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60화 (1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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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9. 폭풍전야(暴風前夜) (2)

    ***

    “큭! 온몸이 욱신거리네.”

    정천우는 전장에서 벗어나 처음 매복하고 있던 곳으로 돌아오면서 투덜거렸다.

    마교의 기사들에 비해 의혈맹의 기사들이 전력적으로 열세였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조금이라도 의혈맹이 쉽게 싸우길 바라는 마음에서 움직이다 보니 한계를 넘어서까지 싸웠다.

    만약 의혈맹의 기사들이 조금만 더 실력이 좋았더라면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움직이지는 않았어도 되었을 일이다.

    그러나 정천우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부족한 거야.’

    의혈맹의 기사들이 부족한 것을 탓하던 그는 모든 게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서라는 걸 깨달았다.

    다크 기사단의 찰리 단장을 월등한 능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면 전투가 훨씬 빨리 끝났을 것이다.

    ‘그가 나보다 강했나? 아니야…….’

    정천우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커다란 나무를 향해 걸었다.

    샤칼이 지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모습에, 그는 고개만 까딱해 주고는 나무 밑으로 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으니 한결 숨 쉬기가 편안해졌다.

    그런 정천우의 곁으로 팽우룡이 말을 타고 다가왔다.

    팽우룡은 그가 고민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말에서 내려 주변을 지켰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세이버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언제라도 세이버를 뽑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팽우룡의 배려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정천우는 아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늘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내가 약했던 것일까?’

    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약하지 않다.

    마스터의 경지.

    중원으로 따지면 초절정의 경지다. 초절정의 경지라는 건 검강을 사용하는 걸 넘어서 검강을 발출하는 경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정천우의 능력으로는 아직 무리다.

    물론 검강을 만들어서 쏘아 보낼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 때나 검강을 쭉쭉 뽑아서 공격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

    내공으로만 따지면 벌써 이 갑자 수준이다. 그러나 무공에 관한 깨달음이 내공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오늘 싸웠던 찰리 단장도 마스터급 기사다. 비록 역혈대법이라는 비상식적인 방법을 통해서 마스터의 경지를 보여 줬으니 정천우에 비하면 몇 단계나 수준이 떨어진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나보다 더 능숙했어. 내가 오히려 밀렸단 말이지.’

    거기에서 정천우의 고민은 깊어졌다.

    냉정하게 능력만으로 따지면 찰리 단장을 쉽게 제압하고도 남아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놈이 마법을 사용해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마지막까지 찰리 단장에게 질질 끌려가는 싸움을 했다는 게 문제다.

    ‘뭐가 문제인 거냐…….’

    눈을 감은 정천우는 계속 문제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안정된 자세로 앉아 있으니 그의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혼원벽력신공이 저절로 운기되었다. 단전에 남은 작은 기운이 전신을 타고 돌면서 주변의 기운을 빠르게 끌어당겼다.

    혼원벽력신공을 운용하기 전에도 대자연의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와 기운을 보충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것이 내공이 움직이면서 가속도가 붙어 더욱 빠르게 단전에 내공을 보충해 주었다. 엇비슷한 상대와 비등한 싸움을 벌이면서 소진되었던 내공이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이런 속도라니, 내공 배분에 신경 썼더라면 더 오래 싸울 수 있었겠는걸?’

    정천우는 잠시 쉬는 것만으로도 내공이 차오르는 걸 발견하고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차오른다면 다크 기사단원들과 더 오래 싸웠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침없이 뻗어 나가던 역천검.

    검강을 뿜어내면서 나가는 칼날에 걸리는 것은 뭐든지 베었다. 갑옷 따위는 피부를 가르고 뼈를 부수는 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마나로 보호되는 방패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전장을 휘저으면서 마교의 기사들을 손쉽게 해치웠다. 초식이고 뭐고 필요치도 않았다. 역천검을 휘두르면 그것이 초식이 되었다.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정천우는 찰리 단장과 싸웠던 답답함이 조금은 희석되는 느낌을 받았다.

    ‘잠깐! 초식? 초식?’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빛이 스쳐 가는 것 같았다.

    마교 기사와 싸울 때와 찰리 단장과 싸울 때가 비교되었다.

    마교 기사와 싸우던 몸 상태가 결코 충분했다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찰리 단장과 싸우던 당시의 몸 상태보다 훨씬 더 나빴다. 내공은 거의 소진되어 검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찰리 단장과 싸우면서 누적된 내상으로 온몸은 삐거덕거렸고, 내공은 상대하는 마교 기사들보다도 적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마교 기사들을 유린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말이 되지 않았다. 단순히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순 없다.

    마교 기사들을 뚫고 나오기도 전에 내공이 부족했어야 이치에 맞다. 싸우면서 주변의 기운을 끌어들여 내공을 보충하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홀로 싸우면서도 마교의 기사들을 압도한 것도 모자라 초토화시키면서 길을 뚫었다.

    찰리 단장과 싸울 때만 해도 정천우가 체력적으로나 마나양으로나 훨씬 더 우위에 섰음에도 힘든 싸움을 치렀는데 말이다.

    ‘어째서지? 대체 무슨 차이냐!’

    눈을 감은 정천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서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단순히 공격 목표가 머리뿐이었기에 찰리 단장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아!”

    인상을 구기던 정천우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면서 눈을 번쩍 떴다.

    순간, 주변의 기운이 회오리치면서 그의 몸으로 빨려 들었다. 터지고 갈라졌던 기혈이 순식간에 회복되고, 차근차근 차오르던 단전의 내공이 급속도로 빠르게 채워졌다.

    “아하하하! 그거였어!”

    정천우가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같았다.

    상승의 무공이라는 생각에 너무나 초식에 얽매여 있었다.

    낭인 생활을 하면서 정천우는 수십 종류의 무공을 배웠다. 대부분이 삼류의 무공이었지만 그의 목숨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던 무공들이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마교의 기사들과 싸우면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무공은 상승의 무공인 혼원벽력도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삼류 무공이라고 투덜거렸던 전륜도법이었다.

    베고 찌르는 단순한 동작들의 반복.

    워낙 익숙한 동작이었기에 내공 소모가 적었다. 그러면서도 혼원벽력도법을 배우면서 몸에 붙인 검강의 사용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육체적으로는 초절정의 경지가 완성되었으나 정신적인 깨달음이 모자라 반쪽짜리였다. 무공의 초식이란 건 배우기 위함이지, 실전에서 써먹기 위한 게 아님을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았다. 상승의 무공이라는 편견 때문에 초식을 그대로 따라서 사용하려고 했던 게 어리석었다.

    만약 찰리 단장과 싸움에서 이러한 이치를 깨달았다면 그렇게 고전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정천우는 검집에 넣었던 역천검을 다시 뽑았다. 오호단문도를 사용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크훠헝!

    오호단문도의 내공 특성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그의 전신에 뇌전으로 이루어진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포효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곁을 지키던 팽우룡조차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는 날카로움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정천우가 갑작스럽게 일어나 신위를 보이자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천우는 오호단문도의 기운을 지우고 혼원벽력도법의 특성을 떠올렸다.

    파직! 파지직! 파직!

    그의 주변이 뇌전으로 뒤덮였다.

    어지간한 실력의 기사는 감히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크흐흐흐! 와하하하!”

    정천우는 기분이 좋아져서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공을 뻗고 거두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중원에 있을 당시에 배웠던 삼류의 무공을 떠올려 보았다. 허접한 초식 때문에 거창한 이름과 달리 아무런 위력도 없었던 무공들이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 황홀한 감각에 정천우의 몸에서 수십 번이나 강기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형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젠 실전을…… 벌써 끝났냐?”

    자신감을 얻은 정천우가 투기를 드러내면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이내 혀를 찼다.

    마교의 기사들이 의혈맹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전멸되었다. 의혈맹 기사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면서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아쉽다는 듯이 역천검을 검집에 집어넣는 정천우의 모습을 바라보는 팽우룡의 얼굴에 진한 존경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

    남궁세가의 지하 연무장.

    정천우는 얼마 전에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중원에서 들었던 소문은 사실이었다.

    칼밥 좀 먹었다는 고수들이 걸핏하면 ‘깨달음은 준비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당시에는 개소리라면 피식 웃었던 정천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중원의 고수들이 했던 말들이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본인이 직접 경험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본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을 남겼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 바빴던 중원의 삶과는 달라졌다. 그때였다면 역시나 개소리라면서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정천우가 펼쳐 든 것은 남궁세가의 도서관에서 가져온 ‘무공총람’이라는 책이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마음가짐과 무인의 올바른 마음가짐 같은 잡다한 것들이 서술된 책이었다. 아울러 검과 도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되었다.

    정천우를 당혹하게 한 것은 검법이나 도법의 기본이 되는 것이 보법이라는 내용이었다. 결국은 하체를 단련하라는 의미였다.

    정천우로서는 의외였다. 무기를 직접 휘두르는 팔과 상체의 활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던 그의 상식이 무너진 것이다.

    “어렵네, 어려워…….”

    정천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중원으로 따지면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선 정천우다. 이제 와서 육체적인 단련은 의미가 없다.

    이미 육체가 무공을 사용하기에 최적의 형태로 진화하고 완성되었다. 육체의 단련보다는 내공의 분배를 생각해야 할 때였다.

    이래서 체계적인 무공의 수련이 중요하다. 어렸을 적부터 체계적으로 무공을 배웠다면 내공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최적의 상태로 내공이 분배되게끔 수련했을 테니까 말이다.

    정천우는 혼원벽력도법과 오호단문도법을 가다듬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현재는 가장 강한 위력을 내는 무공이었고, 자신과 상성이 제일 잘 맞는다.

    동대륙에서 힘을 쓴다고 해서 서대륙에서까지 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군다나 그가 상대해야 할 목표는 최종적으로 키아벨리아스라는 드래곤이다.

    자만했다가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혼원벽력도법을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든다!”

    정천우가 무공총람을 덮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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