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96화 (9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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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24. 세력 확장 (5)

    “고, 공격하라!”

    리차드 장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정천우의 움직임은 그보다 훨씬 더 빨랐다. 리차드 장에게 바람처럼 접근해 혈도를 점하고 방패 대용으로 사용했다. 병사들은 차마 자신의 지휘관을 쏠 수가 없었다.

    리차드 장을 방패로 삼은 정천우는 사람 하나를 들고 있음에도 바람처럼 움직이며 병사들의 혈도를 일일이 제압했다.

    “어억! 내, 내 몸이 안 움직여!”

    “이게 무슨 일이지?”

    생전 처음 혈도를 제압당해 보는 병사들은 당황한 얼굴로 눈알만 굴려 댔다. 만약에 대비해 상주하던 마법사조차 리차드 장을 앞세운 정천우를 어찌해 보기도 전에 제압당해 눈알만 굴리는 신세가 되었다.

    정천우는 성벽 위에 늘어선 백여 명가량의 병사들을 모두 제압한 뒤에야 리차드 장을 내려놓았다.

    “이런 젠장! 어째 더럽게 시간을 끈다고 했더니! 야, 말 많은 새끼! 이따 보자! 넌 교육이 좀 필요하겠어.”

    정천우가 무당파의 영지 방향을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멀리서 병사들이 죽자 사자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생각할 것도 없이 정천우가 성벽 위에서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내공을 일으켜 기운을 발산하면서 낙하 속도를 줄였다. 목표는 성문을 지키는 병사였다.

    파바박! 척!

    정천우의 몸이 성문 양옆을 지키는 병사들의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10미터에 이르는 높이에서 떨어졌음에도 가벼운 마찰음이 고작이었다.

    이곳 세상의 사람들에게야 10미터 높이의 성벽이 부담스럽겠지만 정천우에게는 아니었다. 내공을 사용해 신법과 경공을 발휘할 수 있는 그에게는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았다.

    “엇!”

    “누구…… 큭!”

    병사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해 보고 혈도가 제압되어 몸이 굳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 왜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정천우가 역천검을 뽑으며 중얼거렸다.

    말장난하는 게 지겨워서 나섰다. 기다리는 건 질색이었으니까 말이다.

    역천검에 마나 쉐도우가 맺히는가 싶더니 두꺼운 빗장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시 솟구쳐 올랐다.

    스각! 스각!

    작은 마찰음과 함께 빗장의 중간 부분이 썽둥 잘려 나갔다.

    성문을 활짝 열자 가로막힌 금속 재질의 창살문이 나타났다. 정천우는 주변을 살펴 철창문을 들어 올릴 때 사용하는 도르래를 찾았다. 상당히 뻑뻑했지만 내공을 끌어올린 정천우는 혼자 힘으로 쉽게 줄을 감아 창살문을 들어 올렸다.

    창살문을 열고 정천우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 하북팽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들 역시 장학기와 리차드 장이 벌이는 입씨름에 지쳐 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천우 경! 수고가 많았네! 이 공로는 잊지 않을 걸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적의 지원군이 오고 있으니 속히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지원군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포진한다!”

    팽선웅 백작은 지원군이 온다는 얘기를 듣기가 무섭게 뒤를 돌아보며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하북팽가와 무당파의 패잔병이 합쳐진 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다. 좁은 성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 리차드 장의 구원 요청에 따라 무당파에서 지원 나온 병사들이 달려왔다. 급하게 달려왔기 때문인지 무당파의 병사들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통곡의 벽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왔지만 무당파의 병사들은 몸서리쳐지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이럴 수가…….”

    병사를 이끌고 온 무당파의 기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저히 싸울 엄두가 나질 않았다. 통곡의 벽을 방패 삼아 싸울 생각으로 달려온 것이지, 엄청난 수의 군대와 정면 대결을 벌이러 온 것이 아니다.

    “데티스 님! 마법을!”

    무당파의 기사는 곧 정신을 차리고 함께 온 마법사의 이름을 불렀다.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보고를 듣고 무당파의 마법사들을 모조리 끌고 온 게 다행이었다. 병력의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마법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높이 솟은 절벽을 무너뜨린다면 아무리 대군이라고 할지라도 압사당할 테니까 말이다.

    거기에 한 가지 노림수가 더 있었다.

    하북팽가의 병력이 저렇듯 엄청나다면 출진했던 무당파의 군대가 전멸했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지금 당장 하북팽가와 싸울 수 없으니 차라리 단절시키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ДЁФж…….”

    “фЖЙЭ…….”

    “ЁфЙЭЖ…….”

    무당파의 마법사들은 기사가 소리치는 이유를 깨닫고 곧바로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마법사의 영창이 이어질수록 주변의 기운이 마법사의 마나에 공명되어 진동을 일으켰다. 4서클은 훌쩍 넘어가는 수준급 마법사 다섯이 준비하는 마법은 하북팽가의 사람들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ЙЭЖФБЙ…… 안티매직!”

    주변의 기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뒤틀리기 일보직전에 청아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주문이 먼저 완성되었다.

    “컥!”

    “으헉!”

    “쿠웩! 6, 6서클의 마법이라니…….”

    5명의 마법사는 저마다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했다.

    마법을 구현해 가던 중에 6서클 마법인 안티매직이 펼쳐지는 바람에 몸속을 휘돌던 마나가 한순간에 꼬인 것이다.

    마법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인 동대륙에서 6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가 있을 리가 없었다. 마음 놓고 마법을 완성해 가던 무당파의 마법사들에겐 최악의 치명타였다. 마법사들은 역류하는 마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에 우르르 쓰러졌다.

    사람들은 안티매직 마법을 사용한 하북팽가의 마법사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저 자식들, 한동안 고생 좀 해야 할 겁니다. 그럼 약속대로 잔심부름은 한 달간 제외시켜 주는 겁니다?”

    샤칼이 자랑스럽다는 듯 정천우에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하이엘프의 신분으로 정천우의 잔심부름과 갈굼에서 한 달간 해방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겨우 6서클의 마법을 한 방 써 주고 얻은 혜택치고는 말이다.

    “당연하지! 잘했어.”

    “제기랄…….”

    정천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샤칼을 칭찬하자 헤이먼이 툴툴거렸다.

    샤칼한테 잔심부름을 안 시킨다는 의미는 그 모든 자질구레한 일이 헤이먼의 몫이라는 의미였으니까.

    “무릎 꿇어, 이 자식들아!”

    정천우가 앞으로 나서면서 단전의 내공을 일으켜 사자후(獅子吼)를 터트렸다.

    사방이 꽉 막힌 공간.

    사자후의 수법으로 터져 나온 정천우의 목소리는 양쪽 절벽을 진동시킬 만큼 대단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챙그랑! 챙강, 투두둑!

    지원을 나왔던 무당파의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손과 발에 힘이 빠져 무기를 놓고 무릎을 꿇었다.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마법사들이 맥도 못 추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에 전의가 완전히 꺾였다.

    장천근이 영지의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간 탓에 남은 병사라고는 지원 나온 500명의 병사가 전부였다. 통곡의 벽을 지키는 100명의 병력까지 합쳐서 600명이 무당파 병력의 전부였던 것이다.

    “아아아…… 우리는 끝장이구나!”

    끝까지 무기를 버리지 않고 버티던 무당파의 기사는 마침내 롱소드를 바닥에 꽂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

    하북팽가는 무당파의 영지성을 손쉽게 접수할 수 있었다. 영지에 남은 모든 병력을 제압한 상태였기에 영지성은 텅텅 빈 상태였다.

    장천근의 가족들은 손대지 않았다. 죽은 장천근은 딸만 셋을 두었기에 후사가 없었다. 반란을 일으킬 명분이 없으니, 하북팽가로서는 불필요한 피를 보지 않아서 나쁘지 않았다.

    팽선웅 백작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당파의 민심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마교와 전 영주인 장천근의 동맹을 알렸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장학기가 나서서 진실을 얘기하게 했다. 게다가 포로였던 무당파 병사들의 입을 통해 더 자세하게 소문이 퍼졌다.

    덕분에 무당파의 민심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하북팽가가 점령해 준 것이 오히려 크나큰 자비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빠르게 민심이 안정되었고, 영지민과 병사와 기사들이 하북팽가에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원수처럼 생각해 왔던 그동안의 마음이 이번 일로 변화를 일으켰다.

    영지의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북팽가의 수뇌부는 연일 회의를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무당파의 내성(內城)에 위치한 영주관의 회의실에는 오늘도 하북팽가의 무인들로 북적거렸다.

    “보고드립니다. 우선 하북팽가로부터의 연락입니다. 그란드 경이 무당파와 통하는 진격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몬스터 토벌을 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란드 경이? 의외로군. 허락한다고 전하게.”

    팽선웅 백작은 재미있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순순히 몬스터 토벌을 하가해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번에 몬스터 토벌을 하긴 했지만 아직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군수물자를 하북팽가에서 가져와야 하는 만큼 진격로를 관리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관리하겠다니, 평소의 수동적인 그란드 팽이 적극적으로 변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팽선웅 백작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기사단장보다 나이가 많아 전쟁을 치르기엔 무리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하북팽가의 관리를 맡겼는데 생각보다 잘해 주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다음은 무당파의 영지에 관련된 것입니다. 병사들에게 무당파의 상황을 확실하게 인식시키고,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냈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물러나면 다른 영지의 공격을 받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딴마음 먹을 확률은 지극히 미약합니다.”

    “좋군. 역시 수수 경의 말에 따르길 잘한 것 같네. 그대와 같은 인재가 내 옆에 있어 주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모르겠어.”

    “과찬이십니다, 영주님.”

    팽수수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무력으로 인정받고 싶다던 예전의 생각은 일단 지웠다. 이번 전쟁을 통해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직접 싸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아군이 위기에 처하지 않도록 작전을 구상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해 보니 자신이 세운 작전이 잘 먹히는 데에서 희열 비슷한 감정이 생겼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것 같아 요즘은 아예 기사로서의 일보다는 작전을 구상하고 영지를 안정시키는 일에 더 재미를 붙인 상태였다.

    팽선웅 백작은 팽수수에게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이내 미소를 지우고는 지겹다는 얼굴로 앉아 있는 정천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천우 경!”

    “네, 영주님!”

    정천우는 아침부터 회의실에 모여 따분한 얘기만 나오자 지루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팽선웅 백작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무당파의 기사들을 조련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수련기사 300명에 대한 훈련을 확실하게 마무리했습니다.”

    “확실하게 마무리했다라…… 자네가 그렇게 자신 있어 하니 기대되는군그래.”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북팽가의 기사들보다 두 배 이상 더 철저하게 교육시켰습니다.”

    정천우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호언장담했다.

    그러자 팽선웅 백작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가 말하는 교육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까닭이다.

    “심하게 교육했나?”

    “영주님의 명령이라면 바로 개새끼 흉내도 낼 수 있을 정도로 교육시켰습니다.”

    “그, 그런가? 그렇다면 오후에 확인하러 가도 되겠나?”

    “영주님, 그건 좀 곤란합니다.”

    “어째서 곤란하다는 말인가?”

    “수련기사의 대부분이 치료소에서 치료받는 중입니다. 내일쯤엔 전원 복귀할 예정입니다.”

    “……그렇군.”

    팽선웅 백작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교육을 빙자한 무자비한 구타로 무당파의 수련기사들을 실신 직전까지 몰아갔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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