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69화 (169/200)
  • # 169

    Chapter 41. 고통과 희망 (2)

    우레와도 같은 살벌한 기합이 정천우의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순간, 허공에 생성된 라이트 마법에 의해 어스름하던 정천우의 주변이 환하게 밝혀졌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집에서 빠져나온 역천검. 오러 블레이드가 길게 꼬리를 만들면서 빛으로 이루어진 원을 만들었다.

    파밧! 위잉!

    오러 블레이드가 생성되기 무섭게 고속으로 회전을 일으키며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파캉! 콰과각!

    고속으로 회전하는 오러 블레이드가 달려드는 언데드 기사와 언데드 전투마를 훑으면서 지나갔다.

    언데드 기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른 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썩어 버린 언데드 기사의 뇌가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천우에게서 두 번째 오러 블레이드가 피어났을 때는 알기 싫어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게 되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번쩍거리면서 언데드 기사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는 순간, 상체가 떨어져 나갔다.

    “꺼져 버려엇!”

    정천우는 인상을 와락 구기면서 연달아 플라잉 오러를 전방으로 쏘아 보냈다. 언데드를 일일이 상대할 시간이 없으니 물량 공세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의 주변은 오러 블레이드가 생성되면서 번쩍번쩍 환하게 빛났다.

    ‘제길! 징하네!’

    내공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에 놀란 정천우가 이를 갈았다.

    순환 구조를 가지는 오러 블레이드와 달리, 플라잉 오러는 단전과 연결을 끊으면서 사용하는 무공이다. 뭉텅이로 날아가는 플라잉 오러만큼이나 내공의 소모가 컸다.

    열댓 번 정도 플라잉 오러를 날려 대자 내공이 급격하게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니미! 마지막이다!”

    정천우가 이제까지와 달리 내공을 극성으로 밀어 넣고서 역천검을 휘둘렀다.

    부와앙! 콰과과과!

    기존보다 두 배 가까이 범위가 넓고 강력한 기운을 담은 오러 블레이드가 회전을 일으키면서 날아갔다. 궤적에 걸리는 모든 것을 썰어 대면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플라잉 오러를 발휘하기가 무섭게 정천우가 지면을 박찼다. 얼마 남지 않은 내공으로 어검술을 발휘해 어슬렁거리면서 걸어가는 언데드 병사를 마구 썰어 대며 뛰었다.

    “샤카알!”

    전천우가 전력으로 달려오면서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제는 마법사들이 다시 힘을 써 줄 때였다.

    “ЭДЁФБФ…… 익스플로젼!”

    “ЭДЁФфЛ…… 파이어 봄!”

    “ЭДЁЙб…… 파이어 에로우!”

    정천우가 언데드 병사를 따돌리기가 무섭게 그의 등 뒤로 연이어 폭음이 터졌다.

    무리해서 언데드 기사를 해치운 효과가 있었는지 화염 계열의 마법이 날아들자 언데드가 괴성을 지르면서 속수무책으로 불에 타거나 폭발 때문에 육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헤이먼!”

    정천우는 마법이 효과를 보이자 곧바로 헤이먼의 이름을 불렀다. 시간을 지체한 탓에 마법만으로는 언데드 군단의 진격을 저지하기가 어려웠던 까닭이다.

    헤이먼 역시 정천우의 명령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명령을 내렸다.

    “궁병대 1열 발사!”

    투두둥! 투둥!

    정천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헤이먼이 눈치 빠르게 발사 명령을 내렸다.

    정천우의 뒤쪽으로 성수에 적신 쿼렐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화망(火網)을 구축하여 언데드를 덮쳤다. 정천우가 본진에 도착할 즈음에는 벌써 2열이 쿼렐을 발사하고 3열이 조준에 들어갔다.

    “후와! 쓰러지는 줄 알았네!”

    정천우는 본진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바닥난 내공을 보충하기 위해서 가부좌를 틀고 혼원벽력신공을 운용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욕설이 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의 집중력을 흔들지는 못했다. 반쯤 의식을 열어 놓고서 내공을 운용하고 있으니 회복되는 속도는 느리지만 대신에 안전하다.

    그가 전투에서 빠졌음에도 의혈맹은 언데드를 향해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20여 분이나 지났을까?

    정천우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다가온 사람은 주소용 후작이었다.

    “맹주, 후퇴해야 합니다. 2차 저지선까지 병력을 차례로 물리면서 언데드를 견제해야 의혈맹에 승산이 있어요.”

    “알겠습니다. 부맹주께서 계속 지휘를 맡아 주십시오.”

    “네, 맹주님!”

    주소용 후작은 군례를 올리고 다시 전장으로 뛰어갔다.

    ‘나는 할 수 없는 일이야.’

    정천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잘 안다. 일정 수준까지의 병력은 자신이 운용할 수 있지만 이처럼 거대 규모의 병력을 통솔할 능력은 없다.

    그렇다면 굳이 자신이 통제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능력 있는 자를 곁에 두고서, 안 되는 일에 굳이 자신이 매달릴 이유가 없는 일이다.

    이미 검증된 능력을 지닌 주소용 후작에게 통솔을 맡기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위기 상황에서도 그게 충돌 없이 이루어질 때, 조직은 더욱 발전하는 법이다.

    정천우는 자신이 할 일을 찾아 몸을 날렸다. 그가 가려는 곳은 샤칼이 있는 마법병대다. 가장 중요한 공격 수단을 보유한 곳이기에 그들의 안전을 확보해 줘야 한다.

    정천우가 샤칼을 향해 달려가는 그때, 주소용 후작의 목소리가 전장을 연이어 흔들었다.

    “방패병 앞으로! 엄폐물을 활용해 언데드의 진입을 막는다! 궁병대는 2차 저지선으로 신속히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어라! 헤이먼 부단장! 궁병대를 부탁합니다!”

    “예, 부맹주님! 궁병대는 나를 따르라!”

    헤이먼이 듬직하게 대답하고는 궁병대를 향해 소리쳤다. 그가 몸을 돌려 2차 저지선을 향해 달리자 궁병대가 그 뒤를 우르르 따랐다.

    샤벨타이거 기사단 역시 헤이먼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정천우가 그에게 지휘권을 넘긴 까닭에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헤이먼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주소용 후작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데, 언데드와 싸우는 최전방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어, 언데드 기사다!”

    파비스를 엄폐물 삼아 언데드를 방어하던 방패병들이 식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샤칼의 곁에 막 도착한 정천우 역시 방패병의 당황한 목소리를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샤칼! 그만하고 헤이먼이 있는 곳으로 후퇴해! 몸부터 추슬러!”

    “헉, 헉! 예, 주인님!”

    샤칼은 땀투성이가 된 채 크게 대답했다.

    마벙병대의 마법사들은 모두가 땀에 푹 절어 있었다. 마나를 있는 대로 쥐어짜면서 공격을 해 댔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마나 고갈 현상에 시달리는 마법사까지 눈에 띄었다.

    그들 사이에 섞인 제인 역시 힘겨워하고 있었다.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개인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정천우는 샤칼에게 명령을 내리자마자 방패병이 소리친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달려가면서 허리춤에 매달린 가방에서 드로잉 나이프를 꺼냈다. 오랜만에 손에 잡아 보는 것이라 어색한 느낌이 있었지만 내공을 끌어올리자 그런 감각은 이내 사라졌다.

    피비빙! 파바밧!

    그의 손에서 연달아 파공음이 일어났다.

    가죽 주머니의 드로잉 나이프가 바닥날 때까지 암기술을 사용해 드로잉 나이프를 던졌다. 흉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언데드 기사들의 이마에 드로잉 나이프가 박혔다.

    마력의 원천이 파괴되면서 언데드 기사들이 말에서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뒈졌으면 곱게 지옥으로 꺼져, 이 새끼들아!”

    정천우가 역천검을 뽑아 크게 도약했다.

    때마침 언데드 전투마를 끌고 파비스에 몸을 부딪쳐 오던 언데드 기사의 머리통을 투구째 날렸다. 시커먼 썩은 피를 쏟아 낸 언데드 기사가 언데드 전투마에서 떨어져 다른 언데드 병사의 발에 짓밟혔다.

    의혈맹의 맹주인 정천우가 또다시 전선에 뛰어들자 병사들의 사기가 대번에 올라갔다.

    ***

    “으음…… 글렀군.”

    당당한 체구의 사내가 말 위에 탄 채 산 밑에서 벌어지는 언데드 군단과 의혈맹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침음을 흘렸다.

    “련주님! 놈들의 힘이 빠졌을 때 계획대로 기습하시는 게…….”

    곁에서 말을 탄 사내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의중을 물었다. 그러나 ‘련주’라고 불린 사내는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적군의 기사들은 아직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기습의 묘를 발휘하기엔 부적절하다. 저들의 마법 전력이 저처럼 뛰어난 줄 몰랐다는 게 패착이야.”

    련주…… 그러니까 정도련의 새로운 주인이 된 정진석 공작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4만의 언데드 군단이라면 의혈맹의 힘을 모조리 빼놓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저들이 언데드를 물리치고서 헐떡대는 틈을 노리고 일거에 쓸어버릴 생각이었는데, 그게 틀어지고 말았다.

    “전설의 후계자라…… 지나치게 강해. 언데드 기사들을 그렇게 쉽게 해치울 줄은 몰랐어. 그러고도 힘이 남아서 아직도 펄펄 날아다니다니, 정말 놀랍군.”

    정진석 공작은 언데드 기사들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난동 부리는 정천우를 노려보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예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도무지 정천우의 능력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자신 역시 숨겨 둔 힘을 사용한다면 저런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숨겨 둔 힘을 모두 개방한다고 해서 놈을 해치울 수 있을지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차라리 그때 처리했어야 했던 것인가?’

    정진석 공작은 아쉬운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에 지하 수련실에서 대련을 벌였을 때, 만약 힘을 개방해 정천우를 죽였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무림맹과 정도련을 상잔하겠다는 계획도 틀어졌을 것이다.

    당시에도 무림맹 내부에서 전설의 후계자인 정천우를 지지하는 놈들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천우를 죽였다면 그놈들이 명분을 내세우며 이탈했을 게 뻔하다.

    오히려 손을 대지 않고 꾸역꾸역 전면전을 진행했기에 손쉽게 무림맹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후회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때는 살려 두는 게 옳은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뿐이다. 정천우가 이토록 무섭게 성장할 줄 알았더라면 당시에 해치우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종류의 아쉬움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켜서 계획한 작전이었으나 실패를 인정해야만 했다.

    “기습은 실패다!”

    정진석 공작은 애써 상념을 접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곁에 선 당청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오나 련주님…….”

    “때로는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것도 현명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마교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수성전으로 시간을 끄는 편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쉽지만 여기까지다.”

    “……알겠습니다.”

    당청서는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싸움의 막바지에 이른 의혈맹을 바라보았다.

    전황을 확인한 그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했던 것보다 의혈맹의 피해가 너무도 미미하다는 것을 확인한 까닭이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그들이 도착하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네, 련주님!”

    살기(殺氣)로 번들거리는 정진석 공작의 눈빛을 확인한 당청서가 그제야 얼굴을 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이번만 기회가 아니라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당청서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돌아간다!”

    정진석 공작은 짧게 명령을 내리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정도련의 기습 병력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에 물든 숲과 동화되어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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