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127화 (127/200)
  • # 127

    Chapter 32. 전화위복(轉禍爲福) (2)

    ***

    “아주 골치 아프구만.”

    정천우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골칫덩이를 떠안은 기분이다.

    중원에서 나름 대형의 위치에 서서 사람들을 부려 본 적은 있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한 단위의 사람을 맡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더 황당한 것은 하북팽가의 반응이었다.

    일부러 팽선웅 백작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사람을 이끌 자신이 없어서다. 팽선웅 백작이 자신의 주군이니 하북팽가의 의견이 필요하다고 결정을 미뤘다.

    그러자 주소용 후작이 즉석에서 통신을 연결해 팽선웅 백작과 대화를 나누었다.

    상황은 정천우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무림맹에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팽선웅 백작은 주소용 후작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아미파와 하북팽가가 연합해 새로운 단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말이다.

    맹주를 정천우로 내세워 명분을 만들자는 것까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정천우가 끼어들 틈도 없었다. 끼어들기도 전에 모든 결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덕분에 팔자에 없는 맹주가 된 그는 그저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주인님,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전 주인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닥치시지, 샤칼.”

    “……네.”

    샤칼은 정천우의 살기 어린 위협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사이클롭스를 상대하면서 사용한 마법 때문이다. 샤칼이 마법을 사용하면서 했던 말들을 모두 들었다. 안 그래도 예민했던 감각이 대주천에 성공하면서 더욱 예민해진 바람에 듣기 싫어도 다 들렸다.

    정천우는 사이클롭스를 처리한 뒤에 다시 교육(?)을 실시했다. 이제 와서 알랑방귀를 뀌어 봐야 정천우는 샤칼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기가 팍 죽은 샤칼은 조용히 말의 속도를 늦췄다. 정천우의 곁에 있어 봐야 좋은 소릴 들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저 반골(反骨) 새끼!”

    정천우는 뒤로 물러나는 샤칼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서도 항상 뒤통수 칠 생각이나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든다.

    “샤칼 님의 말이 맞아. 왜 고민하는 건데?”

    가만히 지켜보던 제럴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정천우의 고민이 배부른 사람의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출세라면 출세인데 왜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떠날 사람이잖아. 굳이 내가 맹주를 맡을 이유가 없어.”

    “그땐 그때고, 지금이 중요하잖아. 지금 당장 떠날 게 아니라면 상관없지 않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다뤄 본 적이 없어.”

    “그거야 주소용 후작님을 시키면 끝이잖아? 왜 네가 모든 걸 다 하려고 드는데? 넌 그냥 싸움질만 잘하면 돼. 어차피 그러려고 널 맹주에 앉힌 거야. 그 영감탱이랑 잘 싸웠다면서?”

    제럴드는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평소에는 더럽게 똑똑한 척하던 녀석이 별 쓸데없는 일로 걱정하고 있으니, 이럴 때 보면 앞뒤가 꽉 막힌 놈처럼 느껴졌다.

    “그런 걸까?”

    “아마도?”

    “하긴…….”

    정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럴드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소용 후작과 팽선웅 백작이 자신을 맹주의 자리에 앉히려는 속내가 너무나도 빤히 드러난다. 두 사람 모두 정진석 공작과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는 게 분명한 것 같았다.

    실제로 주소용 후작은 자신의 옆에 있기보다는 병력을 운용하느라 전처럼 다른 지휘관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말을 몰고 있었다. 자신이 맹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과 별반 달라진 점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제럴드의 말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을 패로 맹주 자리에 앉힌 것이 분명했다.

    ‘그런 거라면야…….’

    정천우는 이내 수긍했다.

    자신을 맹주의 자리에 앉힌 게 그런 의미 때문이라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는 거야 이골이 난 몸이다.

    정진석 공작과도 한 차례 싸워 보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당사자인 자신과 정진석 공작은 안다. 자신이 봐주었기 때문에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말이다.

    정진석 공작과 싸우는 것이라면 문제없다.

    단지 싸우는 것뿐이라면 말이다.

    “제럴드, 고맙다.”

    “자식, 고맙기는 뭐가. 덕분에 나도 출세했다. 앞으로도 잘해 보자.”

    제럴드는 정천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고는 뒤쪽으로 멀어져 갔다. 정천우가 걱정되어 앞으로 나왔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헤이먼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넌 또 왜 실실 쪼개?”

    “단장님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웃었습니다.”

    “뭐? 좋은 사람? 매일 날 죽일 생각에 머리 싸매는 별종 엘프, 싸움만 났다 하면 빼기 바쁜 저놈? 그것도 아니면 매사에 무관심한 드워프?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잖습니까? 한잔하시겠습니까?”

    “……무관심한 드워프라는 말은 정정.”

    정천우는 헤이먼이 내미는 물통을 받아 들었다.

    술을 좋아하는 종족답게 물통에 술을 채운 모양이었다. 기분이 뒤숭숭하던 참이었기에 헤이먼이 주는 술이 반갑기만 했다.

    “캬아…… 독하네.”

    “맥주가 좋긴 하지만 싸움터에 들고 다녔다가는 무겁기만 합니다. 아쉬운 대로 위스키로 달래는 중입니다.”

    헤이먼은 되돌려 받은 물병을 입에 가져가면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얼굴을 굳혔다.

    “단장님.”

    “말해.”

    “샤칼과 저는 정천우 님을 보필하는 게 임무입니다.”

    “풉!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억지로 날 따르는 거잖아.”

    정천우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샤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이엘프입니다. 녀석이 툴툴거리고는 있지만 임무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헤이먼은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천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진지함을 읽은 정천우는 이내 손사래를 쳤다.

    무거운 얘기는 딱 질색이었다. 자신은 지금 원래의 세계로 넘어가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할 지경이었다. 와 닿지도 않는 얘기에 진지해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헤이먼의 말을 막으려고 했다. 골치 아픈 얘기는 나중에 좀 한가해지거든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뭐라 타박을 주려던 정천우의 인상이 굳어졌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거북스러운 느낌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또 뭐야…….”

    “네?”

    “뭔가가 다가오고 있어. 아주 기분 더러운 기운이 느껴져.”

    정천우가 고개를 돌려 뒤쪽을 살폈다.

    말 위에 올라탄 상태였지만 다른 기사들도 말에 탄 상태였기에 뒤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아악! 막아! 막아!”

    “전방에 구원을 요청해!”

    뿌우우우!

    정천우가 귀에 내공을 집중시키자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뒤이어 위급 상황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또 무슨 일이야?”

    인상을 와락 구긴 정천우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잠시 후 누군가 맹렬하게 말을 몰고 달려왔다. 아미파의 주소용 후작이었다.

    “맹주! 맹주우!”

    주소용은 목이 찢어져라 소리치며 말을 몰고 다가왔다.

    정천우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차라리 그전처럼 ‘천우 경’이라 불러 주는 게 그의 입장에서는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말씀하십시오.”

    사색이 된 채로 말을 몰고 온 그녀에게 정천우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자신에게 생명의 짐을 지운 게 그녀였기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어 대놓고 타박하지 않았다.

    “후방에서 남궁세가의 기사들이 공격을 가하고 있다고 해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젠장! 그런 걸 왜 나한테 묻는 건데?’

    정천우는 울컥하는 마음에 속마음이 겉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나 드러낼 순 없었다. 그녀 딴에는 보고하겠다는 일념하에 온 것이었으니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다.

    “전방에는 아무도 없으니, 모든 기사단을 후방으로 돌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앞장설 테니 뒤를 받쳐 주십시오.”

    정천우는 빠르게 말을 끝내고는 역천검이 장착된 창을 들었다.

    마나 쉐도우를 가득 담은 그의 창은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은 나를 따르라!”

    정천우가 내공을 담아 소리치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이 무기를 꺼낸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정천우와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움직이자 주소용 후작이 전투마의 배를 차고 아미파의 기사단을 향해 달려갔다. 주소용 후작은 자신의 기사단에 복귀하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는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뒤를 따랐다.

    “물러나라! 길을 터라!”

    정천우가 커다란 목소리로 진군하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뒤쪽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병사들은 정천우가 말을 몰고 달려오자 명령을 듣기도 전에 알아서 길을 텄다. 앞쪽이 갈라지기가 무섭게 빠른 속도로 길이 생겼다.

    자신들의 앞에서 진군하던 기사단이 후방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이 빠르게 대응해 주었다.

    “끼랴아! 하아!”

    정천우가 전투마의 배를 걷어차면서 속도를 높였다. 마기(魔氣)가 점점 짙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점점 커지는 비명과 욕설.

    창 자루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체 이 빌어먹을 동대륙엔 얼마나 많은 마교 놈들이 있다는 거냐!’

    싸울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마교의 인물이 끼어 있었다.

    이번에 느껴지는 마기는 이제껏 동대륙에서 느꼈던 그 어떤 마기보다 진했다. 그래서 놓칠 수 없었다. 서대륙에서 넘어왔을 것이 분명한 놈들이었기에 자신의 기량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멈춰라!”

    정천우가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아미파 병력의 후미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적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난리를 피워 대는 통에 병사들이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사방에 핏자국과 잘려 나간 신체의 일부가 나뒹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놈들의 분탕질이 이어졌다면 아미파 병사들은 난리가 났을 게 분명했다.

    “후퇴! 후퇴하라!”

    정천우가 샤벨타이거 기사단을 끌고 가기가 무섭게 마기를 풀풀 풍기는 적 기사단에게서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을 보고 후퇴하는 게 아니다. 그 뒤를 따라오는 아미파의 기사단을 발견하고서 후퇴를 명령한 것이다.

    “서둘러라! 놈들이 도망치려 한다! 끼랴앗!”

    정천우가 창을 높이 들고 기사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적들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면서 속도를 높였다. 정천우가 병사들 틈으로 빠져나왔을 때에는 적 기사단이 벌써 멀리까지 후퇴한 다음이었다.

    “추격한다!”

    정천우가 눈을 빛내며 명령을 내렸다.

    놈들의 수는 대략 100여 명.

    샤벨 기사단을 이끌고 후미를 습격해도 충분히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놈들은 애초부터 정면 대결을 노린 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정천우와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추격에 나서기 무섭게 크로스보우로 쿼렐을 쏘아 대면서 더욱 거리를 벌렸다.

    “정지!”

    정천우는 창을 높이 들고 왼손을 위로 뻗어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수신호에 따라 말을 몰던 샤벨타이거 기사단원이 속도를 줄이다가 마침내 완전히 멈췄다. 뒤를 따라 말을 달리던 아미파의 기사단원들도 멈췄다.

    워낙 거리가 멀어져서 뒤쫓는다고 해도 잡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게다가 만약의 경우 적들이 매복하고서 유인하는 거라면 답이 나오질 않았다.

    “맹주, 어쩌는 게 좋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정천우는 답답한 마음에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너무나 진지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주소용 후작의 모습에 튀어나오려는 짜증을 억눌렀다.

    “우선은 뒤를 지키면서 하북팽가와 합류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정천우는 멀찌감치 떨어진 남궁세가의 기사들을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겨우 100명의 기사단으로는 감히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도록 하북팽가와 합류하는 게 정답이었다.

    정천우가 내민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주소용 후작은 의견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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