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61화 (161/200)
  • # 161

    Chapter 39. 폭풍전야(暴風前夜) (3)

    ***

    “후우…… 무공이 높아진 게 꼭 좋은 것만도 아니야.”

    정천우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고는 역천검을 검집에 넣었다.

    누군가 지하 연무장을 향해 내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동대륙에 넘어와서 감각이 예민해진 것도 있지만 초절정의 경지에 입문하면서 오감이 더욱 발달했다.

    어째서 중원의 고수들이 그렇게 지하 깊숙이 폐관수련장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하는지 이제는 공감이 갔다.

    “뭐, 나쁘지 않은 내용이었어.”

    정천우가 바닥에 놓인 무공총람을 집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무공총람을 살펴본 덕분에 ‘기본’이라는 것을 되새길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많아진 내공 때문에 놓친 부분이 많았는데, 무공총람은 그런 정천우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초식에 연연하지 말라!’였다.

    자신의 무공이 나아갈 방향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무공총람을 출입문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 지하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아! 맹주님, 마침 잘 되었습니다.”

    “우룡 경,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정천우는 그가 내려오는 것을 알았음에도 시치미 뚝 떼고 인사말을 건넸다.

    “하하하, 그래 보입니까? 사실은 어제 작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팽우룡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전 마교의 기사단을 상대로 벌였던 요격전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제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교의 기사단을 한바탕 휘젓고 나온 정천우를 지키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정천우와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너무나 보잘것없는 성과였기에 멋쩍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확실히 달라졌는데요? 이젠 어지간한 마교 놈들은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어쩌면 조만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을 듯 보이고요.”

    “네? 에이, 설마…… 진짜입니까?”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농담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던 팽우룡이 눈을 크게 떴다.

    까마득한 경지에 오른 정천우가 자신에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것 같다고 하니 놀라웠다. 조금 실력이 늘었다고만 생각했지, 자신의 실력이 마스터의 경지를 넘볼 정도일 줄은 몰랐다.

    침을 꼴깍 삼킨 팽우룡은 정천우의 말을 기다렸다. 그 모습이 선물을 바라는 아이를 보는 것 같아, 정천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금만 더 수련에 힘을 기울이시면 될 겁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처럼 수련을 이어 가신다면 말이죠.”

    팽우룡의 기세를 살피면서 정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제가 마스터가 될 수 있다니, 이거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아무리 늦어도 1년 안에는 마스터의 경지를 개척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뭐, 저한테 감사할 건 없는데……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겁니까?”

    정천우가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그제야 팽우룡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신이 지하 연무장을 찾아온 이유를 떠올렸다.

    “성 밖에 무림맹의 패잔병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부맹주들이 맹주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무림맹의 패잔병?”

    “그렇습니다.”

    “별일이군요. 무슨 염치로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가시죠.”

    정천우는 코웃음을 흘렸다.

    무림맹에 대한 인식이 좋을 수가 없었다.

    정진석 공작이 무림맹을 배신한 것은 이미 보고를 받아 안다. 무림맹이 된통 당한 것은 알지만 의혈맹이 그들을 받아 줄 이유는 없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말 때문인지, 팽우룡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정천우의 앞에 걸었다. 남궁세가의 영주 집무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팽우룡의 미소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영주 집무실의 문을 열기가 무섭게 미소가 사라졌다. 분위기가 무거운 것을 알기에 개인적인 기쁨을 애써 숨겼다.

    “충! 맹주님, 어서 오세요.”

    주소용 후작이 대표로 자리에서 일어나 군례를 올렸다.

    정천우가 마주 군례를 올리고는 사람들을 지나 탁자 중앙에 위치한 의자를 당겨 앉았다.

    “무림맹의 패잔병이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

    정천우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본론을 꺼냈다. 불필요한 안부 인사 같은 걸 하느라 시간이 낭비되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러자 의혈맹의 부맹주 자리에 오른 주소용 후작이 입을 열었다.

    “네, 맹주님.”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무림맹 서열 7위의 정영석 백작이 패잔병 무리를 이끌고 있어요. 대략 기사가 30명에 병사가 2천 명가량이죠.”

    “어째서 의혈맹에 찾아온 겁니까?”

    정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림맹과 정도련이 전쟁을 벌이던 당시와 비교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초라한 병력이다. 기사 30명과 병사 2천 명은 의혈맹에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주소용 후작은 그를 이해시키려는 듯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맹주님, 무림맹이 의혈맹에 숙이고 들어왔다는 명분이 중요해요. 이제 무림맹보다는 의혈맹이 동대륙의 중심 세력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답니다.”

    “그게 중요합니까? 무림맹의 패잔병 따위가 합류하지 않더라도 의혈맹은 이미 동대륙의 중심입니다.”

    정천우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진석 공작이 의혈맹을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적으로 선포할 때까지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주제에 이제 와서 의혈맹에 들어오겠다는 게 그저 가증스러울 뿐이다.

    “맹주님, 그래도 받아들이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량을 베풀어 둔다면 기사들과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거라고 봐요. 결속력도 더욱 높아질 테고요.”

    “흐음……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정천우는 회의실에 모인 수뇌부를 둘러보며 물었다.

    사실 하나 마나 한 질문이다. 정천우가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대충은 얘기가 오갔을 테니까 말이다.

    정천우는 입맛을 쓰게 다시고는 시선을 다시 주소용 후작에게 돌렸다.

    “여러분의 뜻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 나가는 겁니까?”

    “네, 맹주님. 맹주님께서 무림맹의 패잔병을 직접 맞이하신다면 모양새가 더욱 보기 좋을 거예요.”

    “그럼 다들 나가는 것으로 합시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정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무림맹의 패잔병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후다닥 해치우고 관심을 접을 생각이었다.

    정천우가 앞장서서 영주 집무실을 나서는 순간, 수뇌부가 줄줄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정천우와 수뇌부 사람들은 남궁세가의 성벽 위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무장한 일단의 무리가 성 밖에 앉아 진을 치고 있었다. 대략 2천 명 정도였는데, 무장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하기야 정진석 공작이 무림맹의 최정예 기사이자 수뇌부라고 할 만한 인물들을 일거에 죽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가했으니 피해가 컸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한심하군.’

    정천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패잔병이라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 아무런 의욕도, 투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함께 힘을 모아 싸우겠다고 온 놈들인지, 음식이나 축내겠다고 온 거지새끼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저런 것들을 받아들이자는 겁니까?”

    정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진심이냐고 묻는 그의 물음에 의혈맹 수뇌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의명분을 가지기에는 무림맹의 패잔병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고였으니까 말이다.

    “후우…… 주소용 후작님께서 대신 얘기해 주십시오.”

    “네, 맹주님. 제가 대신 말하겠어요.”

    정천우가 지친다는 얼굴로 협상을 떠넘기자 주소용 후작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정영석 백작! 맹주님께서 그대들을 받아들이기로 하셨어요. 만약을 위해서니 모든 병력은 무기를 두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주소용 후작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그러자 무림맹 패잔병의 진영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갑옷과 투구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였다. 그 뒤를 따라 30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비슷한 복장을 하고 뒤따라 나왔다.

    “주소용 후작! 기사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것은 목숨을 버리라는 말과 같소. 우리 기사들은 그대의 말을 따를 수 없소! 대신에 병사들은 무기를 놔두라고 하겠소!”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하는 정영석의 제안에 주소용 후작은 정천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그러라고 하십시오.”

    정천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에서도 무인들이 자신의 병기를 소중히 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 왔기에 이해되는 일이었다.

    주소용 후작은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성벽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좋아요. 그럼 기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은 전부 무장을 해제하고 성 안으로 들어오세요. 성문을 열…….”

    “잠깐!”

    주소용 후작이 막 병사들에게 성문을 열라고 지시를 내리려는데 정영석 백작이 급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인가요?”

    “우리는 의혈맹의 선봉에 서길 원하오!”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소용 후작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닫고 아래쪽을 향해 양해의 말을 꺼냈다. 그리고 막 뒤돌아서려는데, 정천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꺼져!”

    “…….”

    정천우가 내공을 담아 나직하고도 위압적으로 한마디 툭 던졌다.

    순간, 성벽 위에 선 의혈맹의 수뇌부는 물론이고 성벽 밑에서 대답을 기다리던 무림맹 패잔병들도 정적에 휩싸였다.

    “지금 뭐하고 하셨소? 그리고 귀하는 누구요?”

    “꺼지라고 했다. 네깟 놈들, 필요 없다!”

    정천우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의혈맹의 수뇌부가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맹주! 그리하시면 곤란합니다.”

    “맹주!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명분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에요. 저들을 돌려보내면 분열이 생길 수 있어요.”

    팽선웅 백작을 비롯한 수뇌부 사람들이 정천우를 달래며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상태로 손바닥을 펼치는 모습이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수뇌부 사람들은 정천우의 분위기가 이상함을 깨닫고 슬그머니 말문을 닫았다. 하지만 눈치를 보면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가뜩이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정영석 백작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리 무림맹을 무시하는 거요?”

    “그래, 무시하는 거니까 꺼져! 한 번만 더 시끄럽게 짖어 대면 그 주둥이를 날려 버리겠다!”

    정천우는 모욕적인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분노에 휩싸인 정영석 백작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막 뭐라고 항의하려 했지만 정천우가 한 박자 빨랐다.

    “그 많은 병력을 날려 먹고 온 주제에 왜 이렇게 당당해? 지금 놀러 왔어? 선보옹? 지랄하고 있네! 병정놀이나 하려거든 다들 집으로 돌아가!”

    상대가 화를 내거나 말거나, 정천우는 무림맹의 패잔병들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이놈! 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리도 건방지단 말이냐! 당장 내려와라!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정영석 백작은 롱소드를 뽑아 들고 성벽 위를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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