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28화 (12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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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32. 전화위복(轉禍爲福) (3)

    그날 밤.

    아미파의 주소용 후작은 병력에게 야영지를 건설하자마자 휴식을 명했다. 적의 습격에 대비해 경계병을 넉넉하게 차출해 안전을 최우선 순위로 두었다.

    사이클롭스와 좀비 부대를 해치우고 곧바로 다음 날 행군 도중 기습을 당했다. 병사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극에 달해 있으리라는 건 병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소용 후작은 일부러 행군을 일찍 끝내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하북팽가와 연계해 일정을 잡은 것이다.

    무림맹의 명령에 따라 화산파를 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아미파와 하북팽가는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

    화산파는 어차피 치워야 할 상대다. 화산파를 친다면 그만큼 하북팽가와 아미파가 안전해지는 셈이다. 이왕에 병사들을 무장시켜 원정에 나섰으니 원래의 계획대로 화산파를 치는 게 맞다.

    그런 다음 남궁세가를 치고서 두 영지병이 터를 잡는다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무림맹이 정도련을 대파한 다음에 밀고 내려온다고 해도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다.

    남궁세가는 요충지였고 들어서는 입구가 좁아 천혜의 요새나 마찬가지다. 적은 수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하기에 용이한 지형이었다.

    그것은 화산파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동대륙의 영지들 대부분이 그런 지형을 골라 성을 만들었다.

    임시 사령실.

    천막으로 만들어진 사령부에서는 사람들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맹주님, 정말 그들이 기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반드시 기습해 올 것입니다.”

    주소용 후작의 물음에 정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를 쉬지 못하게 만들어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하는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전술이다. 낮에 보았던 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이다.

    소수인 데다가 실력이 만만치가 않은 놈들로 구성된 기사단이다. 기습에 최적화된 놈들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기사단이 기습을 감행한다는 건 좀…….”

    “저라면 합니다.”

    “…….”

    주소용은 짤막한 정천우의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하려던 얘기는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기사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리가 없어요’였다. 그러나 정천우가 선수를 치고 나오니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했다가는 정천우가 ‘파렴치한 놈’으로 전락한다. 주소용 후작은 그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불만스러웠다.

    병사들은 쉬게 하고 있지만 정작 기사들은 모두가 눈을 뜬 상태였다. 모두가 갑옷을 입은 채로 자리에 누워 잠든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어지간히 신경이 굵지 않고서야 갑옷을 입고서는 잠을 잘 수 없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갑옷이 몸에 배겨 잠을 이룰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럼에도 잠을 잔다면 다음 날 엄청난 근육통과 씨름해야 할 것은 뻔할 노릇이다.

    결국은 적의 기습이 벌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보내라는 의미다.

    다음 날 행군을 안 할 것도 아니었기에 기사들에겐 가혹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야습에 대비하지 않을 수도 없었으니, 그저 기사들만 죽어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주소용 후작의 호위기사 단장인 주성애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올지도 모를 적을 대비하기 위해서 날이 밝을 때까지 대기한다는 발상 자체가 미친 짓이다.

    차라리 절반씩 인원을 나누어 대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주성애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천우가 손바닥을 내밀고 귀를 기울이는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온 것 같습니다. 기사들을 준비시켜 주십시오.”

    정천우는 귀에 내공을 집중시키면서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천막 안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귀에 신경을 집중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성애 경은 나가서 기사들에게 준비하라 이르도록 하세요.”

    주소용 후작 역시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지만 호위기사 단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정천우가 괜한 소릴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기에 신속하게 대비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성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재빠르게 천막을 나섰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사들에게 준비하라고 나직하게 말했다.

    아미파의 기사들을 일부러 외곽에 배치해 두었다. 적의 야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만약 정천우의 말대로 놈들이 야습해 온다면 600명에 이르는 기사들의 역습을 받아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바닥에 누운 기사들은 저마다 롱소드를 움켜쥐고서 적의 야습에 대비했다.

    그러는 사이, 천막 안에서는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아주 야비한 녀석이군요. 조심성이 많은 놈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

    피비빙, 피빙, 슈슈슈슉!

    주소용 후작이 의아한 얼굴로 묻기도 전에 의문이 풀리고 말았다.

    “적의 야습이다! 기사들은 방패를 들어라!”

    주소용 후작이 천막을 박차고 나가 크게 소리쳤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기사들은 벌써 방패를 들고 적이 쏘아 낸 쿼렐을 막아 내는 중이었다. 그 소란에 병사들까지 잠에서 깨어나 부랴부랴 싸움을 준비했다.

    날아오는 쿼렐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쏘아지는 날카로운 살인 무기의 위협은 병사들을 두려움에 빠뜨렸다. 야습에 대비했던 기사들도 부상을 당했을 정도였으니 일반 병사들이 공포를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기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방패의 벽을 쌓았다. 그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주성애 호위기사 단장의 명령이었다.

    천막에 머물렀던 정천우 역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무거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주소용 후작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쉬이익!

    “흥! 지저분한 자식들!”

    정천우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쿼렐을 역천검으로 튕겨 냈다.

    적들은 대략 2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크로스보우를 쏘아 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둠 때문에 적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다르다. 어둠을 뚫고 적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그의 눈은 적장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당당한 덩치의 사내다. 말 위에 앉은 모습이 무척이나 위압적이었다. 멀리 있음에도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싸우려는 것인지, 야습만 벌이다가 후퇴하려는 것인지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야습을 감행하는 거라면 말을 몰고 돌진해 와야 정상이다. 그러나 적들에게서 그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크로스보우를 들고서 기계적으로 쏘아 대고만 있을 뿐이었다.

    목적이 느껴지지 않는 형식적인 공격에 불과했다.

    정천우는 적의 상황을 살펴보고는 내공을 돋우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 쥐새끼처럼 손장난이나 쳐 댈 거라면 그냥 꺼져라!”

    정천우는 상대를 향해 비웃음이 잔뜩 묻어나는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날아오던 쿼렐이 멈췄다.

    정천우의 눈에 덩치 큰 사내가 손을 든 모습이 보였다.

    ‘노리는 게 있어.’

    정천우가 눈매를 좁히면서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야습을 가한 상대가 이렇게 느긋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애초에 야습은 주목적이 아니라는 의미다.

    “나는 다크 기사단의 단장, 아이작 드 크림슨 백작이다. 그곳에 우리의 흑룡조장 ‘슈발리에 드 엑스타콘’을 살해한 놈이 있다고 들었다.”

    커다란 덩치답게 아이작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진동시키면서 아미파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아미파의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슈발리에 드 엑스타콘’이 누군지 몰랐다. 오직 정천우만이 그 이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북팽가와 무당파의 전쟁에서 들었던 이름이었다. 스콜피온이라는 무기에 마기를 담아 자신을 압박하던 흑룡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정천우는 아이작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깨닫고 이내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인가!”

    “엑스타콘 경의 복수를 원한다. 아울러 우리는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말하라!”

    “기사전을 벌여 승부를 가르고 싶다.”

    아이작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정천우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1:1로 승부를 겨루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스웠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지금의 상황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천우는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을 이해할 수 없어서 주소용 후작의 곁으로 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사전을 받아들이는 게 맞겠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들은 계속 우리의 뒤를 공격할 테니까요. 그런데 ‘슈발리에 드 엑스타콘’이 누구죠?”

    “무당파와 벌인 영지전에서 저와 마주쳤던 마교의 기사단장입니다.”

    “그렇군요.”

    주소용 후작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도했다.

    정천우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건 지난번 정진석 공작과의 대결에서 확인되었지만 이것은 이미 예전부터 마교의 기사단장을 해치울 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는 말과 같았다. 그녀는 정천우가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주소용 후작이 목을 가다듬고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좋아요. 기사전을 받아들이겠어요. 우리가 승리할 경우, 그대들이 야습을 멈추고 돌아가길 원해요. 그대들은 어떤 것을 원하죠?”

    “우리의 요구 조건은 없다. 만약 우리가 패할 경우, 그대의 요구 조건을 이행하겠다. 나는 단지 부하의 원수를 갚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그럼 중간 지점에서 겨루는 것으로 하겠어요. 우리 아미파 측에서도 그대들의 수에 맞추어 관전하는 것으로 하지요.”

    “마음대로 하라! 그럼 기다리겠다.”

    아이작이 자신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정천우는 주소용 후작과 아이작의 대화를 들으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을 장난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중원에서도 가끔 이런 경우가 벌어지기는 한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고수들이 나와 승부를 가르고, 그 결과에 따르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정파 간에 갈등이 빚어졌을 때 얘기다. 그것도 명망 있는 중재자가 끼어들어 공증을 서고 난 뒤에야 승부를 겨룬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전장이다. 애들 장난과도 같은 유치한 일을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할 줄은 정말 몰랐다. 중원 출신의 정천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기사전을 벌이겠다는 선언이 떨어지자 아미파의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적 기사단의 수에 맞추어 100명의 기사를 추려 횃불을 하나씩 들게 했다.

    본대와 대략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횃불을 바닥에 꽂아 주변을 밝혔고, 군데군데 모닥불을 만들어 어둠이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결투장을 만들었다.

    그리고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마법사를 불러 라이트 마법을 결투장 위에 생성하게 지시했다.

    결투장이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검은색 갑옷을 입었고, 말에 씌우는 마갑 역시 검은색이었다.

    그들은 결투 장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말에서 내렸다. 다크 기사단의 단장 아이작은 결투장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횃불이 밝혀진 결투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1.5m에 육박하는 클레이모어(Claymore : 양손검)를 두 손에 쥐고는 그대로 땅에 박아 넣었다.

    “내가 바로 ‘아이작 드 크림슨’이다! ‘슈발리에 드 엑스타콘’을 죽인 자, 앞으로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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