, 그…….”
동민의 인사에 수연은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번 경기에서의 전술 변화를 보며 수연은 분명히 경험 많은 코치가 도와주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반대되는 상황에 그녀의 사고는 잠시 멈춰 버렸다.
“무슨 일이시죠?”
“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 보이셔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동민이 재차 물어보자 수연은 실례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야, 축하한다. 어려 보인대!”
수연의 말에 경태가 싱글싱글 웃으며 동민의 등을 쳤다.
“아니, 형 나이쯤 되면 그 말이 기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아! 아파요! 아이고… 어쨌든 BU분이시면 얼마 전 경기 때문에 오신 건가요? 무슨 일로 오셨다고 하셨죠?”
동민은 그런 경태를 향해 야유를 하다가 결국 등을 한 대 맞고서야 다시 수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네. 며칠 전에 있었던 경기 때문에 왔는데요. 혹시 잠시만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경태는 빙그레 웃으며 자판기 버튼을 눌렀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그의 시선은 스탠드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녀를 향해 있었다. 수연이 잠시만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하자마자 그는 목이 말라 음료수를 마셔야겠다며 자리를 비킨 것이다.
‘편한 차림이라도, 딱 봐도 미인이 동민이한테 할 말이 있다니 당연히 피해줘야지.’
말하고자 하는 상대가 동민 개인이 아니라 KFC의 감독이었지만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개인이 아니라 해도 저런 미인과 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저 녀석 1학년 때부터 연애고 뭐고 없었으니까. 이럴 때만이라도 도와줘야지.’
경태는 기억을 되감아 처음 동민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강동민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말이 없는 조용한 녀석인 줄 알았다. 놀지도 않고 공부나 하는 그런 타입으로 생각하고 그다지 기억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러나 술자리 때마다 남아 있는 동민과 술을 마시면서 그는 깨달았다.
동민은 조용히 자신의 갈 길을 가는 사람도, 청춘의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노는 것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처럼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깔린 것이 본인의 꿈이었다는 축구라는 것도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경태가 자꾸 동민을 신경 쓰는 것도 결국 그런 동민의 모습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별거 아니겠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경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음료수를 들고 동민과 수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안 좋은 이야기를 아닌 것 같은데… 좀 이따 슬쩍 가서 들어볼까? 아냐, 내버려 두자.’
경태는 조금씩 샘솟는 호기심을 억지로 누르고 목을 축였다. 그러나 마음과는 반대로 그의 발걸음은 조금씩 동민과 수연이 있는 스탠드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무슨 이야기인지 조금은 들어도 되지 않을까. 그래, 감독이 다른 팀 매니저랑 이야기하는데 주장인 내가 들을 수 있는 거지.’
그가 자기 합리화를 끝내고 슬금슬금 스탠드의 뒤쪽으로 돌아오자 조금씩 동민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여기선…….”
“그래서 제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결국 슬쩍 고개를 들어 동민 쪽을 보자
“거기에서는 풀백이 좌측 공격만 제대로 막으면 원톱으로 들어오는 크로스 수가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럼 그다음 미드필더 쪽에서 오는 롱 패스는요? 그것도 예측한 것처럼 센터백이 움직이면서 차단했는데요.”
동민은 공책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지난 시합의 전술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 예상치 못한 광경에 경태는 생각한 그대로를 입에 담았다.
“아, 이분이 저번 시합 때 이야기를 물어보셔서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그 이야기를 하러 오셨다고 하셔서요. 아, 음료수 감사합니다.”
동민은 음료수를 받아 들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하이고, 난 대체 뭣 때문에… 커피로 괜찮으세요?”
“감사합니다. 저도 코치를 준비하는 데 저번 시합 때 전술 변화를 보고 감탄했거든요. 그래서 한번 만나 뵙고 싶었어요.”
경태는 그런 동민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수연에게 캔 커피를 건넸다.
‘그러면 그렇지. 뭔가 기대를 한 내가 잘못된 거지, 암.’
이런 미인을 앞에 두고도 결국 축구 이야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동민을 보며 경태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태도나 분위기가 달라졌어도 동민은 동민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리고 미드필드에서의 롱 패스는…….”
동민은 그런 경태의 마음을 모르는 듯 또다시 축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다 이야기해도 괜찮아?”
경태는 먼저 걸어가는 수연의 뒷모습을 흘긋 보면서 말했다. 동민은 수연과 거의 한 시간 동안을 저번 시합과 전술의 이야기로만 보내고,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가요?”
동민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니, 저 사람 BU 매니저라며. 저쪽도 본선 올라간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다 이야기해도 돼?”
경태는 동민을 보며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이미 끝난 시합이고 저쪽도 지고 나서 나름 분석했나 보던데요 뭐.”
동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본선에서 만난다고 해도 어떻게 나오든 전술적으로는 제가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동민은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처음 팀을 맡을 때만 해도 햇병아리 수준도 안 되는 자신이 할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이 컸지만 저번 경기로 그는 깨달았다.
‘이 스테이터스로 볼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전술적인 대응은 가능해. 오히려 문제라면 내 전술을 부원들이 따라오도록 만드는 게 문제지.’
동민은 얼마 전에 병렬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좋은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전술을 짜는 게 아니다. 대단한 전술을 짜봐야 선수가 못 따라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거야. 따를 수 있는 전술을 짜고 연습시켜야지. 안 그러고 선수 탓하는 게 제일 못난 놈이지.’
병렬의 말치고는 드물게 긴 말에 동민은 확실하게 기억해 두고 있었다.
‘그 말이 맞아. 가장 중요한 건 전술이 아니니까.’
동민은 다시금 머릿속에서 부원들을 연습시킬 메뉴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쭈, 자신감이 넘친다? 그러다가 지면 엄청 쪽팔릴 텐데. 난 니가 미인계에라도 넘어간 건가 했지.”
“미인계는 무슨 미인계예요, 실례되게. 그런 거 쓸 사람 같아보이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을걸요.”
“응? 무슨 소리야?”
경태의 말에 동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사람, 전술이나 훈련 같은 쪽 엄청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던데요. 그런 쓸데없는 일할 사람이 아닐 거예요.”
동민은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누던 수연을 떠올렸다.
스테이터스를 보고 상대의 전술을 파악한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순전히 그녀 본인의 눈으로만 보고 그의 전술을 알아챈 것이다.
그에 대한 대응은 부족했지만 상대의 전술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동민과 같았던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이 감독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몰라.’
그녀의 말을 들으며 동민은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동민은 그녀가 일개 매니저가 아닌 상대 팀의 감독이었다면 자신이 내놓은 전술에 대한 대응책도 분명히 내놓았을 거라며 침을 삼켰다.
‘앞으로 감독으로서의 길을 계속 가면 저 사람 이상의 사람들을 만난단 거지…….’
동민은 새삼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 길을 가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기를 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됐다.
“갑자기 왜 조용해졌어?”
“아뇨, 잠깐 좀 생각하느라고요.”
“묘하게 얼굴이 붉어 보이는데? 방금 저 여자 생각한 거 아니고?”
또다시 동민을 놀리기 시작하는 경태를 무시하며 동민은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자고요.”
“어허, 좀 솔직해져 보래도.”
옆에서 들려오는 경태의 말을 억지로 흘려들으며 동민은 문득 떠올렸다.
‘그나저나 그 사람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수연은 해가 져가는 길을 걸으며 조금 전 있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KFC의 감독은 그녀의 생각보다 어렸지만, 그녀의 예상보다 더 대단했다.
‘잠깐 사이에 이쪽 전술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대응책까지… 정말 천재란 사람들은 있구나.’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상대의 장점을 막고 단점을 파고드는,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을 그는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었다.
‘본선에서 또 만날 수 있으려나.’
수연은 또 한 번 그의 경기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그 사람, 왠지 낯이 익단 말이야. 어디서 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